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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즐기는 아프터눈 티]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본문

차나 한 잔

[집에서 즐기는 아프터눈 티]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단 단 2010. 7. 19. 05:15

 

 

 

 

친애하는 방문자 여러분.

 

우선 오늘의 제목부터 다시 좀 봐 주십시오.
결혼 10주년.
감동의 물결이 텍사스 소떼처럼 밀려옵니다.
결혼 20주년, 30주년, 40주년, 50주년 맞은 분들이 수두룩한데 시건방진 소리 말라고요?
다쓰베이더의 부친, 단단의 시부께서 결혼 전 저희 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났다 헤어지기를 쉬 여기는 요즘 젊은이들 답지 않게 꽤 오래 사귀었구나. 아비가 그 점 높이 평가한다."


수년의 연애 끝에 결혼하겠다 말씀 드리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쓰베이더의 남동생은 색시 될 아가씨와 만난 지 3개월만에 후다닥 결혼했는데, 이것도 참으로 멋진 일 아닙니까? 첫눈에 자기 짝을 알아보고 이렇게저렇게 잴 것도 없이 단숨에 승부를 보다뇨. (사고 쳐서 결혼한 거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를.) 한편, 다쓰베이더의 여동생은 코흘리개 국민학교 시절 만난 동창생과 오랜 줄다리기 끝에 결혼했습니다. 저희보다 더 징한 인연입니다.

 

오랜(?) 결혼 생활의 공은 전적으로 다쓰베이더에 돌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성격 좋은 사람 처음 봤지 말입니다. 전 떠벌이 남자, 허풍쟁이 남자, 멋있어 보이려고 거짓말 밥 먹듯 하는 남자, 터프한 척 하는 남자, 잘난 척하는 남자, 매사에 냉소적인 남자, 투덜이 남자, 다혈질 남자, 지나치게 패션-컨셔스한 남자는 질색인데, 다쓰베이더는 우선 이런 부류는 절대 아닙니다. 단단이 처음 다쓰베이더를 보았을 때는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작지만 깊은 눈과 가닥가닥 뭉친 곱슬머리, 남루한 듯 독특한 행색 때문에 국문과 다니는 시인 지망생쯤 되는 줄로 착각했더랬습니다. 어딘지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있지 않는 듯한 묘한 아우라가 있었지요. 그 날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저와 같은 전공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저보다 불과 한 살밖에 더 많지 않은 선배였다는 사실에요. ㅋ 

 

괴팍한 예술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단단은 대학 신입생 시절, 다쓰베이더가 자기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만 스무살이 채 안 된 머리 굵은 젊은이가 자기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진지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 나이 땐 으레 제 부모 알기를 흑싸리 껍데기처럼 여기는데 말입니다. 전 다쓰베이더의 그런 점을 '제대로 된 집안에서 자란 제대로 된 젊은이'의 증표로 여겼더랬지요.

 

한편, 다쓰베이더는 신입생 단단이 학생식당에서 밥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동무들에게 "나 같은 날라리가 대학에 입학을 다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랴!" 너스레 떠는 걸 지나가다 우연히 듣고는 신을 경외할 줄 아는 경박하지 않은 참한 처자인 줄로 감쪽같이 속았다지 뭡니까. 뭐, 단단과 다쓰베이더는 대략 이런 식으로 서로 착각 속에 엮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신의 섭리'라고 할 수밖에요.

 

남녀가 만나 뜨거운 3년이 지나면 눈에 씌었던 콩깍지는 말끔히 벗겨지고 서로 비듬 털어 주고 방귀 트는 '리얼리즘'의 시대를 맞게 된다고 합니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나면 '휴머니즘'의 시대가 온다고도 합니다. 연애와 결혼 기간 합쳐 십수년이 지나고 나니 진정 휴머니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도 같습니다. 요즘은 어쩐지 다쓰베이더가 '쯧쯔... 저 진상. 내가 아니면 누가 건사하겠나.' 하는 측은한 눈으로 저를 보는 것 같거든요.

