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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야기

냉장고 불만

단 단 2010. 3. 29. 01:12

 

 

 

 

 

한국의 빌라 같은 형태의 집을 영국에서는 '플랏Flat'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집들이 대개 복층 구조이다보니 한 층에 모든 기능을 다 우겨 넣은 이런 마당도 없는 불쌍한 집들은 이들 눈에 '평평'하고 '밋밋'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탬즈 강이나 바다를 면하고 있는 몇몇 풍광 좋은 곳의 고급 플랏들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서민형 집이다. 평평하면서 층까지 높은 한국식 고층 아파트는 이곳에서는 주로 국가가 주는 생활보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극빈층이나 망명 신청 후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외국인들의 임시 거처 등으로 쓰인다. 층이 높고 가구 수가 많을수록 흉물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형편은 어렵지 않지만 이층 침실을 오르내릴 기운이 없는 노인들도 어쩔 수 없이 플랏을 선호한다. 이런 분들은 주로 플랏 1층에 살면서 공동 잔디밭이나 꽃밭을 자기 집 마당인 양 알차게 가꾸며 보살피는데, 햇빛이 좋은 날은 헐벗고 나타나 앞뒤로 양념 발라basting 뒤집어가며 자기 몸을 정성껏 굽기도 한다. 이런 날은 일년 중 며칠 안 된다.

 

주부인 나로서는 플랏살이의 가장 큰 애환을 냉장고가 작다는 데서 찾곤 한다. 한 시간 이상 운전을 해야만 겨우 장을 볼 수 있다는 저 광활한 미국, 무덥고 습한 장마철 때문에 실온 보관할 수 있는 식재료가 거의 없다는 우리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대형 냉장고들을 선호한다. 한국에서 코딱지만 한 집에 살면서도 양문형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까지 썼다는 단단은 영국 와서 유치원생 소꿉놀이용 냉장고를 어른이 쓰고 있다는 데에 매우 놀랐다. 영국인들이 선호하는 냉장고는 작고 깜찍하나 값은 오라지게도 비싼 'SMEG'. 현재 우리 집 냉장고는 내 허리에도 못 닿는 싸구려 초소형.

 

 

 

 

 

 

 

 

 빨간색 SMEG 냉장고. 영국인들, 왜 이리 빨간색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
디자인은 50년대풍 레트로, 색은 파격적인 원색. 예쁘긴 하다.

 



일단 집이 작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여염집에 큰 냉장고를 들여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플랏은 더 좁기 때문에 한국의 저 대학가 원룸에나 있을 법한 미니 냉장고로 들여놓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처럼 세 사는 이들은 집주인이 정한 냉장고를 작다고 함부로 바꿀 수도 없는데, 설령 들여놓는다 해도 그럴 만한 공간도 없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영국인들은 체질적으로 덩치 큰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네 집 좁은 것과 길 좁은 것은 흉이 안 된다 생각하는지 밤낮 덩치 큰 것들은 '아메리칸스러운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툴툴대곤 한다: 메가 처치, 메가 쇼핑몰, 럭셔리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덩치만 큰 대형 승용차 등등.

 

그런데, 영국에서는 어느 지역에 살건 적당한 거리에 수퍼마켓이나 식료품점이 꼭 있어 한 번에 왕창 사다가 쟁여 놓을 이유도 없다고 한다. 그런 건 전쟁 때나 하는 짓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다행히 일년 중 무더운 날이 거의 없고 선선하니 상온 보관할 수 있는 식품들이 한국에 비해 많기는 하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영국 날씨가 한국 날씨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 냉장고의 크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도록 하자. 키 작은 단단의 엉덩이 겨우 닿는 높이의 냉장고. 상상이 가는가. 하루 세 끼와 두 번의 간식을 집에서 모두 해결하고 있는 집의 냉장고가 이렇다. 위로 좀 해 달라.

