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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즐기는 아프터눈 티] 내 생일 본문
며칠 전에 제 생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 먹는 거 하나도 안 기쁘니 생일 상 차리는 것 따윈 안 해도 될 것 같아."
진심으로 다쓰베이더에게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오랜만에 미역국이 좀 먹고 싶긴 했다만 한국에서 미역을 미리 공수해오지 못한 탓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게다가 그날은 아는 분 음악회까지 겹쳐 여느 때와 같이 대충 차려먹고 밖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이번 생일 찻상은 어떻게 차렸을지 궁금하다"
는 가필드 님의 댓글을 보고는 아차.
그래, 명색이 차 블로거에 다과 시간 폴더까지 다 만들어 놓고 깝죽대고 있는데 이럴 때 찻상 안 차리면 언제 차리겠나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것이었습니다. 생일 한참 지나 좀 뜬금없긴 하다만 자고 있는 다쓰베이더 목을 힘껏 조르며 협박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 생일 상을 안 차렸어.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조촐한 생일 찻상도 하나 못 받았다니 말이 안 돼."
자다 깬 다쓰베이더,
생일 상 필요 없다더니 왜 이랬다저랬다 하느냐는 뜨악한 얼굴로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응."
합니다.
"내 생일 상이니 다쓰베이더가 혼자서 차려봐요. 난 안 도울 테니."
"응."
ㅋㅋㅋㅋㅋㅋ
이렇게 해서 엎드려 절 받듯 생일 찻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부지런히 움직여 장 봐 오더니 부엌에서 뚝딱뚝딱 합니다.
아이구 귀여워, 이게 뭐야! >_<
미니 쇼트브레드 위에 크렘 프레쉬creme fraiche와 오렌지 주스 섞은 소스를 얹고 라즈베리를 올린 거라네요.
"이거 어디서 보고 만든 거야?"
"몰라도 돼. 어디서 봤어."
하이고, 한입에 쏘옥, 바삭한 쇼트브레드가 소스의 수분을 머금어 촉촉하니 아주 부드러워져 있었습니다. 오, 제법이다 제법. 자기도 뿌듯한지 다쓰베이더 콧굼기가 발씸발씸하고 있었습니다.
"오, 이건?"
"응, 레몬 치즈케이크. 무스 같은 건데 이건 그냥 수퍼마켓에서 사 왔어. 다 먹고 유리그릇은 소스 그릇으로 쓰면 돼."
현명하다.
힘들게 모든 걸 다 손으로 만들 순 없지. 기성품 잘 고르는 것도 재주다. 시원한 여름 분위기의 찻상에 잼이나 클로티드 크림을 담으면 딱이다 싶었습니다.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단단의 생일이니 단단이 좋아하는 진한 쵸콜렛 케이크가 빠지면 안 되겠지요. 벨기에산 고급 쵸콜렛으로 만든 유기농 케이크래요. 참 잘했어요. ★★★★★
"으헉, 이건 또 뭐요? 오늘의 메뉴 중 가장 그럴싸해 보인다!"
"어, 이건 샌드위치나 까나페 대신 짭짤한 티푸드로 만들어본 지중해식 페이스트리. 힘 하나도 안 들었어."
눈물 난다. 아프터눈 티에 짭짤한 게 꼭 들어가야 한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아가지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가만, 영국에 있으니 영어로 합시다.
A saint's maid quotes Latin. ㅋ
냉장 퍼프 페이스트리 사다가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그 위에 토마토와 호박을 얹고 소금 후추로 간을 했다고 합니다. 호박은 필러로 얇게 저며 멋을 냈다네요. 그리고 나서는 위에 올리브 오일과 모짜렐라 치즈를 적당히 뿌려 오븐에 구워 줬다는데 '요리'한 게 아니라 그저 '조립'했을 뿐이라고 겸양의 미덕까지 보입니다.
소박한 찻상이니만큼 오늘은 시골스러운 우리의 브라운 베티 양이 출연해 수고해 주었습니다. 네스 호Loch Ness의 괴물처럼 나왔군요. 오늘의 차는 저 멀리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홍차. 아쌈과 비슷하나 아쌈보다는 좀 더 산뜻하며 순한 맛입니다. 단것들이 많았으니 가향차 대신 이런 쌉쌀한 홍차가 잘 어울립니다.
가필드 님의 무심한 댓글 한마디에 단단은 오늘도 호강을 했으니 가필드 님께 또 빚졌지 뭡니까. 찻상을 받고 보니 이제야 생일을 제대로 보낸 것 같습니다. 역시 집밥, 아니 집차가 최곱니다. 영감, 신세졌구려. 아주 맛났다오. 내 영감 생일에 꼭 복수해 드리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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