cloudspotter

[영국음식] 포크 파이 Pork Pie 본문

영국음식

[영국음식] 포크 파이 Pork Pie

단 단 2014. 10. 3. 00:00

 

 

 

 멜튼 모우브리Melton Mowbray 포크 파이.

먹기 편한 미니 파이로 샀는데, 원래는 훨씬 큼.

 

 


파이의 나라 영국.


셰퍼즈 파이,
코티지 파이,
치킨 앤 릭 파이,
머쉬룸 앤 스틸튼 파이,
스테이크 앤 키드니 파이,
스테이크 앤 에일 파이,
게임 파이,
피짓 파이,
피쉬 파이,
포크 파이,
랭카셔 치즈 앤 어니언 파이,
.
.
.
온갖 종류의 파이가 있지요. 한국인들 중에는 "영국음식? 셰퍼드 파이라니, 이름부터가 벌써 혐오스럽잖아."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독일 셰퍼드 개를 떠올리고 그런 소릴 하나 본데, 아니? 영어를 몰라도 어쩜 그렇게 몰라요? 이 사람은 셰퍼드가 '양치기'라는 뜻인 것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셰퍼즈 파이는 이름이 암시하듯 양고기 파이죠.


애플 파이요?
네에, 영국음식입니다. 애플 파이가 영국음식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미국인들은 자기네 음식인 줄 알고 있다는데, 애플 파이는 콜롬버스가 노 잡기 전부터 이미 영국인들이 만들어 먹고 있던 겁니다. 사과 철이니 애플 파이도 조만간 소개해 드릴게요.


고기 파이 중에는 돼지고기로 만든 파이도 물론 있는데, 이것도 외국인들은 잘 모릅니다. 영국 수퍼마켓 어디든 델리 카운터를 가면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 이 포크 파이입니다. 집에서 만드는 건 품이 많이 드니 오늘은 사 먹은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프렌치들이 바겟트나 크화썽을 집에서 안 만들고 사다 먹듯 영국인들도 포크 파이는 수퍼마켓이나 파머스 마켓에서 사다 먹습니다. 영국에서 포크 파이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포크 파이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

 

후자를 좀 더 쳐줍니다. 전통 방식으로 오랜 시간 들여 만들거든요. 유럽연합에 의해 보호·보전해야 할 지역 특산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제조법이 정해져 있는데다 그 이름을 아무나 함부로 갖다 쓸 수가 없도록 법적인 보호를 받습니다[PGI]. 멜튼 모우브리는 잉글랜드 레스터셔에 있는 지역 이름입니다. 치즈처럼 파이 이름에 지역 이름이 붙은 거죠. 일반 포크 파이와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를 구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단 포장에 멜튼 모우브리라는 문구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유럽연합법에 의해 정해진 지역 내의 엄선된 생산자만이 포크 파이에 멜튼 모우브리라는 이름을 붙여 팔 수 있는데, 현재는 다섯 개의 생산자가 이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위 사진의 파이 포장을 유심히 보세요. 어디에도 멜튼 모우브리라는 문구가 써 있질 않죠. 그렇다고 이런 파이들은 멜튼 모우브리 파이보다 맛이 떨어지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멜튼 모우브리 지역 밖에서도 명물 아티잔 포크 파이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어요. 영국에서는 매년 파이 대회를 개최하는데, 포크 파이도 그래서 일반 포크 파이와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 이렇게 두 범주로 나누어 상을 줍니다. 위 사진에 있는 것은 일반 포크 파이 부문에서 수상을 한 제품이고요. 케이크처럼 웨지로 잘라서 여럿이 나누어 먹습니다. 작년 통계에 따르면 영국인들이 사 먹는 포크 파이의 삼분의 일 정도가 멜튼모우브리 포크 파이였다고 합니다.