 

이렇게 냉동고조차 없는 작은 냉장고를 쓰다보니 저장이란 건 애초에 불가능. 거의 매일 신선식품을 사러 수퍼마켓을 가야만 하는데 이게 또 만만치가 않다. 상미기한 내에 다 못 먹을 것 같으면 얼려 두기라도 할 텐데 냉동고가 없으니 얼리는 일도 당최 불가. 남은 음식 생기지 않도록 주의 깊게 식단을 짜는 일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머리 맞대고 '오늘은 또 어떤 자투리 식재료부터 해치워야 하나' 궁리하는 일이다. 식구가 적으니 아무리 작은 포장을 사도 한 번에 다 못 먹고 반드시 남기게 되는데, 둘이서 반식 다이어트까지 하고 있으니 오이 하나, 양배추 한 통 다 먹어치우는 데에도 천문학적인 시간이 걸린다. 혼자 사는 이들은 훌쩍 밖에 나가 사 먹고 들어오면 그만이지만 둘이서 외식을 매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렴한 값에 외식을 하려면 성분을 알 수 없는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이건 또 선뜻 내키지가 않는 것이다. 하여간 영국에 온 이후 작은 냉장고 때문에 인생이 몹시 피곤해졌다. 차도 없으니 허구한 날 내리는 비를 뚫고 걸어서 장을 보러 간다. 바람이 잦은 영국에서는 비도 수직으로 내리지 않고 좌우로 오기 때문에 우산의 은총이고 뭐고 없이 쫄딱 다 맞으면서 장을 보고 돌아온다. 설상가상으로, 정수기로 아무리 걸러도 수돗물의 분필 맛이 가시질 않아 수시로 무거운 생수까지 사다 날라야 하는데 이것도 아주 중노동이다. 그럼 사 먹는 생수 맛은 좀 낫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분필 맛이 나는 데다 다쓰베이더는 플라스틱 맛까지 나서 싫다 까탈을 부리지만 유리병 생수를 사 마실 형편은 못 되니 그냥 그거라도 감사히 마신다.

 

그건 그렇고, 좁아터진 우리 집 냉장고에는 지금 무엇이 들어있을까? 대부분 개봉해서 찔끔 쓰고 남은 소스들과 각종 렐리쉬들이다. 신선식품은 모셔 둘 공간이 없어 필요할 때마다 사서 쓴다.

 

냉장고 안에 현재 들어있는 것들:
무염버터, 땅콩버터, 밤 페이스트, 레몬 커드, 다쓰베이더가 만든 기절 맛있는 초고추장, 집에서 만든 페스토와 밖에서 사온 페스토(용도가 다르다), 팟타이 소스, 타마린 소스, 굴 소스, 마요네즈, 호스래디쉬, 타르타르 소스, 타퍼나드, 케첩, 디종 머스타드, 홀그레인 머스타드, 잉글리쉬 머스타드, 딜 머스타드, 타이 커리 소스와 인도 커리 소스, 토마토 소스, 안초비, 올리브 2종, 케이퍼, 오이 피클, 비트루트 피클, 발사믹 식초 넣고 캐러멜화한 붉은 양파, 양파 처트니, 탈리 만들 때 곁들이는 라임 칠리 처트니, 마늘 퓨레, 생강 퓨레, 우유, 요거트 2종, 저지 크림, 잼 3종, 치즈 5종, 레몬, 라임, 파프리카, 고추, 생강, 파.

 

이 집은 소스와 양념만 먹고 사는 모양이다.

 

 


*   *   *

 

 

 


넋두리는 그만하고 이제 오늘의 머핀 이야기를 해 보자.

 

오늘의 머핀 재료:
밀가루, BP, 소금, 설탕, 우유, 버터, 달걀, 루바브rhubarb 잘게 다진 것, 데메라라 슈가, 계핏가루.

 

 

러시아에서 유럽 전역으로 전해졌다는 채소 '루바브'는 현재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용 식재료 중 하나로 꼽힌다. 이제는 딸기와 함께 영국 디저트의 상징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데, 첫 사진에서 머핀 뒤에 가로질러 놓인 빨간색 줄기가 바로 루바브. 씻기 편하고 썰기 편하고 쓰기 편하고 새콤해 맛까지 좋은데다 빛깔도 곱고 지금처럼 과일이 절대 부족한 황량한 이른 봄이 제철이다보니 야채 코너에 루바브가 등장하면 주부들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한다. 머핀을 만들어 맛을 보니 과연 최고의 디저트용 채소라 칭송 받을 만한 것 같다. 영국인들은 이 루바브로 만든 디저트를 먹을 때 반드시 커스타드나 클로티드 크림, 더블 크림 같은 진한 크림을 곁들이거나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는다. 오늘만은 나도 살 걱정 떨쳐버리고 'Extra Thick Double Jersey Cream'을 얹어 먹는다. 아아, 뽀얗고 화사한 실크 같은 크림. 맛있는 것들은 왜 죄다 사악한 것인가.

 


☞ 루바브 이야기 더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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