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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내 생애 가장 맛있었던 밀크티 한 잔

단 단 2009. 12. 31. 03:44

 

 

 

 

 

정확히 12월 18일 새벽 1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과묵한 우리 집 다쓰베이더,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몹시 초조하고 긴장된 얼굴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왼쪽 가슴이 뻐근해. 며칠 전부터 쿡쿡 쑤시더니 이제는 점점 주변으로 증상이 번지면서 짓누르듯 답답하기까지 해. 팔도 저리기 시작했어."


무엇이? 그건 전형적인 심근경색 전조증상 아니냐!

 

영국의 국가 의료 서비스를 'National Health Service', 줄여서 NHS라 부른다. 영국에서 의료 서비스는 공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국가가 국민에게서 걷은 세금으로 추가 진료비 청구 없이 평등하게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가 이 NHS다. 세금을 낸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걸 공짜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아픈 사람이면 추가 비용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흠모할 만한 제도라 할 수 있겠다. 아픈 사람을 당장 눈 앞에 두고 돈 있냐 없냐를 물어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들 말한다. 마이클 무어의 <Sicko>에서 본 그대로다. 오늘은 세금을 흔쾌히 낼 만한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어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나 같은 '기우'씨들한테는 이런 영국의 제도가 나쁘지 않아 보인다. 6개월 이상 공부하기 위해 머무는 유학생들도 무료 혜택을 받는다. 하여간, 우리는 그저 조언이나 얻을까 해서 999에 전화를 걸어 차분하게 증상을 얘기했는데 전화 받는 의료 상담원이 오히려 더 심각하다. 사람을 당장 보낼 테니 문을 열어 놓고 있으란다.

 

2분이 좀 지났을까. 정말로 구급요원paramedic 한 명이 우리 집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믿을 수 있나? 3분도 안 돼 사람이 왔다니? 옆 빌라 주차장에 있던 사람이 슬슬 걸어서 문 따고 우리 집까지 올라오는 시간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등 초를 다투는 질병은 무조건 응급 서비스 1순위라서 그렇단다. 구급요원이 도착한 지 2분이 안 돼서 이번엔 커다란 구급차까지 다 왔다. 아이고 이런, 일이 점점 커지는구나.

 

너무 일찍 사람이 오는 바람에 미처 거실을 치워 두지 못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어수선한 거실에서는 먼저 도착한 구급요원이 문진과 촉진을 했고, 집 앞에 주차돼 있는 구급차 안에서는 심전도와 혈압을 측정했다. 별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 응급실로 가자고 한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여하튼 우리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는 마음에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갔다. 우리가 긴장할까봐 구급대원들이 구급차 안에서 이런저런 농담을 해준다. 반은 알아듣고 반은 구급차 창문 너머로 날아간다.


심장에 이상이 생긴 사람은 혈액내 어떤 성분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10시간 동안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너댓 번의 혈액 검사를 해야만 한단다. 오랜 관찰 결과 심장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 폐에 이상이 생겼을 때에도 비슷한 증상이 올 수 있으니 이번에는 폐 검사를 해보잔다.


아,아니, 그냥 집에 가도 되는데, 이거 너무 미안하잖나;;

 

그러는 동안 다쓰베이더 침상에 다녀간 의사가 모두 다섯 명이나 되었다. 간호사도 의사수만큼 다녀갔다. 의사들은 다들 한결같이 15분 이상, 길게는 30분씩이나 달라붙어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몸 상태를 체크했다.


총 18시간 동안 다쓰베이더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나는 꼼짝없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그 긴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급히 따라 나오느라 책이고 뭐고 시간 때울 것을 아무 것도 챙겨 오질 못해 우두커니 다쓰베이더 침대 옆에 앉아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과 냉기를 견뎌 내고 있었다. 죽을 지경이었다.


