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spotter

마들렌 본문

차나 한 잔

마들렌

단 단 2009. 12. 24. 04:45

 

 

 

 

홍차 깡통 모으며 즐거워하는 홍차인들처럼 양주병 모으며 즐거워하시는 애주가분들도 꽤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주로 콕테일 관련 일을 하시거나 집에서 취미로 콕테일을 즐기시는 분들로 보이는데, 이분들도 홍차인들처럼 '지름신' 운운하며 괴로워하시더군요. ㅋㅋ 하긴, 수입 독주들이 좀 비쌉니까. 무언가를 섬세하게 섞는 일을 하신다니, 겉모습의 미추를 떠나 이런 분들에게는 어떤 세련된 기운이 느껴집니다.

 

서점 가서 디저트와 제과제빵 책들을 훑어보니 '그랑 마니에'라는 오렌지 리큐어 얘기가 자주 눈에 띕니다. 이책 저책 살피며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오는 길에 동네 수퍼마켓에 들려 빨간 리본 두른 그랑 마니에 한 병을 샀습니다. 한화로 약 3만원입니다. 향수병보다는 못하지만 홍차 깡통보다는 예쁩니다. 나도 모르게 홀려서 그만 집어오고 말았는데, 술병을 이렇게 예쁘게 디자인해서 내놓는 건 법으로 강력히 금해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습니다.

 

 

 

 

 

 

 


 
모양틀을 보고 감 잡으셨겠지만, 요즘 틈날 때마다 우리 권여사님이 좋아하시는 마들렌 굽기를 이렇게저렇게 연습해보고 있습니다. 그랑 마니에를 사 온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제과점에서 마들렌만 보면 "아이구, 마들렌이네." 하고 꼭 사 오곤 하셨지요. 어릴 때 신세(?) 많이 졌으니 이제는 제가 열심히 연습해 엄마한테 맛난 빵과자를 구워 드려야죠.

 

각기 다른 레서피로 몇 차례 구워 보니, 이게 재료와 요리법은 간단해도 마음에 쏙 들게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빵과자 몇 번 굽고 나서 재료와 공정에 상당히 민감한 것이 또 이 제과제빵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어떤 요리보다도 계량이 정확해야 하고 공정에 있어서도 고수가 아닌 이상 도중에 변덕을 부린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지요. 제과제빵사분들, 재료만 좋은 걸로 깨끗이 씻어 써주신다면 참으로 존경하고 싶은 분들입니다. "고온에 굽기 때문에 괜찮아" 하고 재료 씻기와 위생에 소홀한 분들이 '아주 가끔'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벤치 마킹을 위해 프랑스에서 건너왔다는 마들렌을 우선 한번 사 먹어보았습니다. 재료가 다소 인공스러워 보입니다. 아무래도 생산의 용이함과 맛, 보존, 이윤 모두를 생각해 대체재와 첨가물을 썼기 때문이겠지요. 어디 본고장 프랑스에서 건너왔다는 제품의 재료를 한번 볼까요?

        
Wheat flour 35%
Sugar
Concentrated butter 16.5%
Fresh eggs 16.5%
Glucose-fructose syrup
Stabiliser: sorbitol
Skimmed milk powder
Lactose
Raising agents: disodium diphosphate, sodium hydrogen carbonate
Salt
Flavouring

 

레몬 맛을 내주는 레몬 제스트나 레몬 익스트랙트가 없으니 섭섭합니다. 저기 저 수상하게 보이는 'Flavouring' 안에 슬쩍 들어 있을까요? 포장 벗겨 모양을 한번 보죠.

 

 

 

 

 

 

 



노릇노릇, 황금빛 구운 색이 황홀합니다. 적당히 끈적거리면서 촉촉한 것이 식감과 맛은 더 끝내줍니다. 저렇게 많은 첨가물을 쓰고도 맛 없으면 사업 접어야죠. 레몬 맛은 안 나지만 매우 달고 고소한 게 맛있습니다. '역시 버터와 설탕의 힘이란.' 혼잣말 해봅니다.

 

집에서 마들렌 구워 드시는 분들 모양 참고하시라고 올려 본 건데, '배꼽bump'이라 불리는 저 볼록 솟은 부분이 풍만하면서도 완만한 게 아주 예쁩니다. 참, 마들렌의 어느 쪽이 앞인지 아십니까? 저는 어딜 가든 마들렌의 배꼽이 위로 올라오도록 놓은 것들만 보았는데, 사진 찍을 때는 다들 주름진 부분이 위로 올라가도록 놓더군요. 무늬가 예뻐서겠지요. 색은 배꼽 쪽이 훨씬 낫고 윤기도 돕니다. 어떻게 놓든 각자 취향껏 하면 되니 시비 걸 사람은 없겠습니다. 이 제품은 배꼽이 위로 올라와 있는데, 이렇게 놓으면 편편한 주름 쪽이 아래로 가게 돼 좀 더 안정적으로 놓이긴 합니다. 주름 쪽과 배꼽 쪽을 적당히 섞어서 사진 찍으면 되겠네요.

