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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승리호, 재미있었던 요소들 (스포 잔뜩)

단 단 2021. 2. 10. 10:50

 

 

Sci-fi 애호가인 다쓰 부처는 둘 다 재미있게 봤어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충만해 설에 가족 영화로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단, 대사가 잘 안 들린다고 하니 영화 보실 분들은 한글 자막을 띄워 놓고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재미있었던 부분들, 또 열거해 봅니다.

 

 

 

 

 

 

촌스러운 이름들

승리호, 장선장, 박씨, 태호, 업동이, 꽃님이, 순이...

작명이 인상적이었는데, '장선장'이 야리야리한 젊은 처자인 것도 재밌고, 터프 가이 '타이거 박'을 공사판 인부 부르듯 '박씨'라고 부르는 것도 재밌고, 이름만 들어서는 가장 정의롭고 늠름할 것 같은 '태호'가 돈이 최고야 하고 있는 것도 재밌고. '승리호', '태호', 이거 우리 어릴 때 만화영화에 나왔던 이름 아닌가요? 

 

그나저나,

송중기라는 배우는 이 영화에서 처음 봅니다. (→ 간첩)

어따, 잘 깎아 놓은 밤톨처럼 땡글땡글 잘생겼더라고요. 

뉘집 아들인지.

 

 

 

 

 

 

새싹

Sci-fi 영화의 오래된 클리셰 중 하나가 생명과 소생을 뜻하는 '새싹'을 보여 주는 거잖아요? 파괴되었던 지구 환경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또는 새로 이주할 행성이나 우주상의 공간이 살 만한 환경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로 쓰이곤 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희망, 경이로움만 표현하는 게 아니라 열매를 따서 푼돈을 마련합니다. ㅋㅋㅋㅋㅋㅋ 토마토로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 냈죠. 역시나 미뢰 둔한 어른들은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먹고 꼬마는 퉤퉷.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는 여자 아이
Sci-fi 영화의 또 다른 클리셰 - 초능력을 가졌거나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여아 또는 소녀를 등장시켜 선한 편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는 거죠. 이 영화에서는 이를 마냥 신비로운 존재로만 떠받드는 게 아니라 천진난만 귀여운 모습이 드러날 수 있게끔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많이 심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홀리우드 sci-fi처럼 아이가 시종일관 극도의 불안으로 정신 이상을 보이거나 죽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어이구내새끼1 어릴 때를 보는 것 같은 귀여운 모습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오는데, 머리 감는 장면에서 "앗 차거!" 하는 것두, 얼굴에 묻은 물 어푸어푸 손으로 문지르는 것두 늠 귀여워요. >_< 심지어 아이용 우주복 입고 있는 것도 늠 깜찍해요. 꼬마들 둘이 연기를 잘하더라고요. 뉘집 딸들인지. 

 

 

"언니?"

이 장면이 아주 재미있어서 몇 번이나 돌려서 다시 봤는데, 트랜스젠더들 사이에서도 업동이가 sci-fi 사상 최초의 트젠 안드로이드라며 환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언니느은~ 공대공 타겨억, 오염 지역 침투우..."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데 말투는 나긋나긋. 

 

 

영국 발음
역시나 악당은 또 영국인입니다. 영국 발음이 우아하면서도 씨니스터하게 들리긴 하죠. 끄덕. <스타 워즈> 마지막 편에서 또박또박 근사한 영국 발음으로 일장 훈계하는 팔퍼틴 보세요. 악당 발음으로 손색이 없죠. 참, 스노크도 영국 발음 쓰잖아요?

 

 

 

 

 

 

오이 샌드위치
근데 이 악당이 기자들 불러 앞에 세워 놓고는 점심을 굶었는지 자기 혼자 조촐한 티타임을 가지는데, 잘 보면 오이 샌드위치가 올라와 있어요. 그거 보고 눈이 땡그래진 단단. 악당이 영국인이라는 것과 오이 샌드위치가 선택 받은 소수가 즐기기에 손색이 없는 '귀족적인' 음식이라는 것, '여기 새로 이주한 공간에서도 싱싱한 채소로 즉석에서 만든 음식을 하루 어느 때고 즐길 수 있다'는, 이중삼중 메시지를 담은 소품인 거죠. 제작진이 하고 많은 음식 중에 간단하지만 많은 함의를 띤 음식으로 오이 샌드위치를 고른 건 잘한 판단이었다고 봅니다. 짝짝짝.

