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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얇은 과자 모라비안 쿠키 본문
영국의 우정국 '로얄 메일Royal Mail' 님께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집집마다 성탄 카드를 보내 주셨다. 이번에는 우체부가 크리스마스 홀리 이파리 모양으로 눈 위에 발자국을 내고 있었으니...
국민 여러분, 올해도 행복한 성탄절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에, 성탄절을 위한 우편물 접수 마감일을 잠깐 안내해 드리자면,
국내 2등급 우편물은 12월 18일까지
1등급은 12월 21일까지
국제 우편물은 12월 4일까지이니
날짜 놓치는 일 없도록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밖에 여러 특별 서비스가 있으니 것두 참고하세요.
우리들도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하므로 12월 25일부터 28일까지는 우편물 접수를 안 합니다.
[재활용 표시] 이 카드가 마음에 안 들면 재활용으로 당장 내다 버리셔도 됩니다.
아직 12월도 안 됐는데 다들 부지런하군.
카드를 도로 접는데
외출한 사이 놓친 소포 찾아가라는 쪽지가 현관 우편물 투입구로 팔랑팔랑 떨어진다.
성탄절은 아직 멀었는데 누가 소포를?
부랴부랴 동네 우체국으로.
오랜만에 비가 안 오니 몸도 마음도 화창,
소포 찾으러 가는 발걸음은 궁금 반 기대 반에 마냥 사뿐하기만 하구나.
소포를 포장할 때는 대개 우체국에서 파는 누런 소포 종이들을 쓰지 않나. 여기 제대로 된 포장지가 곱게 둘러져 있다. 선물 받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는 나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재빨리 우리 집의 유일한 성탄 장식물인 빨갱이 화환을 얹어 재촬영에 들어갔다.
한결 낫군.
상자 옆구리를 보니 얌전히, 그러나 매우 정확히 펭귄처럼 두 손을 모은 포장지 끝자락이 보인다.
예술이다.
보낸 이는 틀림없이 꽃다운 어린 시절 백화점 포장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오랜 독일 생활로 징한 그 'German precision'을 부지불식간에 몸에 붙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베일에 가려져 있다. 두근두근.
일단 꼬깃해진 신문 좀 펴서 읽고.
"Body found: A man who likely died from a drug overdose was found late Tuesday afternoon in the back seat of a car parked in an alley in the Acmetonia neighborhood, police said. Allegheny County detectives are investigating."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다 똑같군.
여기까지는 볕 좋은 낮에 찍고 두고 나머지는 분위기를 위해 컴컴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찍는 게 좋겠다.
* * *
내용물은 놀랍게도 갖고 싶었던 스포드Spode 크리스마스 티포원과 모라비안 쿠키였다. 홍차인이 다구를 선물 받는다는 것은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다. 다구를 사겠노라 공표하면 십중팔구 가족들 중 누군가가 "티폿? 집에 있는데 또 사겠다고?" 의지를 꺾기 때문이다. 찻주전자 하나를 하루 서너 번 매일 매일 집중적으로 쓰다 보면 지겨운 감도 있지만 어느 순간 피로도가 한계에 다다라 작은 충격에 덧없이 깨져 작별을 고하기도 한다.
모든 만물에는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반죽도 쉰다는데.
세상에서 제일 얇은 과자라는 모라비안 쿠키.
손끝에서 미끄러지자마자 바닥에 납작 붙어버린 저 얇디얇은 쿠키. 황시내 씨의 <황금물고기>라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궁금해했던 바로 그 과자였다. 이민자들 천국인 여기 영국에서도 도통 찾아볼 수가 없었던 저 이국의 귀한 과자를 누군가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나니 반가움이 배가 되누나.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모라비안 쿠키는 주로 겨울철, 크리스마스 즈음에 즐긴다고 되어 있다. 계피, 생강, 정향, 올스파이스가 들어있어 매콤달콤한 것이 과연 크리스마스의 맛이다.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요즘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일이 많다지만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만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만들 수 있다 한다.
빨간 통에 든 얇은 것이 이런저런 향신료가 든 오리지날,
초록색 통에 든 것은 진한 버터 풍미의 자매품.
빈티지스러운 과자통이 썩 마음에 든다.
손으로 쓴 듯한 다양한 글꼴들을 보라.
헬베티카가 세상을 장악하기 전에는 잡지든 상품포장이든 포스터든 저마다 솜씨 좋은 이가 손으로 멋들어지게 그린 개성있는 글꼴들을 뽐내곤 했었다.
가령,
아르 누보 시절의 저 굽이굽이 포스터 글꼴들,
전후 소비에트의 날선 프로파간다 글꼴들,
공중을 향해 멋지게 휘감아 놓은 리듬체조 선수의 리본 같은
저 코카 콜라 로고 같은 것들.
커피, 차, 술, 담배, 초콜릿 같은 기호식품들, 특히 과자는 작가들에게 모종의 영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들은 대개 이들 중 한 가지에 중독돼 있기 일쑤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들렌을 먹을 때마다 마르셀 프루스트를 떠올린다. 나는 황시내씨의 수필들 덕에 바클라바를 알게 되었고 이 바스락거리는 모라비안 쿠키를 알게 되었다. 모라비안 쿠키는 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의 표지보다도 얇다.
동봉된 카드에는 시카고의 상징들로 이루어진 크리스마스 트리가 담겨 있었다. 시카고 명물인 저 스팀 핫도그와 키쉬Quiche처럼 두꺼운 시카고 피자는 죽기 전에 꼭 맛보아야 할 것들. 자세한 관찰을 위해 아래에 스캔 뜬 것을 올리니 이 기회에 시카고라는 매력적인 재즈의 도시를 대표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시는 것도 좋겠다.
더없이 풍요로운 티타임이다. 12월이 되기도 전에 훈훈한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다 넉넉한 마음의 블로그 친구 NG 님 덕이다. 선물 주시는 분, 격하게 사랑합니다. ㅋ
켁켁.
이거 암만 들여다봐도 재밌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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