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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체스터 ① 크리스마스 마켓 본문
윈체스터는 다쓰 부처가 좋아하는 유서 깊은 중세 도시입니다. 아써 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이 살아 숨 쉬는 도시, 알프레드 대왕이 통치하던 옛 영국의 수도이기도 했지요. 집에서도 멀지 않아 그간 여러 차례 와서 사진도 많이 찍어 두었는데, 어쩐 일인지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없네요. 윈체스터 대성당은 다쓰 부처가 즐겨 방문하는 곳입니다. 이곳 코리스터와 성가대의 연주가 좋거든요. 해마다 이맘때면 교회 뜰에서 크리스마스 장터가 열리는데, 파는 물건들은 공예품 위주의 고만고만한 것들이지만 동네 자체가 아기자기하고 예뻐 관광객이 많이 찾아옵니다.
저는 이 윈체스터 대성당의 대문을 정말 좋아합니다. 보통 이런 큰 교회들의 문은 중후한 색과 거대한 크기로 위압감을 주기 마련인데, 윈체스터 대성당은 작은 문을 여러 개 두어 무게감을 덜어냈습니다. 빨간색으로 칠한 것 좀 보세요. 상식을 깹니다. 방문객을 좀 더 따뜻하게 맞이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크리스마스 때라 빨간색이 더욱 돋보입니다.
저는 이 대문을 'Strawberry Gate'라 부릅니다. 황동을 점점이 박아 넣어 마치 딸기 같아 보이죠? 영국의 교회들은 프랑스나 이태리의 교회들처럼 요란벅적 화려하지 않은 대신 소박하지만 가볍지 않으면서 우아한 맛이 있어요.
교회 옆에 기념품점이 있습니다. 교회 이곳저곳의 사진과 역사를 담은 안내책과 창문에 붙이는 스테인드 글라스 스티커 두 장을 샀습니다. 어느 교회를 방문하든 안내 책자와 엽서, 스테인드 글라스 스티커 등을 꼭 삽니다. 윈체스터는 제인 오스틴이 말년을 잠깐 보냈던 곳이라 제인 오스틴 기념품을 갖다 놓고 팔기도 합니다.
(사지는 않았지만) 이런 깜찍한 찻주전자가 다 있지 뭡니까.
좁은 통로를 지나 장터로 향합니다.
시옷ㅅ자 지붕을 한 작은 가게들이 조로록 늘어서 있었습니다. 임시로 세운 거라 여름 관광철에는 볼 수 없어요. 영국은 겨울이 우기라서 오늘도 역시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물건을 사든 안 사든 손에 지폐 한 장 꼬옥 쥐고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 구경하는 기분, 이거 정말 끝내주죠. 사탕가게 속 꼬마가 되는 겁니다. 겨울철에 유럽에 머물러 봤던 분들은 잘 아실 거예요.
가게들을 하나하나씩 죄다 찍어 우리 블로그 친구분들께 소개 좀 해 드리고 싶었는데, 가게마다 사람들이 닥지닥지 하도 많이 달라붙어 있어 당최 물건이 보여야 말이죠. 게다가, 한국에서나 다들 DSLR 카메라 들이대고 어디서나 극성맞게 사진 찍지 여기 영국인들은 함부로 남의 가게 물건이나 길거리 사람들, 식당 음식들을 찍질 않더라고요. (길거리에서 귀엽다고 남의 집 아이 그냥 찍다간 큰일나죠.)
대개 공산품보다는 소박한 공예품 위주의 장터였는데, 다들 작가 고유의 '작품'들이라서 더더욱 사진 찍는 것에 민감해했습니다. 코쟁이들은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 구별을 못 해 죄다 중국인으로 착각하는데, 이 중국인들이 또 유럽의 이름난 안티크 제품들 정교하게 복제해서 시장 교란시키는 걸로 악명이 높죠. 중국인처럼 보이는 동양인이 소박한 폰카도 아닌 묵직한 사진기 들고 작품 사 주지도 않으면서 철컥철컥 사진만 찍어 대면 다들 경계합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 컴컴해지면 가게마다 조명을 켜서 더욱 아름답다고 하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밤에 더 멋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나 봅니다.
오렌지와 향신료로 만든 크리스마스 리스들과 방향제들. 멀리서도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땐 몰랐는데, 오렌지나 귤clementines이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과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겨울철에 귤을 먹죠. 귤 먹으면서 한 번도 크리스마스 과일이라는 생각을 못 해봤는데요. 옛 시절엔 이 귤이 거의 유일한 겨울철 비타민C 공급원이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할 때 플라스틱이나 합성수지로 만든 공장제 장식품이 아닌 생으로 된 것들을 많이 씁니다. 이파리 후두둑 떨어져 지저분해져도 생 나뭇가지와 잎으로 만든 리스들을 선호합니다. 불편하긴 해도 향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모로칸 조명.