 

 

 

 

 

 

찬바람 쌩, 얼음장 같고 파워풀한 카밀라
태호의 뒤를 이어 넘버원이 된 이 언니. 여어, 대사 한 줄 없는데 멋집니다. 특히 눈 아래로 내리깔거나 치켜뜨고 상대방 보는 거. 박씨와 싸우는 장면은 카메라 앵글이 특히 근사한데, 카밀라의 움직임도 잘 보면 우리 전통음악이나 전통춤에서 보는 것 같은 '정중동' 삘이 나서 더 의젓해 보입니다. 손끝 세우고 타타타탓 다리 건너는 모습도 멋지고, 스파이더맨처럼 휘이이익 날아다니는 모습도 멋지고. 관악구민이랍니다.

 

 

순정의 피에르
장선장 괴롭히는 나쁜놈들을 향해 주먹 휘두르며 우리말로 "개자식!" 합니다. 또, "장선장! C'est moi!" 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지막에는 장선장을 거들면서 "돈 내놔!" 외칩니다. 허허, 외국어 빨리 배우려면 그 나라 사람과 연애해야 한다더니.



각자 자국어로 지껄지껄
이 설정, 참신합니다. Sci-fi 영화에서 지겹도록 듣던 영어가 드물게 들리니 그것만으로도 새로워요. 세계 시청자들의 감상평들을 죽 읽어 보면 자기네 말 들린다고 신나하는 사람이 수두룩. 어느 데이니쉬는 sci-fi에서 자기네 말이 이렇게 오랫동안 들리는 건 처음이라며 감격합니다.

 

 

신파

30대 초반까지는 한국식 신파든 홀리우드식 신파든 영화에서 신파의 시옷 자만 보여도 질색을 했는데, 나이가 드니 역치가 높아져 <승리호> 정도의 신파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늙어가면서 죽음과 이별을 많이 겪어 그런 것 같아요.

 

 

한국식 개그 코드

제가 요즘 양인들이 만든 sci-fi들만 주욱 찾아서 보고 있었는데, 물리던 참에 한국식 개그가 들어간 sci-fi를 보니 나름 참신했고 한국영화의 특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의 어떤 테크놀로지 잡지에서 "왜 sci-fi는 항상 진지하고 심각해야만 한다고 생각들을 하지?" 의문을 제기한 글을 읽은 적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뉘앙스

이 영화 보는 내내 염려했던 점은, 우리말이 주는 껄렁하고 정겨운 말맛이 세계 시장에 번역해 내놓았을 때 충분히 살 것 같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가령,

 

• 환장하겠네 → I can't believe this

 야매루다가 → A black market...

 돈 내놔 → Pay up

 박씨 → Mr Park

 업동이 → Bubs

 

이런 식이니 안타까울 수밖에요.

 

 

클리셰 범벅

이게 문제가 되나요? Sci-fi 영화치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작품은 거의 없을 텐데요. 이 장르에서는 특히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죠. 음악을 전공한 저로서는 이 문제에 관대할 수밖에 없는 게, 음악에는 아예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음악수사학', '토픽 이론', '종지'(cadence), '공통관습시대'(common practice era) 등의 관례가 다 있을 정도로 공통 어법이나 클리셰의 사용이 만연합니다. 이게 없으면 오히려 낯설고 난해한 음악이라며 청자들이 난리를 치죠. 대중음악은 더 심하고요. 중요한 것은, 클리셰를 잔뜩 넣고도 창작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담아 냈느냐, 차이점을 만들어 냈느냐, 감상자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이 정도면 괜찮았고 저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기존 영화의 요소나 설정을 차용했다는 점을 혹평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창작에 대한 기본 이해가 부족한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떡국 끓여야 하니 일단 여기까지 씁니다.
생각 나는 대로 또 추가하겠습니다.

 

참,

마지막에 다 같이 모여 밥 먹는 장면에서 꽃님이 얼굴에 밥풀 붙은 거 알아차리신 분?

 

 

 

지금까지 본 SF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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