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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길리안 쵸콜렛 유감

단 단 2013. 12. 19. 15:11

 

 

 

 

 

길리안 쵸콜렛을 선물 받았습니다. 무려 500g이나 든 대용량입니다. 남편 기Guy 씨가 맛을 내고 부인 릴리안Liliane 씨가 모양을 냈다고 해서 '길리안'. 아름다운 모양과 헤이즐넛 맛이 일품인 전설적인 쵸콜렛이죠. 아, 길리안.

 

쵸콜렛을 좋아해 한국에 있을 땐 쵸콜렛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먹었었습니다. 어릴 땐 왔다 쵸코바, ABC 쵸콜렛, 가나 쵸콜렛, 투유 쵸콜렛, 슈샤드 등을 먹었고, 나이 들어서야 외쿡 물 먹은 쵸콜렛을 접하게 되었는데, 외쿡 물 먹은 것들은 확실히 개성이 있으면서 뭔가 다르더란 말이죠.


허쉬 키세스
무얼 넣었길래, 어떤 공정을 거쳤길래 이토록 독특한 향을 내는가. 승화된 똥냄새 혹은 아기 토사물 냄새.

(단단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유럽인들이 전반적으로 미국 쵸콜렛을 이렇게 느낌. TV에서 봤음.)


하와이안 마카다미아
지인이나 친구가 해외 여행 갔다 와 안겨주곤 했던 쵸콜렛. 오독오독, 신기한 이국의 열매 마카다미아는 어째서 한여름인데도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것인가.


린트 골드 버니
입에 쩍 붙는 쫀득쫀득한 부활절 토끼여, 그대 금박에 싸여 왠지 '있어' 보이는구려. 방울도 다 달고. 어라? 방울에서 소리도 진짜 나고.

 

페레로 로쉐
독특한 식감과 저 럭셔리한 플라스틱 상자, 악세사리 담으면 딱.


길리안
부드러운 질감과 고소한 헤이즐넛 맛의 프랄린. 갖가지 바다 생물들의 저 아름답고 정교함.

 

 

 

 

 

 

 



모양이 하도 예뻐 봉봉 그릇에 몇 개를 따로 담아 보았습니다. 두 가지 색의 쵸콜렛을 섞어 자연스럽고도 고풍스러운 멋을 냈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암요, 쵸콜렛은 이런 '와우 팩터'가 좀 있어야지요. 무식하게 막 담고 발로 막 찍어도 사진 잘 나왔잖아요. 시판 쵸콜렛 중 가장 멋있는 쵸콜렛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길리안을 포함해 위에 열거한 쵸콜렛들이 이제는 하나도 맛있지가 않으니 이를 어쩝니까. 입이 고급이 돼 버렸어요. 요리책을 너무 많이 들여다본 탓입니다. 영국의 요리책들을 보면 저자들이 한결같이 'good quality chocolate'을 쓰라고 신신당부를 하거든요.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 단단, 곧이곧대로 따랐습죠. 좋은 쵸콜렛 몇 번 사서 쓰다 보면 급이 떨어지는 쵸콜렛 먹었을 때 당장 '엇, 이거 맛이 왜 이래?' 하는 반응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옵니다.

 

 

 

 

 

 

 



저는 다크 쵸콜렛이 밀크 쵸콜렛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허세는 부리지 않습니다. 코코 고형분cocoa solids 함량이 높을수록 몸에 덜 나쁘고 비싸면서 고급일지는 몰라도 맛이 반드시 정비례해서 좋아지진 않거든요. 산미가 높고 쓴데다 입 안에서 다소 겉돌고 간장 맛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다크 쵸콜렛의 강하고 깔끔한 맛이 있는가 하면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밀크 쵸콜렛의 미덕이란 게 또 있잖습니까.