 

 

 

 

 

 

 

 

2.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와 일반 포크 파이를 구분하는 두 번째 방법은, 파이의 옆면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었는지 볼록하게 살짝 쳐졌는지를 확인하는 겁니다. 일반 포크 파이, 특히,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포크 파이들은 거의 대부분 머핀 틀 같은 금속 틀에 넣어 굽기 때문에 옆면이 매끈하고 곧게 뻗어 있습니다. 반면,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는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파이 옆면을 세우고 틀 없이 굽기 때문에 구워질 동안 파이 옆면이 물주머니 쳐지듯 살짝 볼록해집니다. 틀에 박혀 일직선으로 나온 공장 제품보다는 좀더 제각각이면서 자연스럽고 예뻐 보이죠. 파이 옆면이 마치 아가들 볼따구니처럼 볼록한 게 귀엽지 않나요?

 

 

 

 

 

 

 

 

 



3. 마지막으로, 돼지고기 소의 색과 상태를 확인하는 겁니다. 공장제 대량생산 포크 파이는 조제한 고기를 쓰는데다 발색제까지 넣기 때문에 대개 스팸 같은 발그레한 분홍빛이 납니다. 고기도 '민찌'로 갈아서 쓰는 경우가 많고요. 반면,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는 조제하지 않은 생고기를 쓰고 발색제 같은 첨가물을 일절 쓰지 않기 때문에 돼지고기 소에서 회색빛이 돕니다. 익힌 돼지고기의 색이 원래 그래요. 발색제 넣은 공장제 햄에 익숙한 우리들은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를 갈라 보고 "돼지고기 색이 왜 이리 칙칙해? 상한 거 아냐?" 손사래치기 딱 좋죠. 고기도 간 고기를 쓰지 않고 칼로 큼직큼직하게 썬 것을 양념한 뒤 꼭꼭 뭉쳐서 넣습니다. 돼지고기는 영국산으로만 씁니다.

 

 

 

 

 

 

 

 

포크 파이의 역사는 꽤 깁니다. 위 영상에서는 18세기 초와 19세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1390년 리차드 2세의 궁정 요리책에 이미 얇게 민 밀가루 반죽 안에 돼지고기를 가두어 익히는 조리법이 실려 있습니다. 유럽연합에 의해 보호 받는 현재의 멜튼 모우브리 포크 파이 제조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파이지는 밀가루와 라드lard로 만듭니다. 그 때문에 고소하고 진한 맛이 나죠. 뜨거운 물에 반죽하는 'hot water pastry' 방식을 쓰기 때문에 파이지의 식감도 좀 독특합니다. 잘 바스라져요. 이렇게 만든 파이지를 '돌리dolly'라 불리는 나무 기둥을 써서 세운 뒤 그 안에 양념한 돼지고기 소를 넣습니다. 그리고는 위에 파이지로 뚜껑을 씌워 밀봉을 합니다. 그런 다음 뚜껑에 작은 구멍을 내고 돼지고기 육수를 흘려 넣습니다. 그래서 포크 파이 위뚜껑에 구멍이 하나씩 '뽕' 나 있는 거예요. 육수에 젤라틴을 넣어 녹였기 때문에 굽고 나서 식히면 육수가 젤리처럼 굳어 파이지와 고기 소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보기에는 건조해 보이나 이 육수 젤리 덕분에 제법 촉촉해서 목이 메이지 않아요.

 

 

 

 

 

 

 


 포크 파이 위에 새콤달콤한 크랜베리 조림을 얹기도 함.

정통은 아니지만 이것도 인기가 많음.



제 치즈 시식기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레스터셔 지역은 예로부터 치즈 생산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치즈를 만들고 나면 부산물로 유장whey이 많이 생기는데, 이태리에서는 이 유장을 써서 리코타 치즈를 만들었지만 대개의 지역들은 이 유장을 그냥 버렸습니다. 레스터셔 지역에서는 과거 유장 활용 방안을 궁리한 끝에 돼지를 치기로 결정을 합니다. 돼지들이 유장을 잘 먹거든요. 맹물보다는 아무래도 단백질 같은 영양가가 많았을 테니 일석이조였겠지요.

