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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은 설 하나만 쇠는 게 좋을 듯 본문
▲ 우리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한과. 꺄오.
내 시부모님은 겉치레나 체면을 중시하지 않는 합리적인 분들이다. 며느리들한테도 예의 갖추시고 절대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결혼 15년째인데도 나는 명절증후군 같은 건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다. 명절이라고 법석 떨고 고생해 가며 음식 잔뜩 장만해 먹는 것도 못 하게 하신다. 아들들이 다들 먼 곳에서 부모님 댁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처지라 오히려 손수 조촐하게 음식을 장만해 놓으시고 우리를 손님 맞듯 기다리신다. 시동생들도 다들 경우가 바르고 교양이 있다. (정초부터 시댁 자랑이냐?) 그래서 나는 설움에 북받친 며느리들의 명절 사연을 들을 때마다 이게 실화인가 싶다. 우리나라엔 참 이상한 노인들이 많구나. 아니 왜 남의 집 귀한 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홀대를 해.
"명절증후군? GR하고 자빠졌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아무 말 않고 다 감내하셨구만, 요즘 젊은 년들은 게으르고 싸가지가 없어." 하는 꼰대들 꼭 있던데,
옛날 사람들이 아무 말 않고 묵묵히 해냈다고 해서 다 옳은 일이고 미덕이고 전통이냐?
이런 말 하는 사람들 집에 며느리로 들어간 이들이 바로 그 명절증후군 앓는 이들 아니겠나.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한국은 추석 없애고 설 하나만 쇠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온 국민이 명절 두 번 치르느라 몸 상하고 마음 상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것 같아 하는 소리다. 남자들도 장시간 운전하고 벌초하고 이런저런 무거운 짐 나르느라 힘들지 않나.
여기 영국 여자들이 갖는 명절 느낌이란 게 어떤 건지는 이방인인 나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어쨌거나 한국 여자들의 노동 강도와 정신적 스트레스 수준보다는 훨씬 낮아 보인다. 뭐, 여기도 고부 갈등 같은 게 아주 없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그건 개인적인 인간 관계 문제지, 한국에서처럼 불평등한 사회 인식이나 제도 때문은 아니잖나.
영국에서도 자식들이 크리스마스 때 부모님 댁에 찾아가 먹고 놀다 온다. 그런데 며느리가 시댁에 미리 가서 자기 집 부엌도 아닌 데서 몇날 며칠씩 음식 장만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 본 것 같다. 시부모가 너무 늙어 기력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찾아오는 자손들을 손님으로 생각해 시부모가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사실 이게 맞지 않나?) 자식들은 부모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선물 나누고 놀다가 뒷정리나 좀 돕다 오고.
나는 명절증후군도 겪어 본 적 없고 시가 식구 보는 것도 반갑고 다 좋지만, 어쨌거나 명절에는 평소에 안 들던 돈이 드니 힘들기는 하다. 가족끼리 선물 나누고 조카들 세뱃돈 주고 음식 장만하는 데 돈 쓰는 건 그래도 가족이니 괜찮은데, 가뜩이나 지출 많은 명절에 가족 외의 사람들까지 챙겨야 하니 그게 힘들다. 우리 한국인은 직장 상사, 고용주 또는 직원들, 거래처 갑들, 애들 선생, 내 선생 등 명절에 인사할 사람이 좀 많냔 말이지. 그러니 그냥 한국은 명절을 일년에 설 하나만 쇘으면 좋겠다. "일년에 딱 두 번인데 그것도 못 하냐?" 소리 하는 남자들아. 명절 두 번에, 양가 어른들 생신 네 번에, 어버이날 양쪽 챙기고, 각종 제사까지 치러야 하는데, 당신들도 힘들지 않나. 추석을 없애기 쉽지 않으면 설에는 양쪽 부모님 찾아 뵙고 추석에는 여행을 가거나 조용히 쉬는 것도 좋지 않겠나.
제사나 차례 음식도 그렇다. 원래 양반 종가에서 시동생들도 어려워 하는 막강 권력을 쥔 맏며느리가 하인들 감독해 부려가며 장만하던 거라며. 그걸 여염집이 쫓아하려니 부릴 사람은 없고 죄 며느리를 종처럼 부리고 있는 것 아닌가.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그토록 몸과 마음이 힘들다면 명절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면 또 "그건 명절 탓이 아니라 요즘 젊은 년들의 썩어빠진 정신 탓이지." 하겠지. 자손들 생각해 제발 죽기 전에 제사나 간소화하시길. 없애면 더 좋고.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 전통은 개뿔, 복잡한 가족 구성원간 호칭과 제사, 그거 다 중국에서 온 거드만. 제사 안 지내는 코쟁이들, 자자손손 잘만 산다. 교양 있고 덕망 있는 집은 며느리 힘들게 하지 않는다. 며느리가 '분노 게이지 만땅'에 힘들어 죽상 하고 있으면 손주들도 잘 될 턱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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