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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티백 맛있게 우리기 본문
▲ 티백으로 만든 작품. Long live the Queen!
오늘은 홍차 티백 맛있게 우리는 법을 소개해드리려구요. (→ 요리 선생 말투로 하기로 함.) 직업에 귀천 없고 홍차에 귀천 없어요. 싸구려 티백이라도 자기가 맛있다고 느끼면 그만이니, 수퍼마켓에서 사은품으로 머그 하나 얹어 준다길래 얼떨결에 대용량 티백 집어온 분 계시다면 그거 맛있게 한번 우려보자구요. 제대로 우린 티백은 산차loose-leaf tea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맛있어요. 산차 맛있게 우리는 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실천하기 힘드니 일단 티백으로 홍차의 세계에 입문해보아요.
1. 아무 컵이나 상관 없지만 찻잔 안쪽이 흰색인 것이 좋아요. 우러난 홍차의 색깔을 보는 건 홍차의 향을 맡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 보통 홍찻잔은 커피잔보다 낮고 지름이 커요. 뜨거운 찻물을 마시기 좋게 빨리 식히기 위해서예요.
2. 신선하고 산소가 많이 들어간 찬물이 좋아요. 즉, '그냥 물'이면 돼요. 한 번 끓었다 식은 물은 다시 쓰지 않는 게 좋아요. 죽은 물이거든요. 컵 데울 것을 염두에 두고 넉넉한 양을 준비해요. 한 잔을 보통 200ml라고 생각하면 돼요. 녹차와는 달리 홍찻물은 95˚C 이상 높여야 폴리페놀인지 포름알데히드인지 하는 이름 어려운 성분이 잘 우러난다는 건 다 아실 거예요. 끓는 소리에 속지 마세요. 동전만 한 기포가 '펄럭'하고 올라와야 비로소 완전히 끓은 거예요. 너무 요동치도록 마냥 내버려 두어도 안 돼요. 산소가 다 빠져나가 맛없어져요.
3. 찻잔에 끓는 물을 미리 부어 휘휘 돌린 뒤 버려주세요. 찻잔 먼저 데우는 거예요. 그 뒤 차 우릴 물을 새로 담아요.
4. 물 먼저 붓고 티백을 찻잔 가장자리에서 슬쩍 밀어넣으세요. 보통은 티백을 먼저 턱 던져 놓고 그 위에 인정사정없이 뜨거운 물을 들이붓는데 그럼 못써요. 성질난 티백이 쓴 성분을 잔뜩 토해 내고 위로 붕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어요. 티백이 위에 둥둥 떠버리면 곱게 우러날 리가 없어요.
5. 우러날 동안 식지 않도록 찻잔 받침으로 덮어주세요. 날아가는 향도 잡아 둘 수 있어 좋아요. 좌우간 홍차는 뜨겁게 우리는 것이 중요해요. 영국인들은 찻주전자로 차 우릴 동안에도 식지 않게 하려고 별의별 짓들을 다 해요. 털실로 찻주전자 옷도 다 짜서 입혀요. 영국인 지도교수 댁에 처음 간 날 교수님이 부엌에서 차 우리는 걸 슬쩍 훔쳐봤는데 정말로 주전자에 옷을 입히고 계셨어요. 영어는 못 하고 웃겨는 죽겠고. 대화 도중 마시던 찻잔 저기 있는데 선생 차를 내 차로 알고 덥석 마셔버리는 바람에 결국 지도교수는 튜토리얼 내내 차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저는 두 잔이나 마셨다죠. 진상이 따로 없어요.
▲ 동네 수퍼마켓에서 팔고 있는 티/티포트/티코지 세트.
