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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체스터 ② 대성당 - 크리스마스 캐롤 촛불 예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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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터눈 티를 즐기고 나왔더니 5시도 안 됐는데 깜깜해졌습니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조명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불경기라 그런지 과하지가 않습니다. 어쨌거나 불황에도 불을 밝혔다는 게 중요한 거죠. 우리 권여사님의 인생 철학 중 단단이 좋아하는 게 몇 가지 있어요. 그중 하나 -
어려운 때일수록 (그 '어려움'이란 게 물질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뭐든 간에) 더욱 공들여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자.
지치지도 않는지 힘든 여행을 다녀오셔서는 그 다음 날 바로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품을 꺼내 집안을 꾸미고 남의 가게까지 다 꾸며 주셨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아이언 레이디가 따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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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크리스마스 트리.
어떻게 하면 저렇게 꼬마전구들을 무질서하면서도 아름답게 두를 수 있는 걸까요?
영국식 가드닝의 정수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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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마켓 타운 중심부에는 항상 이런 조형물Market Cross들이 세워집니다. 지극히 영국적인 거라죠? 아무 곳이나 다 마켓 타운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니고, 왕이 허가를 내려야만 마켓이 들어설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영국인들이 이민 가서 세운 나라들에도 이런 조형물들이 제법 있다고 하지요. 윈체스터에 있는 건 <The City Cross>라 불립니다. 마켓 한 가운데에 왜 십자가cross가 있는 걸까요?
'장사 잘 되게 해주소서.'
'물건 잘 사게 해주소서.'
서로 기도하라는 거죠.
사는 사람은 상품 값 지나치게 깎아 상인들 사기 떨어뜨리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흥정해 서로서로 덕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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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코니쉬 파스티Cornish Pasty'라는 만두 모양의 맛난 영국 파이를 소개해 드린 적 있죠? 코니쉬 파스티 전문점이랍니다. 영국 오시면 꼭 맛보시길 바랍니다. 건물이 왠지 《해리 포터》에 나오는 작은 숍 같지 않나요? 엇, 2층에 남자분 한 분이 홀로 외롭게 코니쉬 파스티를 즐기고 있습니다. Bon Appetit!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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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튜더풍 목조 건물을 맞닥뜨릴 때마다 내가 정말 유럽에 있구나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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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간판이나 네온 사인이 없어 눈이 시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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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박물관이 있는 줄도 모르고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네요;;
문이 이미 닫혔으니 다음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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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윈체스터에 간 목적은 크리스마스 마켓 구경과 윈체스터 대성당의 캐롤 서비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는데, 맙소사, 6시30분에 시작되는 예배를 위해 5시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홍차 마시며 노닥노닥하다 일찍 줄 선답시고 5시 전에 나왔는데도 줄이 이미 200m를 훌쩍 넘었습니다. 화살표 붙여 놓은 곳이 줄 시작 부분입니다. 허허, 까마득합니다. 영국인들의 줄 서기는 정말 세계적이죠. 크리스마스 캐롤 사랑도 대단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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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서 심심해 교회 옆모습도 좀 찍어 보았습니다. 이 정도면 손각대가 훌륭하죠? 다운튼 애비인 줄 알았다고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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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어느 자리에 앉아 듣느냐에 따라 감동과 감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음악 잘 들리고 오르간 잘 보이는 곳에 앉게 해 주십사 짧게 기도하고 입장했는데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다쓰베이더의 기도빨이 좀 셉니다. 포스가 충만한가 봅니다. 내부가 정말 아름답죠?
