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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 아프터눈 티 테이블의 꽃 - 오이 샌드위치 Cucumber Sandwich 본문
오늘은 영국 아프터눈 티 테이블의 필수 요소인 '오이 핑거 샌드위치'에 대해 논해보겠습니다. 설명을 위해 다쓰베이더가 만든 식빵을 잘라 하나 급조해보았는데, 얌전하지가 못하고 어수선한 것이 꼭 제이미 올리버가 만들다 만 음식 같군요. ㅋ
단단은 한국 블로거들의 영국 여행기를 보면서 가끔 킥킥거릴 때가 있습니다. 영국 여행을 오시면 십중팔구 티룸을 가시죠. "영국은 홍차의 나라라 하니 그 뭐시기 '애프터눈 티'인지 뭔지 하는 걸 꼭 먹어줘야지." 하시고는 '억' 소리 나는 비용도 마다않고 호텔 티룸들을 가십니다. 그런데 막상 찻상을 받아 보시고는 실망하는 분이 적잖은 것 같아요.
"뭐야, 이 퍽퍽한 동그란 빵은?" (스콘)
"우웩, 푸딩인 줄 알고 퍼먹었는데 뿜을 뻔했네. 대체 이 느끼한 노란 물질은 뭐야?" (클로티드 크림)
"충격! (털썩) 샌드위치에 오이만 들었어."
"으악, 써!" (홍차가 익숙치 않은 한국인)
온갖 반응이 다 나옵니다.
그래도 찻자리 파할 무렵엔 다음과 같은 감탄사도 제법 들을 수 있습니다.
"이야, 우습게 봤는데 양이 꽤 되네? 남은 걸 싸준다니 신나는군. 호텔방에서 밤에 먹으면 되겠다."
(다 먹은 뒤 찻상 위에 올라온 실버 티 스트레이너나 포크·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이거 꽤 근사해 보이네. 집에 이런 거 있으면 뽀대 나겠어.'
숙녀분들이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런던에서의 아프터눈 티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데 반해 신사분들은 전 연령대에 걸쳐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돈 내고 이런 주전부리를 해? 허이구, 입이 달아 저녁 입맛까지 다 달아났네."
* * *
오이만 넣은 티 샌드위치는 영국에서 귀족스러운 음식으로 통합니다.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티타임 장면들을 유심히 살펴보시면 마나님들 티타임에 오이 샌드위치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아프터눈 티 소책자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구절 역시 새겨 둘 만합니다.
- The Cucumber Sandwich -
오이 샌드위치
The cucumber sandwich is the aristocrat of the teatable; cool, gracious and impeccable. Should you peel the cucumber or not? It depends on whether you like the thin green line (also upon whether or not you live in America, where cucumbers are waxed and therefore must be peeled). One thing is for certain - the bread must be as slim as a leaf. By virtue of its utter simplicity and symbolic status, the cucumber sandwich is also one of the few foods to rise from the merely culinary world to dizzy literary heights.
오이 샌드위치는 아프터눈 티 테이블의 꽃과도 같다. 그 청량함, 우아함, 나무랄 데 없는 고결함이란. 오이 껍질을 벗겨서 써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오이 껍질의 그 얇은 녹색 선을 좋아하는가 아닌가 하는 개인의 기호에 달렸다. 미국에서는 오이에 왁스를 치므로 미국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껍질을 벗겨서 써야 한다. (옛 시절엔 그랬었나 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식빵을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야 한다는 것. 그 단순 명료함과 상징적 지위로 인해 오이 샌드위치는 단지 식문화의 한 부분에 머물지 않고 문학적 찬사를 한몸에 받는 음식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발번역 너그러운 양해를...)
* * *
Algernon: (picking up an empty plate in horror) Good heavens! Lane! Why are there no cucumber sandwiches? I ordered them specially.
(놀라서 빈 접시를 집어들고는) 맙소사! 래인! 어째서 오이 샌드위치가 없는 거지? 내가 특별히 부탁까지 했는데.
Lane: (gravely) There were no cucumbers in the market this morning, sir. I went down twice.
(소침해져서) 아침에 시장엘 갔더니 오이가 하나도 없었답니다. 두 번이나 갔었는데도 허탕쳤지요.
Algernon: No cucumbers!
오이가 없었다고!
Lane: No, sir. Not even for ready money.
현찰을 바로 준대도 소용이 없었어요.
Algernon: That will do, Lane, thank you!
그렇군. 어쨌든 고맙네.
