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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치즈 ◆ 스티첼튼 Stichelton 본문

영국 치즈

영국 치즈 ◆ 스티첼튼 Stichelton

단 단 2015. 4. 19. 01:00

 

 

 

 잉글랜드 노팅엄셔 Nottinghamshire, England

 

 

 

 

 

 

 

 

 

 

 

 


영국 정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생긴 '웃픈' 일
오늘 소개해드릴 치즈는 치즈 애호가들 사이에서 '원조' 스틸튼으로 여겨지는 스티첼튼이라는 치즈입니다. 법이 정한 스틸튼 생산지에서 스틸튼 제법과 똑 같은 제법을 써서 만들지만 스틸튼이라고 이름 붙여 팔 수 없는 이 기막힌 현상황은 놀랍게도 영국 농무부가 1980년대에 시행했던 '뻘짓'에 기인합니다. 당시 유제품으로 인한 리스테리아균 감염에 지나친 노이로제를 갖고 있었던 영국 농무부가 위해 요소를 없앤답시고 전통 치즈를 만드는 농가들에게 예로부터 써 왔던 숙성실의 나무 선반을 모두 스테인레스 스틸으로 바꾸게 하고 생유로 만들던 치즈들을 살균유로 바꾸도록 집요하게 압력을 가하며 괴롭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989년 이전까지만 해도 전통 방식에 따라 생유로 만들어지던 스틸튼 치즈가 정부의 압력에 굴해 살균유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기준을 가지고 유럽연합에 PDO를 신청해 스틸튼의 자격 요건 중 하나로 "저온살균유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규정이 붙게 되었습니다.


스틸튼은 전통 치즈입니다. 저 캬라멜 맛 나는 노르웨이의 갈색 염소젖 치즈처럼 제조법이 아예 처음부터 동물의 젖을 끓여 만드는 걸 요구하는 게 아닌 이상, 치즈란 건 애초 살균하지 않은 생유를 써서 만들었을 게 분명하죠. 옛 시절에는 살균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하여 '전통 치즈인 스틸튼을 살균유로 만드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의문을 품은 영국의 아티잔 치즈 판매상 <닐스 야드 데어리Neal's Yard Dairy>의 대표와 한 치즈 장인이 의기투합해 다시 생유로 스틸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기간 애쓰고 널리 홍보한 덕에 이제는 이 '원조' 스틸튼에 애호가가 많이 생겼고 정부에도 탄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정부에 제출한 개정 신청서가 유럽연합까지 도달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정부의 압력에 굴해 하는 수 없이 살균유를 쓰게 된 기존 스틸튼 생산자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니 문제가 좀 복잡한 모양입니다. 추이를 좀 더 두고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럽 연합의 PDO 제도란 지역 특산 식품의 전통 유지에 관한 것이지, 식품 위생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식품 위생은 이것과는 별도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요.

 

 

미국의 생유 치즈 정책과 유럽의 치즈 생산자들
현재 유럽 치즈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은 미국입니다. 유럽의 (공장제) 신생 치즈들은 대부분 살균유를 써서 만들고 있지만 전통 치즈들은 전통 제법에 따라 생유로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유럽연합 PDO[영어 표기일 때는 PDO, 불어 표기일 때는 AOC] 규정에 아예 '생유를 쓸 것'이라고 명시된 치즈들이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최대 수출 시장인 미국이 60일 미만 숙성된 생유 치즈는 수입을 금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은 생유 치즈 자체가 아예 수입 불가.) 리스테리아균 감염을 우려해서인데, 사실 유럽에서 생유로 만든 전통 치즈의 리스테리아균 감염 발생 빈도는 극히 낮은 편이고, 오히려 최근 미국에서 살균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문제를 일으켜 몇 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죠. 생유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살균유 제품이라도 생산, 유통, 보관상 주의를 게을리 하면 얼마든지 리스테리아균이 번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유제품만의 문제도 아니고요.

