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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호텔 라연 후기 La Yeon 본문

한식과 세계 음식

신라호텔 라연 후기 La Yeon

단 단 2021. 5. 1. 04:47

 

 

 

 

 

라연에 관해 썼던 글들을 먼저 읽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 삼치는 맛있는 생선이었습니다

☞ 참 어려운 음식, 김치

☞ 아름다운 한식 그릇

☞ 한식 백반 구성 시 고려해야 할 점

한식 샐러드와 드레싱

 

 

미슐랑 별 세 개를 받은 식당이라고 하면 손님들은 '과연?' 하며 촉각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오감을 총동원해 평가를 하려 듭니다. 제가 이 블로그에서 밤낮 한식과 작금의 한국 식문화에 대해 지적질을 해 대니 한식을 깔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많이 계실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식에 맛있는 음식 많잖아요. 양념고기구이들도 참 맛있고요. 섬유질도 많이 섭취할 수 있고, 장내 유익균 조성에도 아주 유리한 식문화죠. 다만, 재료를 중복해서라도 많이 차려 내야 한다는 '가짓수 많이' 식단 구성 관습과 음식을 내는 방식은 좀 바뀌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식들이 지나치게 매워지거나 달아지는 것에도 비판적이고요. 

 

저는 사실 한식당에 대해서는 늘 연민을 느낍니다. 한상차림이든 코스든 한식당은 마른 수건 쥐어짜서라도 산해진미를 차려 내야 한다고 다들 기대를 합니다. 늘 보는 우리 음식이니 응당 값 싸면서 푸짐해야 한다고 여기죠.

 

미슐랑 가이드 서울판이 나온다 하니 수지 안 맞아 문 닫았던 호텔 한식당들이 부랴부랴 문을 다시 열었습니다. 그런데 애써 별을 얻은 한식당들도 명성이나 사명감 때문에 근근히 이어가지 이문이 많이 남지는 않을 겁니다. 서양에서도 미슐랑 별 얻은 식당들은 인건비, 재료비로 다 나가 이익이 안 난다면서요. 그러니 손 많이 가는 한식은 말할 것도 없죠.

 

치즈와 조제고기 사다 집에서 샤퀴테리 보드 즐길 때마다 저는 한식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쉽니다. 가장 인기 있는 서양음식인 이태리 음식을 떠올려 봅시다. 장인들이 수 백년에 걸쳐 다듬어 온, 그 자체로 완성도 있는 식재료들 덕에 한식처럼 고생고생해서 차려 내지 않아도 맛있고 보기에도 좋은 음식들이 뚝딱 나와 줍니다. 치즈와 조제고기만 잘 활용해도 맛 내느라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죠. 다채로운 파스타 건면들은 또 어떻고요. 게다가 이런 식재료들로 수출은 또 얼마나 많이 하게요. 갓 구운 피짜나 빵 위에 프로슈토 휘휘 감아 몇 점 올리기만 해도 근사하고, 치즈 슥슥 저며 흩뿌리기만 해도 맛이 풍성해집니다. 한식은, 어휴, 한 나절을 다 써 가며 반찬 서너 가지 만들어도 먹을 만한 밥상이 될까말까.

 

한식 준비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저는 라연에서 한 끼 184,666원 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비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 라연 한식기 예찬글에 있는 음식 사진들을 유심히 보셨나요? 눈썰미 있는 분들은 재료 다듬고 썰고 준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눈치 채셨을 겁니다. (깨알 잘생긴 것 보고 깨알도 핀셋으로 하나하나 고르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잘 준비해 내는 한식당은 맛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감사한 마음으로 먹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자선사업을 하고 있구나.'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연과 같은 층에 컨티넨탈 식당이 있는데요, 거기서 일하는 분 말씀에 의하면, 라연은 주방 인원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더군요. 한식이라서 값은 많이 받지도 못 하는데 준비 인력은 그토록 많이 필요로 하는 게 한식당들의 처지란 말이죠. 그릇 설거지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한식 파인 다이닝 식당은 그 존재만으로도 감사합니다.