가○○ 님을 위해 오르간 정면의 운치 있는 성가대석에 앉지 않고 사진 찍기 좋은 옆쪽 보조 의자에 앉았습니다. 오르간 전체를 찍을 수 있으니 더욱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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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작 전 연주됐던 오르간 곡목입니다. 영국인들은 무얼 하든 구색 갖춰 놓고 즐기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교회 예배 때도 시대별로 작곡된 곡들을 늘어 놓고 연주와 찬양을 합니다. 현대 작곡가 곡들이 자주 연주 되죠. 부러운 풍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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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작 전 신나게 오르간을 찍었습니다. 촛불 예배라 실내가 너무 어두웠어요. 이 정도 나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죠. 오르간을 마음껏 찍을 수 있어 좋았는데, 가만 보니 천장도 황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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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일일이 조각해 붙였어요. 오르간 소리 들으며 천장을 우러러보고 있노라니 신앙심이 절로 샘솟을 지경입니다. 유서 깊은 교회에 앉아 최고 수준의 공예품들과 음악에 둘러싸여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것 - 인간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의 극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아무튼 감개무량했습니다.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무언가를 경험하고 나면 단단은 꼭 이삼일 간 끙끙 앓아 눕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몸에서 열이 나고 머리가 좀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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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석의 나무 장식들은 또 어떻고요.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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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이제 소년 성가대원들이 입장하기만을 기다립니다. 오르간 소리가 잠잠해지고 조명이 꺼져 촛불만 남은 가운데 성가대원들이 손에 초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예배 시간 중에 촬영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다 끝난 후 다시 찍도록 하죠.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 대륙의 코리스터들과 영국 코리스터들은 소리를 울리는 신체 부위가 다르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이 듣기엔 대륙 쪽 음색이 (좋게 말하면) 깊고 (달리 말하면) 아이들 목소리치고는 좀 징그럽게 느껴질 수 있겠죠. 반면, 대륙 쪽에서 볼 때는 영국 코리스터의 연주가 너무 가볍고 산뜻해 경박하게 느껴질 수 있고요. 순전히 각 나라의 취향과 전통의 문제입니다. 영국 성가나 캐롤은 그래서 대륙 쪽 성가와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결국 작곡가들은 자국 코리스터의 소리에 맞춰 곡을 쓰게 되는 거지요. 다쓰 부처의 소견으로는 이 윈체스터 대성당의 코리스터와 합창단이 그간 들었던 영국의 코리스터 팀들 중에서는 음색과 균형, 표현력, 집중도 등이 가장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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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예배는 다 끝나고 이제 오르간이 연주되는 가운데 사람들이 떼지어 교회 문을 나섭니다. 다쓰 부처는 항상 오르간 곡을 끝까지 다 들은 뒤 오르가니스트에게 박수 쳐주고 자리를 뜹니다. 극장에서도 영화 본 뒤 엔드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보고 앉아 있는 좀 별스런 습관이 있어요. 예배 끝나고 연주된 오르간 곡은 J. S. Bach의 In dulci jubilo (BWV 729)와 Louis Vierne(1870-1931)의 Final (Symphonie IV)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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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구석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오르간 연주를 듣고 있는 다쓰베이더.
(얼굴은 제가 사진 편집하면서 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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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쓰베이더가 오르간 연주를 감상하고 있을 동안 저는 블로거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사진 찍습니다.
설교대pulpit마저도 근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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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색슨 시절의 군주와 성직자들의 유골이 담긴 상자.
죽음을 터부시하는 한국과 달리 유럽은 어딜 가나 죽은 이의 흔적이 있지요. 동네 교회 뜰에도 석관과 비석이 그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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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오르간 사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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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이 촘촘히 서 있는 <Great Screen>도 찍어 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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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가 아닌 진짜 초로 밝힌 샹들리에 실물은 처음 봅니다. 초를 끄기 위해 아래로 끌어내릴 수도 있더라고요.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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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관리인이 초를 다 끈 뒤 원 위치로 올리는 중입니다. 교회 구석구석에 있는 공예품들은 모두 문화재나 다름 없죠. 이 때문에 초는 공해 물질이 적은 밀랍 초를 쓰는데, 이 밀랍 초가 좀 비싸야 말이죠. 예배가 끝나면 이렇게 얼른 끄는 수밖에요. 옛 시절엔 밀랍 초에 붙는 세금이 하도 세서 손님 가시자마자 초부터 끄는 일이 귀족 집 하인들의 우선 할 일이었다죠. 적은 수의 양초만 갖고도 방을 환히 밝히려면 식기들은 전부 은제품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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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등된 샹들리에.
샹들리에 뒤 정교한 조각들을 충분히 보시라고 여러 장 찍어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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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만 꺼내 세워 두는 작은 성탄nativity 입상들. 가까이서 담아 봅니다. 권여사님은 아마 올해도 <코스트코>에서 산 합성수지 성탄 입상들을 세워 두셨을 거예요. 영국에서 근사한 공예품 사서 부쳐 드리면 좋겠는데, 제 형편에 영국산 수공예품 사고 나면 아마 2주 정도는 굶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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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간 연주를 다 들은 뒤 12세기 철제 스크린을 지나 신랑身廊 쪽으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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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앉고 다쓰 부처는 저 나무 스크린 뒤쪽에 앉아 캐롤을 들었던 거죠. 명당 중의 명당이었습니다. 단단이 좋아한다는 그 '딸기대문' 쪽에 서서 교회 안을 바라보면서 찍은 겁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덧 그 많던 사람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자,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관리인이 다가오면서 점잖게 내쫓습니다.
한편,
아까 그 기특한 코리스터 꼬맹이들은 예배와 연습이 없는 낮시간엔 무얼 하고 있느냐?
교회 밖 아이스링크에서 이러고 놉니다. 그 고운 목소리는 다 어디로 가고, 꽥꽥 굉음을 내며 신나게 얼음을 지칩니다. 조카들 생각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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