모로칸 티 세트를 장만하게 되면 그때 가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도예 공방에서 온 그릇들을 보자 도자기집 딸, 가족들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눈을 빛내면서 관심을 보이자 포터 오빠 급 친절 모드로 돌변. 전형적인 영국의 '훈남'이었지요.
"와, 당신 작품들, 색감도 좋고 다들 너무 멋지다! 우리 아버지도 포터였어." 하자 "오, 정말? 아버지는 무슨 유약을 쓰셨지?" 반가워하며 묻는 거예요. "유,유약? 그,그런 전문적인 건 잘 모르고, 아무튼 포터였어. 직접 빚기도 하고, 그 위에 그림도 그리는, 좀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분이셨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영국인들은 '데코레이터'냐고 묻습니다. 영국은 도자기 빚는 사람과, 그 위에 그림 그리거나 장식을 입히는 사람이 다르죠. 웨지우드의 장식적인 그릇들과 로얄 덜튼의 도자기 입상들 작업 과정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 양반이 '가마'라는 말을 합니다. '가마' 발음도 다 할 줄 알고 기특합니다. 가마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데 땀이 뻘뻘 났었어요.;; 도자기집 딸, 아무래도 날 잡아 도자기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이 영국 훈남 포터로부터 무언가를 샀느냐?
거럼요, 샀죠. 머그를 자그마치 세 개나 샀죠.
그런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도예가 둘째 오라버니 내외 생각에 마음이 짠했었는지 세 개나 사면서 단돈 10원도 깎질 않고 끄트머리 잔돈까지 다 주고 온 거예요. 작가가 추운 날씨에 나와 직접 팔고 있는 작품의 값을 깎는다는 게 왠지 죄 짓는 것 같았나 봅니다. 저도 창작하는 사람이니까요. 잘한 건지, 제 코가 석 자인 유학생 주제에 흥정도 않고 다 주고 오다니 어리숙한 건지, 으음...;; 아무튼 머그 자랑은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인들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새 '로빈Robin'이 가장 맛있어한다는 벌레mealworms. 영국인들은 반려동물이나 야생동물용 크리스마스 만찬까지 다 신경 씁니다. 백화점에서 반려동물용 크리스마스 식품 파는 것도 다 봤어요. 로빈들이 저 벌레를 즐기는 이유, 아마도 우리 인간들이 겉껍질 바삭하고 속은 즙 많아 달고 고소한 고급 새우 요리 먹는 이유와 흡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벌레를 보자 식욕이 돋습니다. (응?) 근처에 티룸이 있나 찾아봐야겠습니다.
샌드위치가 생략된 저렴 버전 아프터눈 티를 먹었습니다. 머그 사는 데 가산을 탕진해 밥 사 먹을 돈이 똑 떨어졌어요. 1인분에 4파운드(7천원)쯤 하는 아프터눈 티였는데, 스콘을 2단 트레이에 담아 냈으니 크리스마스 자선 행위라 불러도 되겠습니다.
왕립 화학회 연구원 말마따나 무거운 가방 들고 비 맞으며 추위에 떨다 들어와 홍차를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트와이닝 얼그레이 티백이 그 어떤 차보다도 향기롭습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요, 고생이 최고의 티푸드입니다.
트와이닝의 얼그레이가 점점 인공적인 세제 향으로 변해 간다고 영국인들의 실망이 대단합니다. 항의가 하도 빗발치자 고심 끝에 하는 수 없이 새 얼그레이와 함께 옛 얼그레이도 다시 내기로 결정했다죠. 이를 신문에서 다 다룰 정도였습니다. <트와이닝>이란 회사는 이제 더이상 일개 개인의 회사가 아니에요. 영국의 유산이자 역사의 일부죠. 얼그레이 홍차 역시 마찬가지고요. 다른 가향차는 개발하든 말든, 부재료를 더 넣든 말든, 인스탄트 가루차로 만들든, 제품 리스트에서 퇴출시키든 말든 개의치 않는데, '얼그레이 홍차' 하면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영국인들의 소중한 얼그레이는 국민들의 '동의' 없이 함부로 레서피를 바꾸면 안 되는 겁니다.
플레인 스콘을 위한 버터와 잼.
클로티드 크림이 다 떨어졌다고 직원이 난감해 하길래 집에서 만날 먹으니 안 줘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처트니를 바른 짭짤한 치즈 스콘.
몸을 녹인 후 다음 이벤트 장소로 향했습니다. 마켓 사진이 많지 않아 실망스러우시죠? 큰 사진기를 들이대니 작가들이 다들 불편해하는 것 같아 찍기가 망설여지더라고요.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크리스마스 준비 다들 잘 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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