 

각설하고, 오늘의 찻상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매년 돌아오는 생일도 성탄절도 아닌 결혼 '10주년'을 맞았으니 궁극의 아프터눈 티테이블을 한번 꾸며 보자!" 의기 투합하여 차린 상입니다. 엊저녁부터 꼬박 하루 걸려 어이구어이구 하면서 차렸습니다. 죄다 집에서 만들었어요. 보이는 건 어떻든지 간에 칭찬 좀 해주세요.

 

핑거 샌드위치는 훈제연어와 오이 샌드위치 2종만.  

 

스콘은 거무튀튀 까칠한 스펠트밀만 써서 만들었더니 저 모양입니다. 어느 분은 식충 식물인 '파리지옥' 같다고도 하십니다. 사진발을 위해 앞으로는 그냥 뽀얀 백밀을 써야겠습니다.

 

 

 

 

 

 

 

 

 

휴...
쵸콜렛 갸또 만든답시고 비싼 쵸콜렛들을 얼마나 망쳤는지 몰라요. 지식도 없이 쵸콜렛 템퍼링 한다고 나대다가 아주 난장판을 만들었어요. 원래 의도했던 건 미니 케이크를 만든 후 쵸콜렛을 흠뻑 씌워 정교하고 복잡한 투톤 마블링을 만드는 거였는데 망했습죠. 부랴부랴 수퍼마켓에서 비슷한 모양의 쵸콜렛 과자를 사다 장미 느낌 비슷하게 흰 쵸콜렛으로 간단한 소용돌이나 얹어 주었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뒤쪽의 오렌지색 장미 과자는 색소 넣은 버터크림을 짠 게 아니라 열대과일인 파파야를 써서 만든 겁니다. 파파야를 채칼로 얇게 저며 크림 담은 타트 케이스 위에 휘리릭 감아 올렸습니다. 장미 느낌 비슷하게 나나요?

 

녹차가루와 피스타치오를 써서 마카롱도 구웠습니다. 색소 안 쓰고 하려니 고운 색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싼 녹찻가루를 들이부었는데도 저렇게밖에 색이 안 나옵니다.

 

영국인들의 티타임에 스콘 다음으로 많이 올라온다는 '빅토리아 스폰지'도 작은 크기로 구워 봤습니다. 호텔 아프터눈 티 테이블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클래식) 케이크도 꼭 내더라고요.  

 

 

 

 

 

 

 

 

 

냅킨링 대신 리본을 써 보았습니다. 불량소녀 님께 배운 아이디어입니다. 냅킨링보다 훨씬 예쁘면서 돈은 적게 드네요. 영국산 리본이라 질이 아주 좋아요. 두툼한데다 양면 모두 앞면인 양 반짝반짝 빛납니다. 영국에서 만드는 물건이 아직 남아 있긴 하네, 감탄하며 묶었습니다. 다쓰베이더가 좋아하는 파란색으로 맞춰 보았습니다.

 

 

 

 

 

 

 

 

 

자연스럽고 화려한 영국식 꽃다발을 선보이고 싶었으나 제 형편에 절화는 너무 비싸 작은 장미 화분으로 대신했습니다. 꽃뿐 아니라 풍성한 이파리도 보기 좋지요. 꽃다발에서는 홀대 받는 게 또 이 이파리잖아요. 티테이블에 화분을 올릴 때는 대신 화분의 흙이 보이지 않도록 잘 가려 주세요. 조화말고 한 송이를 올리더라도 반드시 생화로 올려 주시고요.

 

 

 

 

 

 

 

 

 

오늘 찻상에는 아쌈이 올라왔습니다. 매번 같은 양을 써서 같은 방법으로 차를 우리는데도 어떤 날은 차맛이 특별히 더 좋은 때가 있어요. 희한하죠. 고맙게도 오늘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오늘따라 단맛이 많이 나면서 장미향이 기분좋게 훅 올라왔습니다. 장미가 직조된 은은하고 낭만적인 식탁보에 장미 느낌이 나는 과자들, 그리고 장미 화분. 오늘의 차와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한편.
우리 집 부엌.

 

 

 

 

 

 

 

 

 

켁,

서민이 귀족처럼 즐기려니 몸이 죽어나는구나. 언제 다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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