- from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Oscar Wilde
오스카 와일드 작품에서 발췌
▲ 가필드 님이 사주셨던 런던 브라운 호텔 아프터눈 티.
채식주의자용 샌드위치 모듬. 맨 왼쪽은 아보카도 샌드위치,
오른쪽에서 두 번째 것이 오이 샌드위치. 이 호텔은 오이
껍질을 벗겨 더욱 부드럽게 만드는 걸 선호하는 모양.
▲ 런던 클래리지 호텔 아프터눈 티.
앞쪽은 채식주의자용, 뒤쪽은 잡식주의자용 샌드위치 모듬.
어느 쪽이건 오이 샌드위치는 필수다.
영국식 오이 티 샌드위치의 미덕은 바로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맛과 과하지 않은 그 청량한 식감에 있지요. 질 좋은 재료와 식재료 고유의 맛을 해치지 않는 조리법을 최고로 치는 여기 사람들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음식입니다. 온갖 종류의 영국 티 샌드위치 중 단단은 사실 이 오이 샌드위치 만들기가 가장 까다롭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빵은 약간의 산미가 나면서 촉촉해야 하고, 최대한 얇게 썰어야 합니다. 빵을 얇게, 그러면서도 고르게 써는 것부터가 저는 너무 힘들더라고요. 사진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만든 건 삐뚤빼뚤 두껍게 썰렸지요. 버터는 빵을 뜯지 않고 부드럽게 잘 발릴 수 있도록 실온에 두었다 쓰되 바르는 양을 잘 조절해 너무 느끼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낼 수 있도록 잘 펴발라야 합니다. 무염 버터보다는 소금량 1% 정도의 저염 버터slightly salted butter를 쓰면 맛있습니다.
오이를 절이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너무 절여 아삭함이 사라져도 안 되고, 생오이의 비린 맛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도 안 되며, 물기 제거한다고 너무 쥐어짜 형태가 으스러져서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 간을 잘 맞춰야 합니다. 오이 소박이나 김치 같은 짠 야채 절임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오이 간을 너무 세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버터 외의 추가 소스를 쓸 경우에는 무얼 쓸 것이냐, 향초를 쓸 경우에는 또 무얼 쓸 것이냐도 중요합니다. 저는 샌드위치나 토스트에 <크라프트> 사의 '필라델피아 크림 치즈' 쓰는 걸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섬세한 오이 샌드위치에 바르기에는 맛이 너무 자극적이에요. 심지어 향미 강한 훈제연어 샌드위치에 바르는 것도 저는 반대합니다. 다른 모든 재료의 맛을 압도하고도 모자라 목까지 메이게 하거든요. 버터 외의 소스로는 좀 더 순한 맛의 영국 커드 치즈curd cheese를 부드럽게 풀어 싱글 크림과 섞어 쓰거나, 프랑스 크렘 프레쉬creme fraiche를 쓰던가,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차라리 마요네즈를 쓰는 게 낫다고 봅니다. 향초로는 섬세한 딜dill, 청량한 민트, 쌉쌀한 새싹cress이나 물냉이watercress 등을 쓰곤 하는데, 그야말로 취향껏 넣으시면 됩니다. 안 넣어도 되고요. 하여간 오이맛을 가리지 않는 선에서 변주를 해주시면 됩니다.
만들고 나서 오이 때문에 빵이 젖지 않게 하는 것도, 또, 빵이 너무 마르지 않게 보관하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지요. 이토록 까다롭기 때문에 샌드위치의 나라 이곳 영국에서도 수퍼마켓이나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오이 샌드위치 찾아보기가 그렇게 힘든 모양입니다. 즉석에서 만들어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오이 샌드위치가 '귀족적'이라고 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지난 번 코엑스에 있는 어느 '영국식 정통 아프터눈 티룸' 방문기를 올렸을 때 샌드위치 타박을 좀 했었지요. '정통'이라 했으니 오이 샌드위치 하나 정도는 반드시 올려주어야 하는 겁니다. 영국식 티룸을 하려면 영국인들에게 오이 샌드위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지하고 있었어야 한다는 거죠. '럭셔리'의 상징 아프터눈 티에서 가장 럭셔리한 요소인 이 오이 샌드위치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래에 몇 가지 오이 샌드위치 레서피를 올려드릴게요. 오이 샌드위치 만드는 방법에 정답은 없고, 재료는 무얼 쓰던 간에 '우아한' 느낌을 충분히 주도록 만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런던 리츠 호텔의 아주 오래된 초간단 레서피
오이는 껍질을 벗겨 슬라이서로 얇게 동전 모양으로 저민다.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아야 한다.