6. 차 우리는 시간에 사실 정답은 없어요. 그저 티백은 산차보다 잘게 분쇄되었으니 짧게 우린다는 사실만 기억하시면 돼요. 차 종류마다 우리는 시간이 다 달라 딱히 얼마 동안 우리라는 말씀은 못 드려요. 서너 번만 우려보면 자기 취향에 맞는 농도를 알게 돼요. 저는 티백 홍차는 대개 5분 정도 우려요. 영국 물은 경수hard water이므로 연수인 한국 물에서는 더 빨리 잘 우러난다는 말이 있어요. 연수라 해도 몸에 좋은 성분까지 얻으려면 최소 3분은 우려줘야 해요. 3분 이하로 우리면 초기에 우러나는 카페인만 잔뜩 섭취하고 늦게 우러나기 시작하는 몸에 좋은 성분들은 놓치게 돼요. 우유 없이 마시는 얼 그레이 같은 향차들은 다 우린 티백을 건져내 쥐어짜지 말고 그냥 버려요. 아깝다고 꾹꾹 쥐어짜면 얘가 또 성질 내면서 쓴맛을 토해내요. 그냥 슬쩍 건져서 공중에서 몇 번 털고 과감히 버리세요. 밀크티용 티백은 반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꾹꾹짜서 '엑기스'를 챙기세요. 우유와 설탕을 탈 것이므로 진할수록 좋아요.
참, 한국에서는 종종 얼 그레이를 설명할 때 영국의 '얼 그레이Earl Grey' 백작이 의뢰해서 탄생한 블렌딩이라고 소개하는데, 얼 그레이 백작이 아니라 그냥 '그레이 백작'이라고 하는 게 맞아요. 영국에서는 백작을 '카운트Count'가 아니라 '얼Earl'이라고 해요. 얼 그레이 백작이라니, 마치 '라인선상위', '역전앞' 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저같이 티백받침teabag tidy 모으는 사람들은 가끔 자기가 모은 거 자랑하려고 테이블에 손님 수대로 티백받침을 올려 놓는다고 해요. "자, 여기에 건져 놓으세요." 하며 흐뭇해한다는데, 영국인들은 손님 앞에 음식 찌꺼기를 보이는 건 호러블하다고 생각해요. 티백은 미리 부엌에서 건진 후 손님 상에 내는 게 보기 좋아요. 그래도 만일 티백받침 자랑하는 주인을 보게 되면 속으로 비웃으면서 "아이구머니, 이렇게 예쁜 걸 다 모으셨어요!" 감탄사를 연발하는 센스를 보여주도록 해요. 티백을 건질 때 영국인들은 '티백 스퀴저'라는 구멍 숭숭 난 작은 집게를 따로 사서 집에 두는데, 이런 게 없는 집은 그냥 젓가락으로 건져도 돼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영국식 진한 밀크티용 티백이 아닌 이상 티백을 스퀴즈squeeze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쓴맛만 잔뜩 쏟아지거든요.
7. 저는 촌스러워서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 잘 못 해요. 커피도 꼭 우유 듬뿍 넣은 라떼를 먹어요. 보나마나 많은 분들이 저처럼 수많은 홍차의 종류와 이름 때문에 헷갈려하실 게 분명한데 막상 영국 살면서 이렇게저렇게 겪어보니 별것 없드라구요. 홍차 종류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아침용으로 나온 차 <모닝>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아이리쉬 브렉퍼스트> <스코티쉬 브렉퍼스트> 등 이름에 벌써 '아침'이라는 뜻이 들어있는 차들은 잠깨우기용이라서 맛이 강하니 우유를 좀 넣어주세요. <아쌈>이란 차는 오묘해서, 진하다고 느끼는 사람과 그냥 마셔도 좋을 섬세한 차라고 생각하는 사람, 두 그룹으로 나뉘어요. 잘게 가공된 아쌈은 진하게 우려 우유를 넣어 마시고 온전한 잎의 고급 아쌈은 그냥 마셔요. 종이 티백에 담긴 아쌈은 십중팔구 잘게 가공된 것일 테니 진하게 우려 우유나 설탕, 혹은 둘 다를 넣으세요.