 

그런데, 지금이야 연중 내내 치즈를 만들지만 옛 시절엔 소가 젖을 내는 철이 한정돼 있고 원유 저장 방법도 여의치 않아 겨울철에는 치즈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요. 돼지 먹이로 쓰던 유장의 공급도 끊길 수밖에요. 그래서 겨울에는 그간 키운 돼지들을 잡아 포크 파이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포크 파이는 겨울철 음식으로 통했습니다. 딱딱한 껍질 안에 밀봉하듯 돼지고기를 담기 때문에 제법 오래 저장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수분이 적기 때문에 밖에 갖고 다니면서 먹기가 좋아 농민들이 새참으로도 이 포크 파이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포크 파이의 껍질은 그저 돼지고기를 담는 도시락통 용도로만 썼기 때문에 돌처럼 딱딱하고 맛이 없었답니다. 껍질을 부숴서 속에 든 돼지고기만 꺼내 먹고 부순 껍질은 그냥 버렸다지요.


한 해 농사가 끝나고 농한기인 늦가을과 겨울이 되면 영국의 사냥 철이 시작됩니다. 잉글랜드 각지의 귀족들이 사냥을 즐기러 삼삼오오 모이곤 하는데, 멜튼 모우브리는 지금도 사냥터로 각광 받는 곳 중 하나입니다. 현지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손에 포크 파이를 들고 먹는 것을 보고는 "그게 뭐요? 나도 하나 좀 줘보슈." 해서 이 귀족 나으리들이 포크 파이를 얻어먹곤 했다는데, 속에 든 돼지고기 소는 기차게 맛있으나 도시락통 역할을 하던 겉껍질은 딱딱해서 도통 먹을 수가 있어야죠. 이에 껍질까지 맛있게 다 먹을 수 있도록 잘 좀 만들어 달라고 현지인들에게 주문을 하기 시작하죠. 이렇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맛있는 껍질의 포크 파이가 탄생을 하게 된 겁니다. 사냥 철이 끝나 귀족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갈 때 포크 파이들을 잔뜩 챙겨서 돌아가곤 했는데, "이거 맛있는데 일년 내내 먹을 순 없을까?" 해서 당대에 이미 오늘날과 같은 '우편 주문 판매'가 시작되었고 영국 전역으로 퍼져 유명해졌습니다. 레스터셔 지역의 작은 동네에서 겨울철에만 먹던 음식이 영국 전역에서 연중 내내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된 것이지요. 지금도 영국인들은 피크닉을 갈 때면 우리 한국인들 김밥 싸 갖고 나가듯 이 포크 파이를 들고 나갑니다. 뜨겁게 먹지 않고 그냥 실온 상태로 즐기는 음식입니다.

 

 

 

 

 

 

 



사진에는 예쁘게 보이라고 잔뜩 늘어놓았는데요, 밀도가 높기 때문에 사실 작은 것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저는 이제 묵직한 영국음식이 좋아졌습니다. 영국 기후에 딱 맞아요. 프랑스의 저 크림 찔끔 짜 넣은 공갈빵인 프로피테롤이나 에끌레어 같은 건 먹고 나면 마음이 허해서 이젠 잘 안 사 먹습니다. 부피에 비해 양이 적어 사기 당한 것 같아요. 영국에서 온돌 없이 가을·겨울을 몇 해 보내고 나면 제가 하는 말 다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추울 땐 그저 묵직한 영국식 케이크나 뜨거운 영국식 푸딩에 진한 밀크티가 최곱니다.

 

영국인들은 고소하고 느끼한 포크 파이를 먹을 때는 사진에 있는 노란색의 쨍한 피클 '피칼릴리piccalilli'를 곁들입니다. 피칼릴리는 다음 게시물에서 따로 소개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크랜베리 소스를 만들어 올려 먹어도 좋음.

 



☞ 영국음식 열전
☞ 피칼릴리 만드는 법
☞ 크랜베리 소스 만드는 법
☞ How the Humble Pork Pie Charmed the English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