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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

[아프터눈 티] 런던 브라운스 호텔 Browns Hotel, London

단 단 2009. 12. 9. 18:47

 

 

 

 

 

런던 브라운스 호텔 -  
 

 170여년 전에 세워진 런던 최초의 호텔
 발명가 그레이엄 벨이 영국에서 최초로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는 곳
아가사 크리스티가 추리소설 <버트람 호텔에서 At Bertram Hotel>를 쓰는 동안 머물면서 아프터눈 티를 즐기며 소설의 모델로 삼았다는 곳
 영국차협회The Tea Guild, UK Tea Council가 뽑은 2009년 런던 최고의 아프터눈 티룸


 

영국 출장을 오신 명문대 화학과 출신 오르가니스트 대기업 과장님 (응?) 덕에 다쓰 부처는 오늘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에 자리잡은 유서 깊은 브라운스 호텔 아프터눈 티룸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올해 런던 최고의 아프터눈 티룸이라니 몹시 궁금했지요.

 

 

 

 

 

 

 


제가 앉은 쪽에서 바라본 실내 사진입니다. 제 뒤로도 공간이 더 있습니다. 타이와 자켓 차림이 아니면 입장도 안 시키겠다는 오만방자한 리츠 호텔에 비하면 브라운스 호텔은 잘 꾸민 아늑한 가정집 같아요. 다쓰 부처는 변변찮은 살림 탓에 둘 다 청바지에 지극히 평범한 상의를 걸치고 갔는데, 아래위로 옷차림을 훑어보고 눈썹 찌푸리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장을 입고 오면 오히려 어색할 듯한 분위기이고, 다른 테이블에 앉은 영국인들 역시 평소에 입는 옷들 중 좀 더 아끼는 옷으로 골라 입고 온 듯 보였습니다. 제 뒤로도 테이블이 많았고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 차를 즐기는 내내 피아니스트의 생음악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이곳 호텔들도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프터눈 티룸을 영악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같은 일요일은 13:00-14:30 13:30-15:00 4:00-15:30   14:30-16:00   15:00-16:30   15:30-17:00. 이렇게 수 차례 테이블을 회전시키므로 마냥 죽치고 앉아 느긋하게 아프터눈 티를 즐기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 점이 좀 아쉽긴 합니다. 우리도 한 시간 반만에 자리에서 일어서야만 했거든요. 희한하게도 아프터눈 티룸들만은 이런 불경기에도 불황을 모른다고 합니다. 스타벅스나 코스타, 일리 같은 외국계 커피 전문점들이 우후죽순 들어선 이후로 영국인들이 오히려 아프터눈 티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분석이 재미있습니다. 하여간 유적이든 환경이든 전통이든 뭐든 간에, 위기에 처한 무언가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는 영국 따라갈 나라가 없어 보입니다.

 

 

 

 

 

 

 

 

앞접시 세 개, 일인용 찻주전자 세 개, 뜨거운 물 따로 담은 주전자, 밀크 저그, 설탕기 만으로도 상이 벌써 꽉 찹니다. 차를 무려 17가지나 구비해 놓고 있다는 것이 호텔측의 자랑입니다. 각각 동방미인, 브라운스 호텔 고유 아프터눈 블렌드, 코니쉬 티Cornish tea를 주문해보았습니다. 코니쉬 티는 영국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잡은 콘월Cornwall 지방에서 재배하는 홍차입니다. 콘월은 클로티드 크림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죠. 영국 땅에서 차가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데, 사실 재배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극소량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코니쉬 티야말로 진정한 잉글리쉬 티가 아닐까 싶습니다. 호기심이 일어 시켜 본 차였는데 맛이 아주 순하고 좋았습니다. 생산량이 매우 적어 다질링을 좀 섞어주는 모양입니다. 순하면서 기분 좋은 다질링향이 납니다. 하긴, 코니쉬 티만 단독으로 마셔 본 적이 없으니 그 자체가 다질링과 비슷한 맛이 날 수도 있는 일이죠.

