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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독립 투표를 마치고 본문
결국 앤드류는 조지와 계속 같이 살기로 결정했다. 밤 꼴딱 새면서 지역별 개표 결과 보느라 날이 밝아서야 잠자리에 들었더니 아직도 헤롱헤롱하다야. 내 평생 이렇게 장시간에 걸쳐 다양한 스코티쉬 액센트를 들어보긴 처음이네. 개표 중계 보면서 에딘버러와 글라스고가 앙숙인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다만 오늘은 간단하게 몇 자만 적는다.
나는 독립 반대 진영을 지지하는 쪽이었는데, 왜냐하면, 내 기질은 회의론자에 가깝기 때문이야. 새로운 식재료나 음식을 접할 때도 효능보다는 부작용을 먼저 따지고, 인간의 윤리 문제에 있어서도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을 더 믿는 편이지. (좌우간,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야 인간 관계에서 상처 안 받고 맘 편히 살 수 있는 거다.)
생각해 봐라, 스코틀랜드가 무슨 재간으로 독립국 체면 치레를 하고 살 수 있간디? 당장 그 많은 나라에 자기네 대사관 부지로 쓸 땅 사들일 돈이나 있간디? 북해에 석유 있으니 문제 없다고? 정작 석유 나는 곳에서 가까운 지역들은 죄 반대했는걸? 경제 문제니 통화 문제니 하는 것도 이쪽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다만 이것도 보통 문제가 아닌데다, 무엇보다, 300년 넘게 같이 살면서 피가 많이 섞였다는 것도 문제. 잉글랜드에 뿌리 내리고 잘 살고 있는 스콧도 많고(고든 램지 알지?),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잉글리쉬도 많고, 잉글리쉬-스콧 커플도 많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쪽에 가족 친지를 둔 사람도 너무 많아. 이 사람들 다 반목하게 만들고 이산 가족 만들 작정이야?
스콧들은 차별 받고 있다며 밤낮 징징대지만, 자기네 현안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네 의회parliament 따로 있지, 간섭 안 받고 자기들 종교 잘 보전하고 있지, 내가 어제 BBC 통계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보니 복지 혜택도 스콧들이 잉글리쉬보다 더 잘 받고 있지, 인구 일인당 공공 자금 투입액도 스코틀랜드가 나머지 영국보다 더 높지, 대체 뭐가 문제냐? 잉글랜드의 대학생들이 어마어마한 등록금 때문에 졸업하고 나서도 한참을 허덕이는 동안 스코틀랜드의 대학생들은 무료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다, 무상의료이긴 해도 약값은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하는데, 그 약값조차도 안 내는 완전 무상의료 혜택을 받고 있었잖냐? 약국에서 약 살 때마다 나는 늘 '내가 왜 스콧들 약값까지 부담하느라 별것도 아닌 이 간단한 약을 이렇게 많은 돈을 내고 사야 하지?' 의아해 해. 스콧들은 잉글리쉬들보다 튀긴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을 더 좋아해서, 심지어 마스 바Mars bar라고 미국 스니커즈 비슷한 영국 쵸콜렛바가 있는데, 그것도 튀김옷 입혀 튀겨 먹어. 피쉬 앤 칩스 숍에서 같이 팔곤 하지. 그래서 잉글랜드보다 비만률이 더 높고 기대수명이 낮아. 잉글리쉬들도 나처럼 '내가 왜 마스 바 튀겨 먹고 있는 사람들 약값까지 지불해야 하지?' 속으로 늘 의문을 갖지만 한 나라니까 꾹 참고 세금을 낸다는 거야.
자기네 의회가 따로 있어 자기네 문제는 알아서 결정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영국 의회에서 잉글랜드의 일을 결정하는 데도 관여할 수 있다니, 잉글리쉬들 입장에서 보면 이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냐? 그러니 잉글랜드 정치인이 이런 소릴 하잖냐. "스코틀랜드 의원이 영국 의회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데 왜 영국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관여할 수 없느냐. 그렇다면 잉글랜드만의 이슈에 대해서는 스코틀랜드 의원의 투표권을 막아야 하지 않느냐."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보다 잘 살고 있었는데 잉글랜드와 연합왕국이 되면서부터 부를 다 빼앗겨 영락했다고 하면 내 이해를 하겠는데, 그게 아니라 거긴 원래 옛날부터 잉글랜드보다 못살았던 곳이야. 이건 기후, 풍토, 지리적 특성상 어쩔 수 없어. 일단 날씨가 너무 개판이야. 게다가, 유럽 대륙, 특히 서유럽이나 남유럽과 거리도 멀잖아. 주거니받거니 치고박고 하면서 교류하고 발전하는 게 잉글랜드보다 힘든 건 당연하지 않겠어? 땅만 넓지 인구는 영국 전체 인구의 8%가량밖에 안 되는데, 북유럽처럼 인구 적으면서도 잘 살 수는 있다지만 규모의 경제가 너무 안 되잖냐. 위스키 팔아서 어케 그간 누리던 복지 다 누리며 살 수 있간디? 석유가 뭐 천년만년 난다디? 오히려 북해쪽 석유는 이제 매장량이 많지 않고, 잉글랜드 어디께 새로운 가능성이 좀 보인다고 하잖나. 바다에서 꺼내 쓰는 것보다 비용도 훨씬 적게 든다 하고.