☞ 한식의 처지

 

이날 라연은 어땠냐면요,

일단, 먹는 환경, 서비스 질, 음식 내는 품격은 최고입니다. 별 세 개, 당연합니다. 끄덕끄덕.  

 

음식도 훌륭합니다. 진짓상의 김치와 반찬 구성만 빼고는 다 맛있었고, 서양 테크닉과 서양 재료의 조잡한 변용 없이 한식 재료들만 쓴 것이 뚝심 있어 보였으며, 세련된 맛에 조리 솜씨execution도 수준급이었습니다. 끄덕끄덕.

 

그런데요,

다 먹고 나서 뭔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일행 셋이서 왜 그럴까, 머리 맞대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너무 정제해 한식의 푸근한hearty 맛, 재료의 생생한 맛과 향, 맛깔난 양념 맛이 다 사라져서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인의 일상 한식을 떠올릴 때 저는 가장 먼저 고추장·고춧가루를 쓴 빨간 음식과 간장, 된장, 마늘이 생각 나는데, 라연의 음식에서는 간장을 빼고는 이것들이 전부 배제돼 있습니다. 좋든 싫든 '빨간 음식'과 '강렬한 맛'은 현대 한식의 큰 특징인데요. 마치 '우리 라연의 주방 팀은 한식의 '거친' 특성들이 부끄러우니 이런 것들은 다 배제하고 일식에 가깝게 정제해서 내겠어요.' 느낌이 들었달까요. 삼치간장구이에서 이 느낌이 특히 강하게 들었었는데, 라연의 삼치구이는 한식이 아니라 일식이라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한식의 특성을 많이 지운 미슐랑 쓰리 스타 한식을 받고 나니 한국인으로서 어쩐지 섭섭합니다. 

 

전에 BBC에서 아시아 음식 기행기를 내보낸 적이 있어 제가 이 블로그에서 다뤘었는데 기억하십니까? BBC 측에서 '인상적인 한식'으로 빨간 음식들을 얼마나 많이 꼽았는지 보십시오.

BBC에서 조만간 소개할 헤어리 바이커스의 한식

 

영국인 진행자 둘이 여러 아시아 나라들을 둘러보고 나서 다른 식문화가 가지지 못 한 한식의 특징으로 '과감하고 화끈한 맛'을 꼽습니다. 이건 단점이 아니라 장점입니다. 그런데 라연의 한식은 어찌된 일인지 영국 전통음식을 재해석해 선보이는 헤스톤 블루멘쏠Heston Blumenthal의 <디너Dinner> 음식들보다 맛이 심심합니다. 우리가 밋밋하고 심심하다고 불평하는 그 영국음식보다도 밋밋하고 심심한 게 라연의 음식들이란 말이죠. 음식에서 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의아했는데, 그 많은 코스 음식 중 향이 기억 나는 음식은 마지막의 딸기 후식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코스들은 마치 재료를 끓는 물에 한참 담가 재료가 가진 고유의 맛을 전부 빼낸 뒤 양념을 최소한으로 입힌 듯했습니다. 향은 차치하고 재료 맛조차 나지 않아 대화도 일절 중지한 채 집중해서 맛을 느끼려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간장 맛만 기억에 남습니다. 라연은 '파인 다이닝'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날 함께 했던 일행 모두 라연의 음식은 '뺄셈을 너무 열심히 한 음식'이라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디너 바이 헤스톤 블루멘쏠

 

2월이라 아직은 식물성 재료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때라서 그랬는지 같은 재료의 중복도 많이 보였습니다. 식감을 달리 해서 내기는 했지만 밤은 아홉 코스 중 무려 일곱 코스에 등장했고, 식감과 맛이 독특해 한 알만 씹어도 그 잔상이 오래 갈 수 있는 은행은 두 코스에서 먹었으며, 배추 종류는 수시로 나오는 데다 대접으로 내니 양도 많아 한숨 쉬며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식당이 소중합니다. 이토록 우아한 한식 밥상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누리터에서 방문기를 보니 참 많은 이들이 이 곳에서 특별한 날들을 기념하고 있어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꽃다발 준비해 청혼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화이팅!) 라연이 한식의 특장점을 과감히 살려 좋은 음식들을 계속 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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