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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판의 교훈 본문
독일인들과 영국인들이 즐기는 괴물질 중에 '마지판marzipan'이라는 것이 있다. 박살내 짓뭉갠 아몬드와 설탕이 주 원료인데, 이게 왜 괴물질인고 하니, 이토록 단 음식이 세상에 또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단단이 그간 마지판을 접했던 주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 분홍색 노란색의 알록달록한 바텐버그 케이크 [영국]
• 결혼식에 먹는 프룻 케이크 [영국]
• 부활절에 먹는 심넬 케이크 [영국]
• 크리스마스 케이크 [영국]
• 슈톨렌 [독일]
영국에서는 주로 덩어리로 된 제과제빵용 마지판을 밀대로 밀어 얇게 편 다음, 단단하고 밀도 높은 영국식 전통 프룻 케이크 위에 덮어 씌우고 그 위에 로얄 아이싱을 한 겹 덧씌운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나 웨딩 케이크를 이렇게 만든다. 관광객들은 이 마지판을 주로 아프터눈 티타임에 바텐버그 케이크를 통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결혼식을 위해 탄생했다는 바텐버그 케이크.
호텔이라 그런지 이건 덜 달고 맛있었다.
런던 클래리지스 호텔 아프터눈 티룸.
▲ 단단이 만들어본 영국의 부활절 심넬 케이크Simnel cake.
단단이 마지판을 직접 사서 써 본 것은 부활절 심넬 케이크를 만들 때였는데, 케이크에 씌우기 전 조금 떼어 맛을 보니, 우웩, 세상에 이렇게 단 물질도 또 없을 듯. 너무 달아 맨 정신에는 절대 먹을 수 없고 설탕양을 대폭 줄여 만든 케이크 위에 얹었을 때나 겨우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쟁이들은 왜 이런 걸 먹을까?
마지판에 있어 수준이 한 수 위라는 독일에서는 영국인들처럼 얇게 밀어 케이크에 덮지 않고 근사한 공예품처럼 만드는 관습이 있다고 해 찾아보았더니,
허걱,
이런 미친!
이걸 먹으라는 거냐?!
다행히도 이런 극사실주의 인체 형상의 마지판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고, 마지판이란 게 워낙 점토처럼 가공성이 좋다 보니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것일 뿐, 제과 시장에서는 주로 아래와 같이 생긴 것들이 주를 이룬다 한다. 귀여운 동물 모양도 흔히 볼 수 있다.
이 과일 모양의 것들은 아직 먹어본 적이 없는데 드셔보신 분들은 소감을 좀 말해 달라. 이것도 많이 단가? 단단은 색소 넣은 음식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이국의 간식거리가 귀했던 어린 시절에도 '엠앤엠즈m&m's' 같은 물질은 좀체 입에 대지를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색이 그토록 선명한 게 수상했던 거지.
하여간 마지판이란 건 사람이 먹을 음식이 못 된다 생각해 케이크 한 번 만들어본 뒤로는 다시는 사지 않고 있었는데, 지난 겨울,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읽다가 어느 음식 평론가 양반이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마지판이 달기만 하고 맛없다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야. 제대로 된 걸 평생 못 먹어본 게지."
무엇이? (콰쾅)
내가 바로 그 불쌍한 사람이야!
이 글을 보자 권여사님의 교훈이 섬광처럼 번쩍.
"무식한데 소신 있는 사람을 멀리하라."
내가 그 무식한데 소신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권여사님이 말하는 무식하고 소신 있는 사람이란, 대개 한두 번 경험한 것을 가지고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성급히 결론을 내리려는 경솔함을 보이며, 평생 의심 한 번 않고 자기가 결론 내린 것을 철석같이 믿고 살아가려는 아집까지 있는 데다, 자기 혼자 그렇게 믿는 걸로는 성이 안 차 주변 사람들까지 설득하려 드는 사람 아니더냐. 지금 보니 내가 딱 그런 사람이었네. 형편없는 마지판 몇 번 먹어보고는 그게 마지판의 전부인 줄 알고 주변 사람들한테까지 먹지 말라 말렸으니.
이 가디언 글쟁이의 말에 단단은 세상 어딘가엔 내가 맛보지 못한 맛있는 마지판이 있을 거라는 깨달음을 얻어 다쓰베이더와 함께 "제대로 된" 마지판을 반드시 맛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보오, 바깥 양반. 바깥에 나갔다 혹 식료품점에 들르게 되면 우리가 그간 보지 못 했던 마지판이 있는지 꼭 살펴봐 주시구려."
