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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실버 티 세트 - 나도 하나 갖고 싶네 본문
삼년이면 서당 개도 풍월을 읊고
성인聖人집 하녀는 라틴 구절을 인용하며 A saint's maid quotes Latin
영국 유학생은 안티크antiques를 앞에 놓고 깝죽대는 법입니다.
안티크 중에서도 단단이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분야는 영국 실버입니다. 실버 중에서도 다구와 플랏웨어flatware가 주 대상입니다. TV 보다가 실버 티포트가 나오기라도 하면 차 블로그 주인장인 단단, 밥 먹던 숟가락도 내려놓고 열심히 보곤 한다지요. 얼마 전 골동품 프로그램에서 본 실버 티 세트는 정말이지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아름다워 소개해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어떻습니까? 형태는 단순·우아하면서 세부 장식은 지나치게 과하지 않고 균형이 잘 잡혀 있지요? 왼쪽부터 설탕기, 찻주전자, 우유기milk jug입니다. 이렇게 세 개가 모여야 제대로 된 '티 서비스Tea Service'라 부를 수 있는데, 간혹 커피 포트가 더 추가되어 언제든 커피 세트로도 변신 가능토록 하기도 합니다. 커피 포트 대신 짙게 우려진 차를 희석하기 위한 물주전자water jug가 추가되기도 하고요. 영국인들은 찻주전자, 설탕기, 우유기, 이렇게 세 개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차 우리는 주전자를 먼저 볼까요? 이 티세트는 순도 92.5%의 스털링 실버로 돼있습니다. 백 퍼센트에 가까운 99.9% 순은이면 더 좋을 것 같지만 너무 물러서 실용성이 좀 떨어진다고 하네요. 형태를 보십시오. 예리한 관찰자라면
"어? 이거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 & Mason> 티룸에서 내주는 도자기 티포트와 모양이 비슷하네?"
하실 겁니다. 요즘 생산하는 물건들 중에도 이런 옛 스타일을 한 것들이 많습니다. 형태 자체는 후기 조지안 스타일인데 단순하면서 우아한 맛이 있지요.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neoclassical의 산물입니다. 참고로, 우리 홍차인들의 성지와도 같은 저 <포트넘 앤 메이슨> 백화점은 스튜어트 시대 마지막 군주인 앤 여왕 시절에 사업을 시작해(1707년) 조지안 시대 들어와 흥했습니다. 그래서 홍차 제품군 중 'Queen Anne Blend'가 따로 있고 아프터눈 티 서비스를 조지안 스타일 다구에 내는 겁니다.
저는 저 실버 제품에서 감도는 은은한 노란 빛이 정말 좋습니다. 구리가 소량 첨가되었기 때문일까요? 퓨터나 스테인레스 스틸이 줄 수 없는 실버만의 색택과 감촉이 있지요. 테두리에 작은 구슬을 줄지어 박아놓은 듯한 기법의 장식을 은 세공장이들은 '가드루닝Gadrooning'이라 부릅니다. 표면의 동그란 구슬들은 문자 그대로 '비딩beading'이라 하고요. 뒷면에서 한알한알씩 도드라지도록 도구로 때려가며 수작업을 해야 하는 거예요.
비딩 사이의 정교한 꽃들도 눈여겨보십시오. 이걸 갖고 있던 영국인 아주머니가 실버에 대한 지식이나 애착이 별로 없었는지 제대로 닦고 관리하질 못 했네요. 하긴, 전문가한테 팔아달라 부탁하러 나온 걸 보면요.
여러 형태의 조지안 티포트 중 이 드럼 형태로 된 것은 부리spout 부분이 곧게 뻗는 게 특징입니다.