소금과 식초에 30분 정도 절인 뒤 물기를 제거한다.
얇게 썬 통밀 식빵에 버터를 바르고 오이를 얹어 적당히 눌러주며 핑거 모양이 되도록 길쭉하게 3등분 한다.
상에 내기 전까지 습기가 있는 천을 덮어 잠깐 보관한다.
어느 요리책에서 옮겨 적어 두었던 것
오이 2개(260g 정도)를 껍질 벗기지 말고 길이로 얇게 썬다.
화이트 와인 식초 1큰술과 [1큰술 = 15ml]
잘게 썬 신선한 딜dill 1큰술과
질 좋은 자염 1/2 작은술과 [1작은술 = 5ml]
고운 설탕caster sugar 1/2 작은술과
즉석에서 간 통후추 1/4 작은술을 한데 섞고 오이를 넣는다.
맛이 어우러지고 잘 절여지도록 냉장고에 두 시간 정도 뚜껑 덮어 둔다.
- 두 시간 후 -
오이에서 물기를 제거한다.
얇게 썬 통밀 식빵 여덟 장을 준비해 오이가 닿을 면에 모두 버터를 바른다. 그중 한 쪽에는 크렘 프레쉬creme fraiche를 덧발라 산뜻한 맛을 더하도록 한다. [크렘 프레쉬를 구하기 힘들 경우 사워 크림soured cream에 단맛 없는 플레인 생크림을 더해서 신맛을 줄여 쓰면 얼추 비슷한 맛이 납니다. - 단단] 식빵의 겉껍질을 잘라 내고 길쭉한 핑거 모양으로 3등분 썰어 낸다. 샌드위치 12쪽이 나올 것이다.
소금 섭취를 조심해야 할 분들을 위한 절이지 않는 초고속 레서피
통밀 식빵 여덟 장에 버터를 바르고 겉껍질을 잘라 낸다.
오이 반 개를 껍질째 얇게 썰어
오이에 레몬 반 개의 즙을 짜 뿌리고
새싹salad cress과 민트 잎을 적당히 흩뿌려준다.
빵에 소를 얹어 조립한 뒤 핑거 모양으로 길쭉하게 썰어 낸다.
손끝 야무진 분들을 위한 난이도 있는 근사한 오이 샌드위치
레서피는 ☞ 이 글에 별도로 정리해 놓았으니 솜씨 좋은 분들은 도전해보세요.
한국의 티룸 방문기들을 보면 작고 촉촉한 영국식 티 샌드위치 대신 뻣뻣한 식사용 빵에 이런저런 재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클럽 샌드위치, 바겟트 샌드위치, 지중해풍 파니니 샌드위치, 까나페 스타일의 오픈 샌드위치, 토스트 샌드위치 등을 내는 게 보편적이더군요. 이런 것들은 일단 '비주얼'이 화려하고 첫눈에 벌써 군침이 돌거든요. 그런데 '우아함' 측면에서 보면 썩 만족스럽지가 않죠. 입을 크게 벌려야 하고 한쪽을 베어물 동안 터진 바깥 쪽에서는 재료가 굴러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티 샌드위치는 먹는 사람을 고려해 너무 두껍지 않게 만들고 작게 써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으로 가뿐하게 집어 쉽게 한입 베어물 수 있도록 디자인 된 거죠. 동양식 음다 풍습과 달리 영국의 아프터눈 티는 대화가 그 목적인 사교의 장입니다. 먹는 데 집중하느라 대화가 끊기면 안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재료를 이것저것 대충 올려 맛있게 먹으면 됐지 웬 격식을 그리 따지오?" 하시겠지만 아프터눈 티를 기왕 경험해보겠다고 결심하셨다면 이런 의미들까지 함께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지요. 저 푸짐한 서브웨이나 퀴즈노 클럽 샌드위치들은 식사 때 사서 손에 막 묻히고 적당히 흘려가면서 맛있게 드시면 됩니다. ■
▲ <트와이닝스>의 새 홍차 광고 사진.
격식 안 갖춘 편안한 가정식 간이 찻상.
티 샌드위치 대표로 오이 샌드위치를 올렸다.
▲ 위 광고 사진에 홀딱 넘어가 새 홍차 구매.
흉내 내 비슷한 찻상을 꾸며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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