경제 쪽만 생각하지 말고 좀더 섬세하게 들여다보자고. 인구가 8%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인구 많은 잉글랜드 쪽에서 오는 잉글리쉬들의 장기를 이식 받고 새 생명을 얻는 스콧이 매년 수백 명이야. 독립해서 국경 닫히면 장기 이식 기다리는 절박한 이 사람들 어쩔 거냐? 니들이 그 심정을 아냐?
역사적으로도 잉글리쉬들이 먼저 스콧들에게 손 내밀며 우리 합치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침략한 적은 있어도. 그리고 침략은 뭐 잉글랜드 쪽에서만 했냐? 스콧들이 프랑스랑 손잡고 양쪽에서 잉글랜드를 괴롭힌 건 어디 한두 번이냐? 1707년에 합치게 된 것도 방대한 해외 시장 개척으로 잘 나가던 잉글랜드를 보고 스콧들이 덩달아 쫓아하다가 쫄딱 망해 지들이 먼저 손 내민 거고. "저기, 우리... 하,합치면 어떨까? 대신 니들이 개척해놓은 해외 시장에서 우리도 같이 재미 좀 볼 수 있게 해주라. 먹고 살기 힘들다야." 아, 이런 거였다고. 근데 무슨 일본이 우리를 강제 합병한 것처럼 합병한 줄 알고 한국 사람들은 눈깔 빨개져서 게거품을 물고 있냐?
아무튼, 회의론자에 가까운 나로서는 (영국인들도 대체로 나 같은 기질이 좀 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거고, 보통 말로는 죄 '기우'들인 거고.) 스코틀랜드 국민당 총리가 "독립하면 우리 이렇게 잘 살 수 있어." 하고 장밋빛 전망만 잔뜩 내놓고 있는 게 영 못마땅했다 이거지. 말하자면, 성형외과 의사가 부작용은 일절 설명 않고 수술만 하면 무조건 예뻐져서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꼬드기는 것과 같달까?
게다가, 독립 찬성파들이 독립 반대파를 애국심 없는 매국노 취급하는 것도 영 거슬렸고. 자기만 애국하고 있는 줄 아는 민족주의자 국뽕들을 싫어하거든. 이 점에서 나는 독립 반대파였던 고든 브라운 전 총리의 연설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았는데, "민족주의보단 우리의 애국적 비전이 더 크다고 말하라. 우린 스코틀랜드가 영국을 떠나지(leave) 않고 영국을 이끌기(lead) 바란다. 영국을 통해 세계를 이끌길 바란다." 독립파들이 하도 상대 진영을 반동분자 매국노 취급을 하는 바람에 마음껏 목소리들을 못 내고 눈치 보고 있는 상황에서 고든 브라운이 아주 열변을 토했지. 속이 다 후련해. 연설이 명문으로 구성돼 있더라고.
좌우간, 스코틀랜드의 입장은 이미 한국의 언론사들이나 블로거들을 통해 충분히 들었을 것 같아 나는 반대파와 잉글리쉬들의 입장, 그리고 내 의견을 적어봤어. 이번 투표를 지켜보면서 영국이 그래도 선진국은 맞구나 느꼈던 점을 정리해 보자면,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사실 잉글랜드나 웨일즈, 북아일랜드에도 영향을 크게 미치는 사안이니 스콧들만 투표를 하게 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영국인들이 많았지. "우리 쪽 경제에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젠데, 왜 니들만 투표해서 결정해? 니들이 합치자 해서 합쳐줬더니 왜 이제 와서 뒤통수야?" 그럼에도 기꺼이 그들만 투표를 하게 양보를 했다는 거. 나라 쪼개지는 일에 누가 이렇게 흔쾌히 투표를 하게 해주냐?