온갖 금속 중 열 전도율이 가장 높은 게 이 실버이지요. 손잡이가 순식간에 뜨거워지니 반드시 몸통과 손잡이 사이에 열을 차단할 수 있는 물질을 삽입해야 합니다. 한국 주부님들의 '위시 리스트' 상위에 올라있다는 저 프랑스 구리냄비들의 열 전도율은 실버 다음으로 높아 2위를 차지합니다. 낮은 온도에서도 효율적이고 조리 시간도 많이 단축돼 환경에 다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 티포트의 손잡이에는 상아가 삽입돼있는데, 이런 건 옛날 제품에서나 볼 수 있는 거예요. 오늘날엔 야생동물 보호 일환으로 상아 제품의 매매를 국제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거든요. 손잡이 전체를 흑단 같은 단단한 나무나 플라스틱 전신과도 같은 '베이컬라이트Bakelite' 재질로 한 것들도 많이 있지요.
티포트 안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것으로 보아 소장하셨던 분이 아마도 벌벌 떨면서 감상만 하신 모양입니다. 고가의 실버 제품을 사놓고 모셔두기만 하는 이런 불상사가 안 생기게 하려면 솔리드 실버 대신 만만한 값의 실버 플레이트 제품을 쓰는 것도 좋습니다. 은도금이라 김이 샌다는 분 계신데, 영국은 금속 공예 기술이 좋아 플레이트 제품들 중에도 공예와 품질이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솔리드 실버 제품보다는 저렴하다 해도 이 역시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포트넘 & 메이슨>에 가서 실버 플레이트 다구들의 가격을 한번 보십시오. 디자인과 공예가 그저 그런데도 새 제품이랍시고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래도 안티크나 빈티지 중에서는 단단 같은 서민들도 충분히 소장할 만한 착한 가격표를 달고 있으니 뜻 있는 분들은 차라리 새 제품보다 이쪽으로 알아보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우유기milk jug.
참, 좀전의 사진에서 확인하셨나요?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해 일일이 때려 넣은 구슬들 말입니다. 이걸 주문했던 귀족이나 왕족, 또는 부자 나으리께서 저 은 세공장이한테 수고에 걸맞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으리라 굳게 믿고 싶네요.
우유기 윗부분.
아랫부분.
설탕기.
설탕기는 대개 손잡이가 양쪽으로 달려있는데, 손잡이 한쪽에 설탕집게를 걸어두기도 합니다.
홀마크들Hallmarks.
제품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가 담겨있는 표식들입니다. 서양 선진국들은 대개 '시스템'이 잘 돼있다고들 하지요.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나라가 돌아가는 게 희한한데, 바로 잘 갖춰진 시스템 때문입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예약이 필수죠. 예약 문화가 발달하면 업무량 예측을 할 수 있어 낭비가 없고 시비가 없습니다. 고가의 은 제품에 이런 국가 공인 표시들이 엄격하게 되어 있으면 비싼 돈 지불해 사놓고도 '혹시 가짜를 바가지 쓰고 산 건 아닐까?' 의구심에 밤잠 못 이루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지요. 소비자를 위한 이런 홀마크 제도를 무려 1300년부터 시행했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왼쪽 것은 순도 92.5%의 스털링 실버라는 표시고, 오른쪽 것은 '런던 애세이 오피스assay office, 국가 시금·인증 기관'의 테스트를 거친 제품이라는 표시입니다. 간혹 한국의 안티크나 빈티지 장사하시는 분들 중 상품 설명에 이 마크의 해석을 "런던에서 만들었다"고 쓰시는 분이 있는데, 은 제품을 '런던에서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런던 애세이 오피스에서 인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다르죠. 런던 근교에서 작업하는 실버스미스silversmith가 버밍엄 애세이 오피스에서 인증을 받든 셰필드에서 받든 런던에서 받든 에딘버러에서 받든, 인증기관 선택은 전적으로 실버스미스에게 달린 겁니다. 물론 런던 근교에서 작업하는 실버스미스라면 가까운 런던 애세이 오피스에 완성품을 가져가 검사 받았을 확률이 크겠지만요.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죠. 더욱이, 애세이 오피스가 런던에 하나밖에 없던 시절에는 영국 각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모두 런던 마크를 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영국에서 생산되는 귀금속 제품에 이 홀마크들이 없으면 불법이고 매매가 금지된다는 사실입니다. 금 세공품 중 1g이 안 되는 것, 은 세공품 중 7.78g이 안 되는 것들은 너무 작아 홀마크 찍을 공간이 없으므로 제외가 됩니다.