다쓰베이더가 외출할 때마다 부탁해 마침내 사진에 있는 마지판을 구할 수 있었으니. (두둥)
크리스마스가 지나 수퍼마켓에 떨이로 나와 있는 걸 집어 왔다고 했다. 오, 이 비싼 게 떨이로?
다쓰: 이렇게 정성껏 낱개 포장된 마지판은 처음 보오.
단단: 이름을 보니 마지판의 본고장 독일에서 온 듯하오. 자, 어서 옷을 벗겨 봅시다.
다크 쵸콜렛 속에 보슬보슬 뽀얀 마지판이 한가득, 고소한 아몬드와 쌉쌀한 쵸콜렛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하는 듯했다. 바삭한 쵸콜렛 껍질과 꼬득꼬득한 마지판이 내는 식감의 조화가 절묘하다. 단맛은 그저 은은하게 날 뿐. 그간 먹었던 맛없는 마지판은 잔뜩 넣은 설탕 탓이었단 말인가. 맛있는 마지판을 씹고 있으니 권여사님과 가디언 글쟁이에게 감사하다. 역시 세상은 넓고 맛있는 음식은 끝도 없는 것이다.
마지판의 교훈
만약 어떤 음식을 처음 접했는데 맛이 없었다면 그 음식 맛없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고 거들떠보지 않을 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차근차근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자.
• 내가 방금 먹은 이 음식, 맛이 없었다.
• 맛없는 음식이라면 도태돼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거늘,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이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맛없지 않다는 소리다.
• 내가 방금 먹은 게 하필이면 솜씨 없는 사람에 의해 맛없게 조리되거나 가공된 것일 수도 있다.
• 다른 식당에서 다시 사 먹어 보거나 다른 회사의 제품으로 사 먹어본다. (이 과정을 끈기 있게 여러 번 반복할수록 좋다. 그래서 맛있는 마지판 찾았잖나. 내게 마지판은 더이상 맛없는 음식이 아니다.)
• 그래도 맛이 없다면
• 식당이나 식품 회사들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좋은 재료 안 쓰고 조악한 재료 쓰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졌을 수도 있다. 고급 혀를 가진 탓에 이런 저질 재료는 절대 참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여긴다면, 제대로 된 레서피를 입수해 제대로 된 재료로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어본다. (한국에도 마지판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강호의 고수들이 있다. 존경한다.)
• 그래도 맛이 없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나한테는 맛없는데 이 음식의 본고장 사람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음식을 꾸준히 잘 먹어 오고 있다. 그렇다면 그 나라 사람들 입맛과 내 입맛이 서로 다르게 발달해 왔다는 소리다. 내가 지금껏 맛보지 못한 생경한 식재료 탓일 수도 있다.
• 고로, 이 음식은 맛이 없다기보다 내 입맛에 익숙하지 않거나 맞지 않을 뿐이다.
• 고로, 어떤 음식 먹고 맛이 없다고 느꼈다면 그 음식 맛없다고 동네방네 떠들어 남의 호기심에 초를 치거나 기회를 박탈하려 들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자기만 안 먹으면 된다.
지난 가을, 싱가포르의 대표 음식 중 하나라는 커리 락사laksa가 궁금해 수퍼마켓에서 즉석 식품으로 포장된 것을 사다 데워 먹어 본 적이 있다. 내 입맛에는 잘 맞았는데, 혹 코쟁이들을 위해 순화된 버전은 아닌가 싶어 본고장의 락사 모습이 궁금해 누리터를 뒤졌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글이다.
☞ [싱가폴 여행] 완전 비추 음식 락사
글쓴이는 싱가포르 여행 가서 처음 먹어본 락사가 맛이 없었던 모양이다. 워낙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라 하니 맛없어 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생각은 하지만 글쓴이는 락사는 맛없는 음식이라고 글에 빨간 띠까지 둘러가며 남도 먹지 못 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수많은 락사 식당 중 고작 한 군데에서 단 한 번 먹어 보고 이런 대담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맛없으면 자기만 조용히 안 먹으면 된다. 락사에 관해서는 ☞ 이 글을 참조하시라.
그건 그렇고, 위의 뤼벡 니더레거 마치판 외에 또다른 맛있는 마지판을 알고 계신 분들은 소개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마지판의 경우와 같이 맛없다고 생각했던 음식이 어떤 계기로 맛있는 음식으로 새롭게 인식된다는 것은 다행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음식을 대할 때는 최대한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안 먹는 음식, 못 먹는 음식 목록이 긴 것보다는 맛있는 음식 목록이 긴 게 아무래도 인생 사는 데 낫지 않겠나. ■
▲ 영국 백화점에서 파는 니더레거 마치판.
영감, 다음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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