스콧들의 훌륭한 점을 꼽자면, 영국 전체의 투표 가능 연령이 법으로 최저 만 18세로 정해져 있는데, 이번 사안이 미래 세대에 미칠 영향이 워낙 크므로 대폭 낮춰 만 16세부터 투표를 하게 했다는 거. 실로 놀라운 일이지. 애들은 가라가 아니다. 봐라, 한국은 투표권을 만 19세나 돼야 준다.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만 18세에 투표권을 주고 있는데 한국은 만 19세에 준다. 일본은 한술 더 떠 만 20세고. 이거 무슨 꿍꿍이냐? 투표할 수 있는 나이를 높이면 어느 나라건 보수당에 유리하다는 건 잘 알 터. 그러니 한국과 일본은 보수당이 득세하기가 좋은 거다. 우리나라도 빨리 만 18세로 내려야 한다. 이번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에서도 아직 어려서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젊은 애들이 독립 찬성에 표를 많이 던졌다잖냐. 사실 독립 반대파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입장이었는데도 미래 세대에 미칠 일이므로 기꺼이 만 16세로 낮추는 데 동의한 거다. 만 18세 그대로 진행했으면 45%나 되는 표를 얻진 못했을 거라 보는 사람들도 많다.
투표율은 봤냐? 평균 85%다. 이거 믿을 수 있냐? 스콧들은 전세계에 자기들의 높은 정치 참여 의식을 자랑한 것만 해도 이번 투표에서 승리한 거다. 높은 곳은 투표율이 91%까지도 갔더라고.
손으로 일일이 수작업해 개표하는 것도 봤냐? 이 첨단 세상에 고생스럽게 사람이 손으로 일을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우리나라도 저 미심쩍은 전자개표 집어쳤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튼 나는 영국이 견고한 한 나라로 남게 된 것을 진심 기뻐하는 중이다. 한국에는 '영국 = 일본' 이렇게 생각하고 영국을 아주 웬수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들이 아이리쉬도 아니고, 웬 열불이냐? 영국과 일본을 같이 취급하는 건 영국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심히 불쾌한 일이다. 영국이 식민 지배할 동안 저지른 온갖 만행들을 나는 영국에 와서야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히 알게 됐는데, 그게 다 영국의 신문 방송들, 식자들을 통해서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 입으로 자기들 만행을 낱낱이 다 들추고 있더라고. 봐라, 이런데도 영국과 일본이 같냐? 그리고 식민 지배 짓은 스콧들도 함께 했는데 왜 잉글리쉬들한테만 죄를 옴팡 뒤집어 씌우냐?
근데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은 영국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고 이를 가는 게 정상인데, 희한하게도 독립을 하고 나서도 아직까지 영연방으로 묶여 있는 거 봐라. 이게 강제성이 없는 건데도 자기들이 그냥 영연방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 하잖냐. 영국 정부는 지들도 쪼들리는 마당에 몇몇 나라에 아직도 지원금을 보내고 있다 하고. 잘 살게 돼서 니들 주는 돈 이제 필요 없어, 보내지마, 하는데도 보낸다잖아.
게다가, 6.25 때 일본이 뭐 우리를 위해 한국 땅에 와서 피 흘리며 싸워 주기를 했냐? 영국인들은 자기네가 피 흘려가며 도운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살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주고 있는데 니들은 왜 그렇게 영국을 일본 취급하면서 욕을 싸지르고 있냐? 신중한 스콧들이 독립을 안 하기로 결정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존중해야지, 자존심도 없냐, 평생을 2등 국민으로 찌그러져 살아라, 악담을 퍼붓질 않나. 스콧들이 왜 2등 국민이냐? 이번 일을 두고 '머리가 가슴을 이겼다'고 평을 하는데.
어라, 주인장 영국 편들고 있는 것 좀 봐라. 유학생 유치가 이래서 중요한 거다. 한국인들아, 한국에 와 있는 유학생들한테 최대한 잘 해주고, 길거리에서 만나도 눈인사 해주고, 공부 잘하다 돌아갈 수 있도록 자알 도와 줘라. 걔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다 '친한파'가 되는 거다. 물건을 살 때도 한국산 물건을 집는 거고. 오늘은 이만 총총. 내일 정신 나면 사진도 좀 찍어 올려 드릴게. ■
▲ 스코티쉬 스콘과 잉글리쉬 클로티드 크림의 결합.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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