1874년에 인증을 받았다는 알파벳 표시. 매년 알파벳이 바뀌고 글꼴이나 알파벳을 둘러싼 배경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용이한 구별을 위해 바꿔주게 돼있습니다. 옆 모습을 한 여성의 얼굴은 'Victoria Head Stamp'라 불리는 것으로, 빅토리아 재위기간 중 마지막 10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 표시가 항상 붙었습니다. 국가에 세금을 제대로 냈다는 'duty mark'입니다. 군주의 얼굴을 새기게 돼있었으니 이건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표시죠.
장인 이름이나 생산한 회사 이름도 새기게 돼있습니다. "RH"는 '로버트 헤넬Robert Hennell'을 뜻합니다. 연도 추정을 하면 헤넬씨 자손들 중에서도 로버트 헤넬 4세가 만든 걸로 나옵니다. 대대로 은 세공으로 유명한 집안이라죠. 더 자세한 건 전문가의 영역이니 그냥 주워듣고 공부한 대로만 읊어봅니다.
밑에 있는 눈 결정 모양 같은 표시는 뭔지 모르겠어요. 아마 주문한 이의 가문을 상징하는 표시이거나, 아니면 은 세공장이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표식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실버스미스가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 이니셜을 새겨준 것 같네요. 리본으로 두 글자가 묶여 있는 걸 보니 결혼을 기념하여 두 가문의 이니셜을 새긴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식견이 부족해 여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하여튼 주문자가 요구해서 새긴 이니셜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봐도 멋집니다. 돈 열심히 모아 저도 결혼 20주년 때는 솔리드 실버로 된 티 서비스를 장만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은 집에 있는 가재도구 다 내다 팔아도 못 삽니다. ^^;
전문가가 아주 신났습니다. 근래 감정했던 실버 티 서비스 중 이렇게 훌륭한 건 없었다며 흥분합니다. 단단이 그간 보았던 것들 중에도 단연 으뜸입니다. 저 옛날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더 먼 옛날인 조지안 시대 스타일을 재현해 만든 거라서 더욱 재밌지요. 빅토리안들의 취향이 좀 별난 데가 있어, 옛 스타일을 끈질기게 수용하면서도 자기들만의 요란한 장식을 가미하고 자연주의나 이국 취향 등 온갖 것을 다 얹어놓기 일쑤이므로 이 시절 공예품들이 좀 과하다는 느낌을 주기 마련입니다. 로코코 시절 같은 일관성 있는 과한 장식이 아니라 좀 잡다하다는 느낌을 주곤 하는데, 이 티포트는 형태가 주는 고전성과 너무 과하지 않은 정교한 장식의 조화가 훌륭합니다. 돈 있는 분들은 영국 실버 제품 많이많이 사시길 바랍니다. 과거 영국이 전세계를 누비며 좋다는 물건 죄 싹쓸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이제는 돈 좀 있는 우리 한국분들이 영국 안티크 실버 제품들을 한국으로 많이 빼돌리셔야 합니다. ㅋㅋ
아참, 가격은요...
감정가는 500-800 파운드였고 경매에서 실제 거래된 가격은 720 파운드였습니다. 영국 돈 1 파운드를 대략 한국 돈 2000원에 대입해 보세요. 여기에 경매 수수료와 세금 등이 추가로 붙게 됩니다. 런던의 한 약삭빠른 실버 전문업자가 낙찰 받아 말끔히 씻고 광 좀 더 낸 다음 자기 가게 진열대에 그럴듯하게 전시해 1480 파운드에 되팔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중산층이면서 이런 안티크 공예품 좋아하는 홍차 마니아라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까요? 한 번 사면 깨지지도 않으니 평생 씁니다. 투자할 만하죠. 단단은 경제력은 거의 생활보호 대상자 수준인데 마음은 굴뚝 같으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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