현명한 오늘의 물주께서는 주문 받는 직원의 숙련도와 친절함을 시험하고 맛있는 차도 고를 겸 "What would you recommend for me?"라고 물어 브라운스 호텔 아프터눈 블렌드를 주문하셨고, 다쓰베이더는 우롱차를 특별히 좋아하니 동방미인oriental beauty을 주문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가급적이면 집에서 늘 마시던 차말고 자주 접하기 어려운 비싼 차나 귀한 차, 티룸 고유 블렌드로 시켜 마시는 것도 좋은 생각이죠. 

우리가 시킨 차는 다 맛과 향이 좋았으니 일단 차맛은 합격입니다. 일인용치고는 찻주전자 용량이 넉넉해 리필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호텔들이 두꺼운 은제 찻주전자를 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것이, 워머warmer가 없는데도 희한하게 차를 즐기는 한 시간 반 내내 좀처럼 차가 식을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방치된 찻잎이 계속 우러나 점점 써지는 것도 아니니 참 신기한 일이죠. 마시는 내내 궁금했습니다.

은제 찻주전자는 부딪거나 떨어뜨려 깨뜨릴 일도 없으니 도자기보다 오히려 실용적일지 모르겠습니다. 계절 따라 분위기 따라 찻잔과 앞접시를 바꿔주더라도 어떠한 문양이나 색상에도 무난하게 어울리면서 고급스럽고 화려한 맛까지 있으니 여러모로 홍차 애호가들이 갖출 만한 품목이라 생각했습니다. 금속 찻주전자에 우린 차 맛은 그리 훌륭하진 않다고 평들을 하지만요. 때로는 '뽀대'가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차가 제공되고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그 유명한 3단 접시 님이 도착했습니다. '아니? 사람은 셋인데 겨우 이만큼만 주는 것인가? 피 터지게 싸우게 생겼군.' 걱정했더니, 역시나 "얼마든지 더 드립니다, 말씀만 하세요." 합니다. 오늘 다쓰베이더는 자기 몫을 아주 훌륭히 해냈습니다. 스콘 단만 빼고는 접시에 놓인 것들을 혼자서 다 먹었습니다. 과연 위대한 영감.

 

 

 

 

 

 

 



샌드위치 먼저 먹습니다. 보기에는 수수하게 보여도 촉촉하고 담백하니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다쓰베이더와 단단은 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우리 둘 몫으로는 햄 샌드위치나 치킨 샌드위치 대신 다른 걸 더 달라고 했더니 샌드위치 종류가 여느 티룸보다 더 많아졌네요. 기본인 훈제 연어, 삶은 달걀, 햄, 오이 샌드위치말고도 체다, 양파 처트니, 아보카도, 노란 물 들인 피클을 넣은 샌드위치들이 더 나왔습니다. 샌드위치만 7종이 되었습니다. 다쓰베이더가 한 접시를 혼자 다 먹었으므로 한 접시 더 달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덜 먹어야 잘 산다는데, 옛날 사람인 우리는 아직도 많이 먹는 게 미덕인 줄 알아요.

 

 

 

 

 

 

 



작고 따끈따끈한 과일 스콘과 플레인 스콘. 식지 말라고 뚜껑 대신 냅킨 끝을 접어 스콘 위에 살짝 덮어 놓은 센스가 일품입니다. 그 품이 꼭 어미 닭이 날개 밑에 병아리 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차를 즐기는 내내 세상의 모든 어미와 새끼 생각이 나 마음이 훈훈.

 

 

 

 

 

 

 



스콘도 한 접시 더 주문했습니다. 스콘에 반드시 따라 붙는 클로티드 크림과 과일잼(주로 딸기잼)도 어김없이 나왔네요. 클로티드 크림을 담을 때는 골든 크러스트가 포함되도록 담는다는 불문율 역시 지켜졌고요. 자세히 보니 크림을 두루마리 마냥 돌돌 말아 놓았습니다. 허허, 기술도 좋아요.