우유를 넣게 되면 떫은 맛을 가릴 수 있지만 차가 좀 식어요. 저같이 뜨거운 거 잘 못 먹는 사람한테는 마시기 알맞게 식어서 좋은데, 홍차가 뜨거우니 왠지 우유도 데워야 할 것 같다며 우유를 데워서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우유를 데워보면 아시겠지만 잘못하면 표면에 유막이 형성되잖아요. 그걸 건져 버리게 되면 고소한 맛이 사라져 풍미가 떨어져요. 그냥 두자니 지저분하고요. 그러니 데우지 말고 그저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 덜어서 찬 기운만 좀 가셔주면 돼요. 편하자고 티백 쓰는 건데 언제 우유 데우고 자시고 해요. 우유는 확실히 저온살균 우유가 맛있더라구요. 생우유 맛과 차 식을 게 염려되면 아주 조금만 넣으세요. 영국인들은 넣는둥 마는둥 해요. 그래서 차깡통 설명에서 'a little touch of milk'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어요. 풍부한 우유맛을 즐기고 싶으면 아예 냄비 밀크티를 끓여 드시면 되겠어요. 그건 다음 기회에 소개할게요.
오후용 차 <아프터눈> <얼 그레이> <다질링><실론> <기문> 같은 차는 짧게 3분만 우려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냥 마셔요. 우리 집 영감이 좋아하는 스모키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랍상 수숑> 같은 차는 우유 넣어 먹어도 좋고,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향을 온전히 즐기는 것도 좋아요. <실론>의 경우는 기분에 따라 레몬 슬라이스로 향을 살리셔도 좋구요. 홍차에 우유를 넣는 건 영국식이고 레몬을 넣는 건 러시아식이라네요? 오, 저도 그건 몰랐어요. 러시아도 차 소비를 많이 하는 나라라고 해요. 보드카 마시고 홍차 마시고. 좌우지간 로스께들, 마시는 일엔 도가 텃겠어요. ☞ 영국의 차 협회에서는 하루 네 잔을 홍차 권장량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저흰 하루 두어 번 마셔요. 앗, 레몬 얘기하다 말았습니다. 레몬은 최대한 얇게 썰어서 찻잔에 넣었다 빼는 정도로만 향을 내면 돼요. 것도 모르고 우리 집 다쓰베이더, 마누라 신것 좋아한다고 1cm에 가깝게 썬 레몬을 주먹 꽉 쥐며 으깨 넣고 있었어요. 그날 이후 차는 제가 준비해요.
과일향이 나는 홍차들이 있어요. 찻잎 사이에 과일 쪼가리나 꽃잎이 간간이 섞여 있는 걸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과일향 차들은 설탕을 좀 넣어주면 향이 더 산다고 해요.
영국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국인들이 차 마실 때 설탕 넣는 걸 여러 번 보았어요. 우리 날씬이 한국인들은 차에 설탕 따위 잘 안 넣겠지만 영국에는 설탕 넣어 마시는 사람이 많아요. 요즘은 설탕의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그냥 흰설탕이나 흰 각설탕이 잡맛 없이 풍미를 살리는 데 좋다고 해요.
다음 번엔 산차 우리는 아이돈 노하우를 소개할게요.
김 펄펄 나는 뜨거운 홍차로 이 추운 겨울, 몸과 마음을 다같이 훈훈히 데워보아요.
4줄 요약
1. 물 팔팔 끓여 찻잔을 먼저 데운다.
2. 버린 뒤 차 우리기용 물을 새로 붓고 티백을 찻잔 가장자리에서 살살 밀어 넣는다.
3. 받침으로 찻잔을 덮고 취향껏 우린다. 우리는 시간은 물의 성질과 차 종류에 따라 다르다. 차 포장에 써 있는 권장 시간을 지키면 좋다.
4. 강한 차에는 우유를, 온화한 차는 그냥, 과일향 차에는 설탕 등을 첨가하면 맛이 한층 산다고 하나 취향껏 즐기는 게 중요하다.
어라?
요약해 놓고 보니 별것 없네요? (멋쩍)
▲ <Tea Time> Arthur John Elsley (1860-1952).
영국 화가는 그림을 그려도 이런 걸 그리는군요.
자기 딸을 그린 거라 그런지 아이의 표정이 정말 사랑스럽죠.
홍찻잔이 커피잔과 어떻게 다른지 눈여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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