 

 

 

 

 

 

 



마들렌을 구우려면 우선 마들렌 틀이 있어야지요. 마들렌 레서피를 찾다가 과자를 틀에서 좀 더 쉽게 떨어내기 위해 '철판이형제'라는 물질을 쓴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형제요? 꼼꼼히 버터칠 해주고 덧밀가루 솔솔 뿌려 주었더니 잘만 떨어지던걸요. 철판보다 매끈하게 잘 떨어진다고 해서 실리콘 재질의 마들렌 틀도 써보았는데, 깔끔하게 잘 떨어지긴 해도 반죽 담은 틀이 꿀렁거려 담은 뒤 다루기가 쉽지 않고, 구운 색도 철판에 구운 것만 못한데다, 틀에 힘이 없으니 가장자리가 축 처져 모양도 제대로 나오질 않습니다. 단단히 쥘 수 없으니 씻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고, 표면이 끈끈해 타월 드라이도 할 수 없고, 마른 후에도 부엌의 먼지를 다 잡아다 제 몸에 붙여 골칩니다. 저로서는 실리콘 마들렌 틀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 힘세고 빳빳한 실리콘 틀이 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마들렌 틀 사실 분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구워져 나온 올록올록 조가비들을 볼 때마다 프렌치들의 섬세한 미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자 하나도 이렇게 앙증맞게 모양내서 먹다니요. 게다가 맛으로 치자면 바다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잖습니까? 흔해빠진 꽃모양도 아닌 조가비 모양이라니, 이런 엉뚱발랄한 사람들 같으니. 왜 조가비 모양의 틀을 채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서양 문화에 있어 조가비가 갖는 상징들이 몇 가지 있죠.

 

우선, 기독교쪽 전통으로 볼 때 조가비는 예수의 제자 사도 야고보의 상징이었습니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보세요.) 스페인의 한 구석에 있다고 전해지는 이 야고보의 무덤을 찾은 순례자들이 순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거짓이 아니라 진짜로 순례를 마쳤다는 증표를 보여주기 위해 순례지 주변 해안에서 조가비 껍질을 주워 가지고 갔다고 하죠. '순례자의 조가비Pilgrim's scallop'라고들 하고요. 험난한 여정 가운데 물그릇 밥그릇 노릇도 톡톡히 해냈다고 하네요.

 

이교도쪽 전통으로는 조가비가 '다산'의 상징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프랑스의 어떤 유명 글쟁이의 말대로 마들렌은 아스라한 옛 기억을 불러내는 묘한 마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들렌이 국내에 소개돼 인기 끌기 시작한 때가 1980년대라고 하니, 제게도 어느덧 30년 세월에 달하는 마들렌에 관한 추억이 있는 셈이네요. 흐미, 징하다, 세월.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미감과 사고방식은 정말 많이 다릅니다. 영국인들이 한 번 꼬아서 모양낼 것을 프랑스인들은 두세 번 더 꼬아 모양냅니다. 훨씬 더 장식적이죠. 영국 제과제빵의 분위기는 뭐랄까요, 장인스러운 기술이나 완벽함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닌 듯 보입니다. 주변에 널린 재료로 누구나 쉽게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고, 할머니가 티타임에 놀러온 손주들에게 별 힘 들이지 않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금방 구워 먹일 수 있는, 뭐, 그런 접근성과 대중성이 최우선인 듯합니다. 모르죠, 프로들의 세계에선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저는 이것이 개인이 하루에 몇 번씩 갖는다는 바로 그 징한 티타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참고하시라고 빈티지 레서피 두 개를 걸어 놓습니다.




르 꼬르동 블루 Henri-Paul Pellaprat 교수의 1937년 레시피


2 large eggs
60g caster sugar
¼ tsp vanilla extract
60g unsalted butter
60g plain flour
¼ tsp baking powder
Butter for the tin(s)


Preheat the oven to 210C (fan-assisted 190C)/425F/gas mark 7
and butter the inside of a 12-pocket madeleine tin.


Warm the eggs first: place them, shells unbroken, in a cup,
pour near-boiling water over them and leave for five minutes.


Warm a bowl as well, then break in the eggs, add the sugar
and beat with an electric whisk for five minutes, until thick and doubled in volume.

 

Add the vanilla and beat a moment more.


Melt the butter and set aside.


Sift the flour and baking powder together,
then very gently fold them through the egg mix, followed by the butter, until lightly and evenly combined.


Spoon some of the mixture into each madeleine pocket, filling it about halfway,
and bake for approx 12 minutes, until well risen and slightly scorched at the edges.


Remove from the oven, unmould immediately, then set aside to cool.

 

 

 


런던 리츠 호텔 아프터눈 티룸 <팜코트>의 레시피

 

2 eggs (size 3), separated
100g/4oz caster sugar
100g/4oz unsalted butter, melted
finely grated rind and juice of 1/2 lemon
100g/4 oz self raising flour

 

Oven: 375F / 190C / Mark 5
Two trays of madeleine, jam tart or muffin tins
Makes about 24 madeleines


Lightly butter the madeleine tins.


Beat the egg yolks and sugar until they are thoroughly mixed but still bright yellow.

 

Beat in the melted butter, lemon rind and juice, then sift the flour over the surface and fold in.


Stir the egg whites with a fork; then beat them well into the mixture.


Spoon a small amount of the mixture into each mould and bake in the centre of the oven for 20 minutes.

 

Cool slightly in the moulds before gently easing out onto wire racks to cool completely.

 

These are best eaten very fresh.

 




그런데 오늘.
권여사님 좋아하는 마들렌을 맹연습 중이라는 낭보를 전하려 한국에 전화를 했더니 받자마자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얘, 네 블로그 보고 삘 받아서 나 오븐 샀어! 너희들 어릴 때 빵 구워 주던 생각도 나고 해서 다시 베이킹 좀 해보려고. 마들렌도 직접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레서피 아무거나 좀 찾아서 올려 보렴."


아니?

-_-'
이런 김새는 일이 또 있습니까.
훗날 정성껏 구운 마들렌으로 노모 봉양할 계획은 집어치고 당장 마들렌 틀이나 하나 사 드려야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