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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과 세계 음식

코쟁이들이 생각하는 비빔밥

단 단 2013. 9. 9. 04:33

 

 

 

 

 

 

유기에 참 얌전하게도 담긴 비빔밥이네요. 그립습니다. 지난 정부 때 줄기차게 추진했던 한식 세계화. 보기에 우선 예쁘고, 반찬 늘어놓지 않아도 되고, 번거롭지 않으면서도 영양이 비교적 골고루 갖추어졌다고 판단돼 비빔밥이 그 중심에 놓이게 되었지요.

 

 

 

 

 

 

 

 

 

작년에 런던에도 <비비고>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직 가 보지는 못 했습니다. 비빔밥집 이름으로는 최적이라 생각했는데, 차림표와 방문기들을 살펴보니, 어라? 비빔밥 전문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걸요?

 

대기업 프랜차이즈 식당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외국에 있다 보니 우리 비빔밥 많이 사랑 받았으면, 하고 내심 바랍니다. 서양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해외에 있는 <비비고> 비평뿐 아니라 비빔밥 전반에 대한 의견들을 누리터에서 종종 찾아 보곤 하는데요, 대체로 반응들이 좋긴 하나 이들이 말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읽어 보니 문화의 차이가 엿보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 했던 부분들도 돌아볼 수 있어 재미있더군요.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단단이 한번 분석하고 첨언을 해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점들이 비빔밥 경험자들 사이에서 언급이 되곤 합니다.

 

채식주의자의 관점에서는 이게 채소가 다양하게 많이 들어 있어 마치 채식주의자를 위한 음식 같아 보이나 결정적으로 쇠고기가 들어가므로 곤란. 고기 빼고 내준다 해도 양념 고추장에 고기를 넣는 경우가 많아 어쨌거나 곤란.


그렇다고 모태 육식동물인 서양인들이 만족할 만한 양의 고기가 든 것도 아니면서 설상가상 제대로 된 고기가 아닌 갈린 고기가 들었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 "애걔? 고기가 양도 적고 왜 이렇게 부실해?"라고 불평하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섬세하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동양인들은 본래 코쟁이들처럼 한 끼에 그렇게 많은 양의 고기를 무식하게 자기 접시 위에서 쑹덩쑹덩 창칼로 썰어 먹지 않으며 대개는 얇게 저며 멋들어지게 양념하고 조리한 것을 젓가락으로 사뿐하게 집어먹는다는 문화적 차이를 모르는 데서 오는 불평이라 하겠다. 떡국이나 비빔밥에서처럼 고기가 심지어는 고명으로 찔끔 올려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 턱이 없으니 그런 불평이 나올 만도 한 것. 이들도 '파테pate' 같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심하게 짓뭉개진 고기를 먹긴 하나 일반적으로는 간 고기를 수상히 여기며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요리에 구심점이 없다. 비벼 놓은 비빔밥을 가만 들여다보면 음식에서 왕노릇하는 중심 재료가 없어 특징이 없어 보인다. 이름에서 벌써 알 수 있듯 비빔밥은 특정 재료가 아닌 '비빈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재료들이 다들 고만고만한 것들만 올라온다. 간이 안 된 맨밥, 짠 스튜, 지리멸렬한 작은 그릇의 반찬들만 잔뜩 올라오는 한식 백반도 그래서 서양인들한테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 하는 것이다. 육회를 '듬뿍' 얹은 육회 비빔밥 같은 것은 특색 있으니 예외.


서양인들은 고급 유기에 담긴 정갈한 비빔밥보다는 '지글지글' 터프하기 짝이 없는 돌솥비빔밥을 좀 더 흥미로워 한다. 바닥에 눌은 '크리스피 라이스'에 중독된 서양인도 있다 하니 서양인 친구와 비빔밥 먹을 일이 생기면 돌솥비빔밥을 권해 보자. 한국에서는 전골 집이나 닭갈비 집에서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양념밥 서로 더 먹겠다고 투닥거린다는 얘기도 꼭 해주자.

 

런던 버스에 아무리 비빔밥 광고를 붙여 대도 영국 전역에 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한식당 자체가 드문데다, 그렇다고 집에서 정통 비빔밥을 해먹기엔 재료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도 문제. '익죠틱exotic'한 나물들은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인데다 표고shiitake mushroom는 비싸기 짝이 없으며 아직도 한국 고추장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다. 단단이 사는 동네에는 <웨이트로즈>, <세인즈버리즈>, <아스다>, <테스코>, <알디>, 아시안 수퍼마켓 등이 즐비하나 고추장 파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중국, 일본, 동남아 식재료는 흔하다.

 

비빔밥 하면 사진에서처럼 한가운데에 샛노란 달걀 노른자가 올라온 것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런던 <비비고>에서는 살모넬라가 염려돼서인지 이를 기본으로 올리지 않고 달걀 프라이를 따로 돈 내고 선택하게 하는 모양이다. "왜 비빔밥에 달걀 노른자 안 넣어 줘? 내가 한국 여행 때 먹어 봐서 잘 아는데, (으스대기는 ㅋ) 가운데에 반드시 노른자가 있어야 오쎈틱한 비빔밥이라고!"

