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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안 쵸콜렛 유감 본문
길리안 쵸콜렛을 선물 받았습니다. 무려 500g이나 든 대용량입니다. 남편 기Guy 씨가 맛을 내고 부인 릴리안Liliane 씨가 모양을 냈다고 해서 '길리안'. 아름다운 모양과 헤이즐넛 맛이 일품인 전설적인 쵸콜렛이죠. 아, 길리안.
쵸콜렛을 좋아해 한국에 있을 땐 쵸콜렛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먹었었습니다. 어릴 땐 왔다 쵸코바, ABC 쵸콜렛, 가나 쵸콜렛, 투유 쵸콜렛, 슈샤드 등을 먹었고, 나이 들어서야 외쿡 물 먹은 쵸콜렛을 접하게 되었는데, 외쿡 물 먹은 것들은 확실히 개성이 있으면서 뭔가 다르더란 말이죠.
허쉬 키세스
무얼 넣었길래, 어떤 공정을 거쳤길래 이토록 독특한 향을 내는가. 승화된 똥냄새 혹은 아기 토사물 냄새.
(단단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유럽인들이 전반적으로 미국 쵸콜렛을 이렇게 느낌. TV에서 봤음.)
하와이안 마카다미아
지인이나 친구가 해외 여행 갔다 와 안겨주곤 했던 쵸콜렛. 오독오독, 신기한 이국의 열매 마카다미아는 어째서 한여름인데도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것인가.
린트 골드 버니
입에 쩍 붙는 쫀득쫀득한 부활절 토끼여, 그대 금박에 싸여 왠지 '있어' 보이는구려. 방울도 다 달고. 어라? 방울에서 소리도 진짜 나고.
페레로 로쉐
독특한 식감과 저 럭셔리한 플라스틱 상자, 악세사리 담으면 딱.
길리안
부드러운 질감과 고소한 헤이즐넛 맛의 프랄린. 갖가지 바다 생물들의 저 아름답고 정교함.
모양이 하도 예뻐 봉봉 그릇에 몇 개를 따로 담아 보았습니다. 두 가지 색의 쵸콜렛을 섞어 자연스럽고도 고풍스러운 멋을 냈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암요, 쵸콜렛은 이런 '와우 팩터'가 좀 있어야지요. 무식하게 막 담고 발로 막 찍어도 사진 잘 나왔잖아요. 시판 쵸콜렛 중 가장 멋있는 쵸콜렛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길리안을 포함해 위에 열거한 쵸콜렛들이 이제는 하나도 맛있지가 않으니 이를 어쩝니까. 입이 고급이 돼 버렸어요. 요리책을 너무 많이 들여다본 탓입니다. 영국의 요리책들을 보면 저자들이 한결같이 'good quality chocolate'을 쓰라고 신신당부를 하거든요.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 단단, 곧이곧대로 따랐습죠. 좋은 쵸콜렛 몇 번 사서 쓰다 보면 급이 떨어지는 쵸콜렛 먹었을 때 당장 '엇, 이거 맛이 왜 이래?' 하는 반응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옵니다.
저는 다크 쵸콜렛이 밀크 쵸콜렛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허세는 부리지 않습니다. 코코 고형분cocoa solids 함량이 높을수록 몸에 덜 나쁘고 비싸면서 고급일지는 몰라도 맛이 반드시 정비례해서 좋아지진 않거든요. 산미가 높고 쓴데다 입 안에서 다소 겉돌고 간장 맛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다크 쵸콜렛의 강하고 깔끔한 맛이 있는가 하면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밀크 쵸콜렛의 미덕이란 게 또 있잖습니까.
저는 '이물질' 안 든 순수 쵸콜렛만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견과류나 건과일이 든 것들, 리큐어나 커피, 고추 등을 넣어 어른의 맛을 살린 특색 있는 제품들, 부드러운 소를 채운 프랄린과 트러플, 쌀과자 뻥튀기 넣어 바삭바삭 동심을 자극하는 재미난 제품들도 잘 먹습니다. 제가 정말 참을 수 없는 부류의 쵸콜렛은 다음과 같습니다:
● 원료 중 설탕이 가장 많이 든 제품들.
즉, 성분표 맨 앞에 설탕이 써 있는 것들. 설탕을 많이 넣어도 좀 세련되게 넣을 수도 있겠건만, 첫 입에 지근지근 씹힐 정도로 퍼 넣는 촌스런 회사들이 수두룩. 이런 쵸콜렛 한입 깨물면 욕이 절로 나와요.
● 코코 버터 대신 팜유나 기타 대체제 넣은 것들.
싱거우면서 느글느글, 느끼하기 짝이 없어요. 몸에도 무지 나빠요.
● 진짜 바닐라 대신 가짜 바닐라인 '바닐린' 써서 향 낸 것들.
농부가 힘들게 생산한 쵸콜렛 원료에 이런 가짜를 넣어 망칠 생각을 하다니, 괘씸합니다.
허쉬 키세스 쵸콜렛은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합니다. 게다가 식감도 형편없어 사르르 녹기는커녕 덩어리져 모래알처럼 씹히니 이건 돈 주고 사 먹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한술 더 떠 팜유도 아닌 신물질인 'PGPR'이란 걸 써서 코코 버터를 아낀다는군요. 재료비를 절감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길리안 쵸콜렛은 위의 세 가지 조건 중 두 가지를 충족합니다. 한입 깨물면 설탕이 먼저 지근지근 씹힙니다. 헤이즐넛 맛이 기분 좋기는 하나 가짜 바닐라를 씁니다. 바닐라가 비싼 향신료 축에 들거든요. 모양도 향도 다 좋은데 이 점이 늘 아쉽습니다. 그나마 팜유를 쓰지 않고 코코 버터로만 쓰니 식용유 특유의 겉도는 미끌거림은 없지요. 설탕과 헤이즐넛과 분유가 많이 든 만큼 코코 고형분 함량이 떨어지게 되니 초콜렛이 아닌 '준초콜릿'으로 분류가 되는데, 사실 이 길리안 씨쉘을 쵸콜렛으로 불러주기에는 코코 맛이 너무 안 납니다. 달기만 하고 싱거워요. 프랄린의 특성상 코코 함량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요. 이건 고다이버Godiva 같은 고급 브랜드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팜유나 대두유가 안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걸까요?
☞ '준초콜릿'이 뭘까?
유럽용 길리안 쵸콜렛의 성분 (많이 든 순서 대로):
sugar, hazelnuts, whole milk powder, cocoa butter, cocoa mass, soya lecithin (emulsifier), vanilin. 끝.
맛이 어떻느니 성분이 어떻느니, 제가 지금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자빠졌죠? 쵸콜렛 수요 맞추느라 코코 빈 산지에서는 학교 다니며 동무들과 해맑게 뛰놀아야 할 아이들까지 붙잡아다 일을 시킨다는데 말이죠. 작년에 코코 빈 산지의 내정이 불안해져 사상자가 속출한다는 BBC 기사를 접하고 단단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쵸콜렛 값 오르겠구나!'
그곳 사람들의 안녕을 염려하기는커녕 쵸콜렛 값 오를지 모른다는 걱정을 제일 먼저 하고 앉았다니, 제 자신에게 그날 정나미가 뚝 떨어졌더랬죠. 고기와 마찬가지로 쵸콜렛도 적게 먹되 질 좋은 것으로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진 돈도 없는 주제에 입맛만 자꾸 높아지면 어쩌자는 걸까요? 적게 먹는 수밖에요. ■
▲ 눈으로 먹는 쵸콜렛 길리안.
무려 열한 가지 모양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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