 

 

 

 

 

 

 



다쓰베이더가 역시 혼자 다 먹어치웠다는 알록달록 단것들. 영감, 단거 너무 많이 먹으면 단거danger 하다오. 영국인들은 체질적으로 과자나 빵에 글레이즈로 광내거나 요란하게 장식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style over substance'. 그래서 과대포장이란 것도 일절 없지요. 고로, 이런 데서 퐌타스틱한 컬러와 요란하게 장식한 단것들이 나오리라 생각하면 실망할 확률이 높아요. 영국인들의 오랜 전통인 '실용주의'가 디저트에서는 '못생겨도 맛은 좋아' 식으로 구현되나 봅니다.

단것들도 역시 한 접시 더 주문했으니 결국 3단 접시를 그대로 한 번 더 시킨 셈이었습니다. 직원들이 군말 않고 열심히 갖다줍니다. 내 꼭 팁 챙겨주리라 마음 먹었지요. 너무 달지 않고 맛 좋은 마카롱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 쵸콜렛 마카롱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유리잔에 든 푸딩도 맛있었으나 샌드위치를 끝낸 시점에서 이미 배가 너무 불렀으므로 아주 조금씩 떠서 맛만 보았습니다. 이런 단것들의 구성은 아마 매번 달라질 겁니다.

 

 

 

 

 

 

 



배불러서 힘들어 죽겠는데 손수레에 당근 케이크와 빅토리아 스폰지를 갖고 돌아다니며 테이블마다 또 나눠줍니다. 그만 줘 이제, 배불러 죽것어. 그래도 영국 전통 케이크인 빅토리아 샌드위치를 안 먹으면 나중에 후회할 테니 한 조각씩 맛보겠다고 했지요. 파운드 케이크 같은 알찬 질감인데 왜 스폰지라 이름 부를까, 셋 다 궁금해하면서도 어쨌든 맛있게 먹고 마무리했습니다. 이렇게 따로 손수레에 담아 제공하는 것들 역시 절기에 맞춰 그때그때 종류를 바꾸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부활절 즈음에는 영국의 부활절 전통 빵인 홋 크로스 번hot cross buns을 내기도 한답니다.

 

 

 

 

 

 

 



테이블에 앉아 계산을 마치니 우리를 시중 들던 아리따운 직원 아가씨가 뭘 또 줍니다. 으악 배불러, 제발 그만 줘.

 

"손님께서 맛있게 즐기셨던 차의 샘플이니 가져가세요."

 

단단에게는 코니쉬 티, 다쓰베이더에게는 동방미인, 가필드 님에게는 브라운스 호텔 아프터눈 블렌드.

각각 두 번 정도 우려 마실 수 있는 분량의 찻잎을 담아 가져가라며 줍니다. 다른 티룸에서는 받아 볼 수 없는 앙증맞은 선물입니다. 어느 손님이 무슨 차를 마셨는지 기억하고 있다가 한 사람씩 눈을 맞추고 차 이름을 다시 불러주며 하나씩 손에 쥐어 주니 직원들 훈련이 보통 잘 돼 있는 것이 아니네요. 안 그래도 마셨던 차들의 마른 잎 상태가 궁금했는데, 마침 잘 됐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집에 와 샘플로 받은 코니쉬 티를 우려보니 브라운스 호텔에서 마셨던 것과는 수색도 맛도 완전히 다릅니다. 티룸에서는 연한 탕색에 다질링 맛이 강하게 났는데, 집에서는 짙은 색에 아쌈 맛이 납니다. 물의 경도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계산하고 나오면서 보니 올해 최고의 런던 아프터눈 티룸 상을 받았다고 자랑스레 진열해 놓은 트로피와 인증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오르가니스트인 가과장님을 위해 다같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비바람이 이는 회색빛 하늘을 보시더니 가과장님, 옷깃을 여미며 "런던이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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