 

그런데 또, 첫 사진에서처럼 뜨거운 돌솥비빔밥이 아닌데 생 노른자를 그냥 올렸다간 손님들한테 뭇매 맞기 일쑤다. "당신들 정신이 있는 거야? 임신한 와이프와 아이들 데리고 왔는데 날 달걀을 이렇게 얹어 내면 어쩌자는 거야!" 진퇴양난

 

어떤 <비비고> 지점에서는 소스를 저 파스트 푸드점에서 내는 것 같은 작은 비닐 파우치에 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서양인들은 이게 또 너무 격이 없다고 여긴다. 값도 싸지 않은 음식점에서 내가 왜 이런 비닐봉지 소스를 받아야 하냐는 것이다. 동의함

 

"어? 이거 어떻게 먹는 거지?"
먹는 법이 의외로 까다롭다. 비비는둥 마는둥, 소스도 넣는둥 마는둥, 심지어 비비지 않고 나물을 소스에 찍어 먹는 사람도 다 있으니. 마찬가지 이유에서, 구절판도 예쁘기는 하나 서양인들한테 썩 인기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젓가락질 서툰 사람들이 그 많은 재료들을 어떻게 일일이 옮겨 쌈을 쌀 수가 있겠나. 포크로 찍어 옮길 수도 없고. 한국에서는 새색시들이 집들이나 명절에 열심히 구절판 만들어 올리는데, 먹을 때의 번거로움은 둘째치고, 사실 공 들인 것에 비하면 내 입맛엔 아주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비빔밥은 좋아함) 월남쌈, 베트남의 '고이꾸온'은 영국에서도 인기가 많은데, 먹는 사람 편의를 위해 미리 다 싸서 나온다.

 

서양인들이 한국의 비빔밥을 처음 접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저 스페인의 빠에야paella나 영국의 케저리kedgeree, 인도의 비리야니biryani, 미국 남부의 케이준cajun 라이스, 잠발라야jambalaya 등을 떠올리며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이들 모두 맛난 고기나 해산물이 넉넉히 들어있는데다, 처음부터 먹기 좋게 섞여 나오는 쌀요리이다 보니 비빔밥에 육한 것이 부족하다 느낄 수 있겠고 비비는 일 역시 번거로워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비빔밥도 원래 미리 비벼서 상에 올렸다는 문헌 증거가 있다. 이 글을 한번 읽어 보시라. ☞ 비빔밥은 '발명된 전통'

 

고로, 비비고 난 뒤의 모습이 흉해서 외국인들에게 어필하지 않을 거라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위에 언급한 쌀요리들말고도 범벅이 되어 나오는 음식은 전세계에 널리고 널렸으므로. 비비고 난 뒤의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비비는 행위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비빔밥을 꼭 알려야 쓰겠다면 미리 비벼서 내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호기심에 한 번은 사 먹어 보는데 왜 다시 찾지는 않는 것인가. 맛있으면 비비는 번거로움도 마다하고 찾을 텐데. 맛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외국 쌀요리들은 재료도 실할 뿐더러 고기나 해산물로 낸 육수와 채수 등에 생쌀을 넣고 익히는 방식이기 때문에 완성된 밥에서 깊은 맛이 난다. 비빔밥에도 고추장의 깊은 장맛이란 게 있기는 하나 재료의 맛이 푹 밴 이들 밥맛에는 미치지 못 하는 것이다.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책에 담긴 비빔밥입니다[4인분]. 아마 한국의 양념갈비, 돌솥비빔밥, 닭갈비 먹은 뒤 볶아 주는 양념 볶음밥 등에서 두루 영감을 받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한 것 같은데, 사진을 유심히 보십시오. 위에서 말한 문제점들의 해결책이 반영돼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영국인들을 위한 쉬운 조리법이니 우리 한국인들 또 '오쎈틱'하지 않다고 씩씩거리면 안 됩니다.

 

큼직하게 썬 실한 바베큐 양념 쇠고기
익힌 달걀 (수란 poached eggs)
나물 구하기가 힘들어 대체재로 넣은 사보이savoy 양배추, 버튼 머쉬룸, 홍고추 (영국에서 흔한 재료들임)
고추장 구하기 힘들어 대체물로 넣은 바베큐 소스, 칠리 소스, 간장, 달걀 노른자
돌솥 대신 사용한 빠에야 팬 (바닥에 눌은 밥은 이들에게도 아주 매력적임)
음식을 철저히 비벼 먹는 습관이 없는 코쟁이들을 위해 아예 처음부터 야무지게 비벼 조리
한국 잠깐 방문했을 때 간파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깨 뿌려대는 한국인들의 습관을 반영, 수란과 밥 위에 깨가 솔솔 ㅋㅋ

 


참, 왜 이 블로그 주인장은 '코쟁이'라는 인종차별적인 단어를 줄기차게 고집하고 있는가?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과 유학생들, '째진 눈slit-eyed'이라고 놀림 받는다면서요? 그 소리 듣기 싫어 부리부리한 '교포 화장'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소심한 복수 차원에서 제가 대신 코쟁이라 부르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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