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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선물하기 노하우

단 단 2009. 12. 6. 13:44

 

 

 선물의 달인으로부터 받은
유머와 섬세함이 담긴 선물꾸러미.



얼마 전 북극 지방에 살고 계신 불량소녀 님께 홍차 몇 종류를 보내 드린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치고는 좀 일찍 보내게 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은 워낙 추워 끽해야 하루 두 잔 정도밖에 즐길 수 없는 커피로 긴 하루를 나기에는 무리가 있지 싶어서였다. 그보다는 카페인이 적은 홍차가 좋은 벗이 돼 주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보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데다 4월까지 무려 6개월 동안이나 추위가 지속된다 하니 얼른얼른 보내 드리자. 구호물자는 빠른 전달이 생명이라 하지 않느냐.  

그리하여 나도 홍차에 취미를 붙이고 나서 처음으로 '분양'이란 걸 다 해보게 되었다. 집에 가지고 있던 홍차 몇 종(트와이닝스 레이디 그레이, 랍상수숑, 요크셔 골드, 해로즈 카슬턴 머스카텔 다질링, 포트넘 크리스마스 티)을 덜어 솜씨는 없지만 나름 정성껏 포장하고, <티 팔레스>에서 새로 산 두 종(노팅 힐, 라벤더 그레이)은 틴째로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나서는 뿌듯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속으로 이렇게 외쳤더랬다.

보라! 
정말 눈이 팽팽 돌 만큼 다채롭지 않은가. 
이걸 받은 불량소녀 님, 아마 한순간 불량스러운 마음 멀리 날려 보내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실 것이다.



*  *  *


 

불량소녀 님이 소포를 받을 때쯤 해서 나도 불량소녀 님으로부터 소포를 하나 받았다. 영국의 우체부들은 부지런도 하지, 출근 시간 전인 아침 7시에 소포를 배달한다. (아침 일찍 눈 비비며 받는 소포의 맛이란.) 포장을 살살 뜯자 눈 앞에 폽업북처럼 펼쳐지는 알록달록 색깔들. 아니, 무얼 이리도 많이 보내셨누. 하나씩 둘씩 상자밖으로 끄집어 내는데, 처음엔 신나다가 이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뜨거워진다. 기껏 홍차 몇 종 보낸 걸 '다채'롭다고 의기양양해하던 꼴이라니. 나를 부끄럽게 만든 불량소녀 님의 종합선물세트 목록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채'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캐나다 특산물인 아이스와인 홍차 (이걸 사러 미시간 호를 건너 갔다왔단 말인가.)

 뜨거운 물 붓고 기다리면 유리 티폿 안에서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며 펴지는 꽃차

가장 훌륭한 티푸드인 낱개 포장된 쵸콜렛

쵸콜렛 담기 좋은 손바닥만한 트리 모양 접시

티타임을 빛내 줄 (그야말로 '빛내 줄') 틴에 든 크리스마스 고급 양초

티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차 마시면서 감상하면 좋을 작은 수채화 액자 두 점

 캐주얼하게 차를 즐길 경우 티 매트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원숭이 그림 마우스패드
  (→ 이 그림 왜 이렇게 웃겨 ㅋㅋㅋㅋㅋㅋ)

 티타임 중인 종이인형들 (맙소사, 종이인형이다, 어릴 적 갖고 놀던 그 종이인형!)

티타임 끝나고 다구 설거지 한 후 꼭 발라 줘야 하는 핸드로션      


자, 이런 게 바로 선물이라는 것이다. 받는 이의 기호나 취미를 고려하고, 다소 엉뚱한 구석도 있어 동심을 자극할 수 있으며, 제각각인 듯하면서도 물건들의 용도가 한 가지 목적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하나씩 하나씩 사용할 때의 시간 흐름까지도 세심하게 계획되고 안배된 것.

 

감동적인 것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 담아 보내 드렸던 상자를 일년 동안 잘 갖고 계셨다가 그곳에 도로 담아 보내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선물상자는 대서양을 몇 번이나 건넌 것인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

저 꽃차 때문에 근사한 유리 티폿을 따로 하나 장만해야 한다는 것. 이 사실은 우리 여자들에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남편 눈치 안 보고 떳떳하게 무언가를 사러 밖에 나갈 수 있다는 뜻이므로. 말하자면, '경험의 확대'인 동시에 '엔돌핀 지속효과'라고나 할까. 

허허, 진정 선물의 달인이로고. 이런 꿈의 선물상자는 연륜보다는 타고난 감각의 산물일 것이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 몇 살 더 먹는다고 절대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대체 얼마만에 느껴 보는 동심인지. 정말이지 교우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 그간 차 블로그 운영한다고 깝죽댔는데, 가만 보니 커피 애호가인 불량소녀 님이 홍차도 나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신 것 같다. 저 '아이스와인 홍차'라는 건 들어보지도 못 했던 건데. 

참, 종이인형 오릴 공작가위 하나 사러 얼른 나갔다 와야겠구나. 아니다, 먼저 쵸콜렛 몇 개 좀 집어먹은 뒤 나가자. 난 왜 이렇게 선물이 좋은지 모르겠다. 공무원 됐으면 만날 떡타령, 뇌물타령이나 하고 앉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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