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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나는 □□□□였다

단 단 2011. 9. 4. 00:23

 

 

 

 

 

어릴 적 왼손으로 글을 쓰고 밥을 먹는다는 이유로 막내 오라버니가 학교 선생님들과 어른들로부터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는 걸 보고는 가슴이 금즉하였으나,

 

"뭐야, 바보같이. 인간이라면 으레 옳은 손, 바른 손을 써야지."


태연한 척 옳은 손으로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칫솔질 가위질을 해댔다. 자꾸 들먹거리는 왼손을 찰싹찰싹 때려가며 단단은 완벽한 옳은손잡이가 되어 갔다. 어린 나로서는 어른들의 그 무시무시한 탄압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으니 옳은손잡이가 되기로 한 건 내 인생에 있어 몇 안 되는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왼손잡이였던 내 막내 오라버니는 결국 눈물 겨운 노력 끝에 오른손잡이로 전향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오른손으로 하는 모든 것이 어설펐고 악필도 그런 악필이 없었다. 얼마나 글씨가 엉망진창이었는지, 그의 공책을 들여다본 친구들은 '이 자식, 혹시 바보 아냐?'
생각까지 다 할 정도였다고.


영악한 나는 내 막내 오라버니가 겪었던 것 같은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오른손을 단련시켜 지금까지 무사히 잘 살아 왔다. 본-내추럴 오른손잡이라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딱 하나 문제가 있기는 했다.
젓가락질.
그놈의 젓가락질이 안 되는 것이었다. 숟가락질 칼질 포크질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한국인이, 것도 다 큰 어른이 젓가락질을 못 한다는 건 한국에선 왼손잡이 못지 않은 범죄이지 않나.


지금은 다들 그러려니 하시지만 연애와 결혼 초기, 시가에서 밥 먹을 때마다 등에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나 혼자 늦게까지 꼼지락꼼지락 먹는 데다 젓가락질도 못 하고 있으니.


게다가 코쟁이들 나라에 가서 자랑스러운 한국인 행세를 하려면 정교한 젓가락질이 필수인데, 제길, 서양인과 바를 바 없는 이 엑스(X)자 젓가락질이 웬 말이냐. 자칭 미식가들의 경전과도 같은 저 <맛의 달인>에도 젓가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피소드가 다 있지 않았던가.

 

젓가락질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는 황우석 박사의 등장 이후 극에 달하게 되었다. 하필 이 양반 하는 소리가,


"대한민국이 이룬 줄기세포 신화는 바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젓가락 문화에 힘입은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연구원들도 할 수 없는 젓가락질로 단련된 우리의 정교한 손가락이 오늘 대한민국의 성공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면서 TV 화면은 연신 젓가락질로 얇은 콩껍질에서 콩알 쥐어짜 내보내듯 능숙하게 세포를 다루는 연구원의 손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거 안 되겠고나.
급기야 아이들용 에디슨 젓가락까지 다 사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
연습
연습
연습
.
.
.
털썩

 

공부 많이 하면 뭐 하나?
나란 인간, 결국 내 손 하나 내 마음대로 콘트롤 못하는 무기력한 인간임을 깨닫고 나니 세상의 모든 스포츠맨, 스포츠위민, 서커스단 단원들이 하느님과도 같아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젓가락질과 관련된 몇 번의 해프닝을 반복하다 결국 포기, 한동안 마음 편히 잘 살고 있었다. 지금껏 실패했는데 이 나이에 어떻게 또 젓가락질을 새로 배우겠나. 젓가락질 못 하고도 맛있는 거 잘만 먹고 잘만 살아 왔구만.


그러다가 얼마 전,
집 정리하는 와중에 부엌 서랍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잊고 있었던 에디슨 젓가락을 발견하고는 히스테리 폭발.
으악! 이제 나 좀 고만 괴롭혀!
에잇, 당장 갖다 버려야지.

 

가만.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해 보는 건 어떨까? 30년 넘는 세월 동안 잘못된 젓가락질로 나쁜 습관이 잔뜩 밴 오른손이니 순결한 왼손으로는 잘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나.


호기심 발동.
타트tart 껍질 구울 때 쓰는 세라믹 구슬을 잔뜩 꺼내 쏟아 놓고는 반나절 동안 앉아 집고 또 집고를 반복했다. 집었다 놓기만 하는 건 소용 없고, 입까지 가져왔다 도로 내려놔야 진짜 젓가락질 하는 것과 같으니 구슬에 입맞춤하고 내려놓는 걸로 연습 방향을 잡았다.


부들부들부들;;
으윽, 오른손보다는 좀 낫긴 하다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몇 시간 동안 쥐가 났다 풀어졌다를 반복. 젓가락이 지나가는 셋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 끝부분이 푹 패여 얼얼, 물집이 생기고 굳은 살이 다 배길 지경이었다.

 

"자꾸 연습하다 보면 감이 생길 거야. 그렇게 힘 꽉 주지 않아도 돼. 중지, 약지보다는 엄지손가락의 역할이 결정적이야. 엄지손가락에 집중하면 나머지 손가락에 힘이 좀 빠질 거야."


그렇구나.
다쓰베이더의 특별 레슨을 받아가며 이틀을 연습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나서는?
젓가락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이제는 힘 안 들이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 심드렁한 일이요, 단단에게는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젓가락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교한 젓가락질을 함으로써 억눌렸던 왼손잡이의 본능이 되살아났는지, 왼손 마우스질도, 왼손 칫솔질도, 왼손으로 머리 감는 것도, 그렇게 자연스럽고 편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결국 나도 내 막내 오라버니처럼 왼손잡이였던 것이다. 영국에 와서 공원 많고 새 많고 왼손잡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었나. 오늘 뉴스를 보니 오바마Obama도 왼손으로 글을 쓰고 있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왜 그토록 왼손잡이들을 탄압했던 걸까? 좌파라서?
흑, 내 잃어버린 30여 년 세월, 돌리도오~

 

왼손 젓가락질을 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젓가락질 연습하는 과정을 소개하자면, 초기에는 커피 원두나 마른 콩 같은 작고 단단한 것들을 집는 게 오히려 쉽고, 점차 익숙해지면 라면 같은 물렁물렁하고 형태가 고약한 것들을 연습을 하는 게 좋다. 내게는 라면 면발 집어 올리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젓가락은 미끌거리는 한국식 쇠젓가락 대신 각진 나무 젓가락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은데, 표면에 무늬나 점이 있으면 젓가락질이 잘 되는 각도와 지점을 파악할 수 있어 편하다. 젓가락 쥐는 감각을 충분히 익힌 뒤 쇠젓가락으로 옮겨 가면 된다.

 

글씨는 오른손으로 계속 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글은 항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구조이므로 오른손으로 쓰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단단은 본의 아니게 양손잡이로 변신하였다. 양쪽 뇌를 다 쓰게 되었으니 이제 머리가 좀 좋아지려나?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라 - 이제는 오른손으로도 젓가락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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