저는 '이물질' 안 든 순수 쵸콜렛만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견과류나 건과일이 든 것들, 리큐어나 커피, 고추 등을 넣어 어른의 맛을 살린 특색 있는 제품들, 부드러운 소를 채운 프랄린과 트러플, 쌀과자 뻥튀기 넣어 바삭바삭 동심을 자극하는 재미난 제품들도 잘 먹습니다. 제가 정말 참을 수 없는 부류의 쵸콜렛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료 중 설탕이 가장 많이 든 제품들.
즉, 성분표 맨 앞에 설탕이 써 있는 것들. 설탕을 많이 넣어도 좀 세련되게 넣을 수도 있겠건만, 첫 입에 지근지근 씹힐 정도로 퍼 넣는 촌스런 회사들이 수두룩. 이런 쵸콜렛 한입 깨물면 욕이 절로 나와요.


코코 버터 대신 팜유나 기타 대체제 넣은 것들.
싱거우면서 느글느글, 느끼하기 짝이 없어요. 몸에도 무지 나빠요.


진짜 바닐라 대신 가짜 바닐라인 '바닐린' 써서 향 낸 것들.
농부가 힘들게 생산한 쵸콜렛 원료에 이런 가짜를 넣어 망칠 생각을 하다니, 괘씸합니다.



허쉬 키세스 쵸콜렛은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합니다. 게다가 식감도 형편없어 사르르 녹기는커녕 덩어리져 모래알처럼 씹히니 이건 돈 주고 사 먹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한술 더 떠 팜유도 아닌 신물질인 'PGPR'이란 걸 써서 코코 버터를 아낀다는군요. 재료비를 절감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길리안 쵸콜렛은 위의 세 가지 조건 중 두 가지를 충족합니다. 한입 깨물면 설탕이 먼저 지근지근 씹힙니다. 헤이즐넛 맛이 기분 좋기는 하나 가짜 바닐라를 씁니다. 바닐라가 비싼 향신료 축에 들거든요. 모양도 향도 다 좋은데 이 점이 늘 아쉽습니다. 그나마 팜유를 쓰지 않고 코코 버터로만 쓰니 식용유 특유의 겉도는 미끌거림은 없지요. 설탕과 헤이즐넛과 분유가 많이 든 만큼 코코 고형분 함량이 떨어지게 되니 초콜렛이 아닌 '준초콜릿'으로 분류가 되는데, 사실 이 길리안 씨쉘을 쵸콜렛으로 불러주기에는 코코 맛이 너무 안 납니다. 달기만 하고 싱거워요. 프랄린의 특성상 코코 함량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요. 이건 고다이버Godiva 같은 고급 브랜드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팜유나 대두유가 안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걸까요?
'준초콜릿'이 뭘까?

 

유럽용 길리안 쵸콜렛의 성분 (많이 든 순서 대로):
sugar, hazelnuts, whole milk powder, cocoa butter, cocoa mass, soya lecithin (emulsifier), vanilin. 끝.



맛이 어떻느니 성분이 어떻느니, 제가 지금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자빠졌죠? 쵸콜렛 수요 맞추느라 코코 빈 산지에서는 학교 다니며 동무들과 해맑게 뛰놀아야 할 아이들까지 붙잡아다 일을 시킨다는데 말이죠. 작년에 코코 빈 산지의 내정이 불안해져 사상자가 속출한다는 BBC 기사를 접하고 단단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쵸콜렛 값 오르겠구나!'


그곳 사람들의 안녕을 염려하기는커녕 쵸콜렛 값 오를지 모른다는 걱정을 제일 먼저 하고 앉았다니, 제 자신에게 그날 정나미가 뚝 떨어졌더랬죠. 고기와 마찬가지로 쵸콜렛도 적게 먹되 질 좋은 것으로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진 돈도 없는 주제에 입맛만 자꾸 높아지면 어쩌자는 걸까요? 적게 먹는 수밖에요.

 

 

 

 

 

 

 


 눈으로 먹는 쵸콜렛 길리안.

무려 열한 가지 모양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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