이상은 없어 보인다고 하지만 걱정과 서툰 영어로 의사와 소통해야 하는 부담까지 겹쳐 피곤이 엄습, 얼른 집에 가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 자고 싶은 생각만이 굴뚝같을 때였다. 멀리서 달달달 손수레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그락거리는 찻잔과 받침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Tea, sir?"
병원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환자들 침대마다 홍차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묻는다. 아니? 이 응급실에서까지 환자들에게 홍차를 제공한단 말인가.


우리 차례가 되었다.
"Tea, sir?"
추위와 긴장에 떨다가 홍차 향에 목이 메인 다쓰베이더와 단단,
느꺼운 나머지 떨리는 목소리로
"Pleeeease!"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낯설고 긴장된 곳에서 기나긴 고생의 와중에 설탕과 우유를 넣은 진한 영국식 밀크티를 한 잔씩 얻어 마셨다. 아아, 그 때의 그 김 모락모락 나는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영국식 밀크티의 맛이란.

 

별 문제 없으니 새해부터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운동도 좀 하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고 우리는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병원 문을 나섰다. 6개월 이상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 맞느냐, 여권과 비자를 보여 달라, 신분을 밝혀라, 따위의 어떤 요구도 없었다. 18시간 동안 다쓰베이더는 그저 아파서 도움이 절실한 가련한 응급환자였을 뿐이다. 단단이 찌르는 듯한 고통에 옆구리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다 한국의 대형 병원 응급실을 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새파랗게 젊은 응급실 당번의사, 접수 창구 옆에 서서 하는 말이

"만일 진찰해 보고 별것 아니면 진료비 몇 배로 내셔야 합니다."

이런 오라질, 내가 이 나이에 꾀병으로 새벽에 응급실 오게 생겼냐.
(결석이었다. 결석은 응급 상황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신기하게 생각했던 건 바로 차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이었다. 그저 일상 중에 '매우' 즐기는 음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이들에게 홍차는 단지 기호식품이 아니라 물이나 공기와 같은 필수물질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열 여덟 시간 동안 홍차 수레가 모두 네 번 다녀갔다. 따뜻한 식사도 물론 무료로 제공됐다.


한국에서는 사람의 몸 상태와 질병 유무에 따라 어떤 음식은 먹어선 안 되고 커피나 홍차 같은 카페인 성분이 든 음료는 금해야 한다는 식의 말들을 많이 한다. 몸에 좋으니 먹어야 할 음식도 많고 먹지 말아야 할 음식도 많다. 어제까지 몸에 나쁘다고 알고 있었던 음식이 방송에서 한 번 떠들고 나면 오늘은 갑자기 만병통치약으로 변하기도 한다. 즐긴다기보다, 음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건강이나 정력과 연결되기 일쑤다. 영국에서 이 카페인이 든 영국식 밀크티는 환자든 임산부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마치 물처럼 마시는 그 무엇이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앉아 홍차를 마신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일수록 홍차가 더 필요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심장병이 의심돼 병원 응급실에 온 환자에게도 열심히 홍차를 제공한다. 추위에 떨면서 구걸하고 앉아 있는 노숙자에게 테이크어웨이 홍차 한 잔 사다가 손에 쥐어 주고 가는 사람도 다 봤다. 정말 재미있지 않나? 영국인들의 홍차 사랑이 이 정도다. 다들 카페인 중독으로 평균수명이 한 50세쯤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거리엔 허리 꼿꼿이 세우고 특유의 영국식 블랙 유머 구사하며 돌아다니는 팔순 노인들 천지다. 내 생각엔 우리 한국인들은 아무리 좋은 음식 찾아 먹어도 고놈의 홧병 때문에 제 명대로 못 사는 게 아닌가 싶다.


하여간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말로만 듣던 그 유럽의 의료 서비스를 경험해 볼 수 있어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 이렇게 블로그로 기록을 남겨 둔다. 이 외국인 홍차 애호가 부부에게 영국에서 홍차에 관한 좋은 추억이 하나 생긴 셈이다. 새해에는 모두 차나 커피를 적당히 즐기면서 여유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사시길 바란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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