 

영국은 알다시피 '하드 치즈의 왕국'이라 어차피 60일 이상 숙성된 치즈들이 많아 생유로 치즈를 만들어도 수출에 타격을 덜 받습니다. 브리나 꺄몽베흐 같은 흰곰팡이 연성 치즈와 염소젖 숙성 신선aged fresh 치즈들을 주로 생산하는 '어린 치즈 왕국'인 프랑스는 미국의 '생유 치즈 60일 이상 숙성 법'에 발목을 단단히 잡히고 있습니다. 더 큰 시장을 노려 프랑스 전통 치즈들에도 저온살균유로 만든 것들이 따로 생산되고 있는 추세인데, 이 때문에 '정통파'들과 미국의 치즈 애호가들이 불만이 많아요. 정통파들은 "살균유를 써서 우리 전통 치즈의 본질을 훼손하다니!" 툴툴, 미국의 치즈 애호가들은 "우리 미국인들은 늘 죽은 치즈만 먹으라는 소리냐!" 툴툴. '죽은 치즈'라고 하는 이유는, 살균을 하면 유해균만 죽는 게 아니라 치즈 맛을 복잡하고 풍성하게 해 주는 각종 유익한 미생물이 같이 죽기 때문입니다.

 


저온살균유 치즈와 생유 치즈
저온살균유로 만든 치즈와 생유 치즈는 과연 맛 차이가 그토록 많이 나는 걸까요? 생산자들과 전문가들과 애호가들은 그렇다고들 입을 모읍니다. 저는 똑같은 조건에서 만든 저온살균유 치즈와 생유 치즈를 나란히 놓고 비교 시식해 본 적이 없어 차이를 잘 모릅니다. 어떤 치즈는 생유 치즈로만 먹어 보고 또 어떤 치즈는 저온살균유 치즈로만 먹어 봤으니 비교가 불가능하죠. 체다, 브리, 꺄몽베흐 같은 유명 치즈들은 생유로도 먹어 보고 저온살균유로도 먹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산자가 다르니 맛의 차이가 원유의 살균 여부에서 오는 건지, 생산자별 실력 차이에서 오는 건지, 숙성 정도에 따른 건지, 저로서는 판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국의 ☞ 턴워쓰 같은 치즈는 살균유로 만들었지만 본고장 생유 꺄몽베흐를 능가할 정도로 기차게 복잡한 맛이 나면서 맛있거든요. 일단, 치즈 맛은 살균 여부보다 장인의 솜씨가 더 많이 좌우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솜씨 좋은 장인이 생유까지 써서 만든다면? 그건 훨씬 더 맛있을지 모르죠. (한국의 매일유업은 꺄몽베흐를 만들기 위해 저온살균도 아니고 원유를 무려 97˚C의 초고온에서 50분간이나 살균을 한답니다. 포장에 써 있어요. 기절 초풍.)

 


저온살균유로 만든 스틸튼과 생유로 만든 스티첼튼
제가 영국 와 살면서 가장 많이 사 먹은 치즈는 바로 스틸튼입니다. 한국인들이 집에 항상 김치를 두듯 여기 사람들은 체다를 두고 쓰고, 우리가 된장 먹듯 스틸튼을 먹습니다. 스틸튼은 맛도 꼭 우리 된장 같아요. 다쓰 부처는 둘 다 블루 치즈 애호가라서 스틸튼을 안 떨어뜨리고 항상 냉장고에 두고 있습니다. 생산자별로도 거의 다 맛을 보았고, 연중 수시로 사 먹기 때문에 숙성 기간과 계절 변화에 따른 뉘앙스 차이도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닐스 야드 데어리에서 사 온 이 '원조' 스틸튼인 스티첼튼은 과연 어떤 맛일까요? 먹어 보니 수퍼마켓 스틸튼 중 가장 풍미가 강한 것들과 비교를 해도 강도가 훨씬 셉니다. 우선, 치즈 색이 더 진하고 여러 색으로 얼룩덜룩 복잡한 걸 봐서 수퍼마켓 스틸튼들보다는 숙성이 더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푸른곰팡이가 핀 블루 스틸튼은 숙성 기간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을 합니다.


 Blue Stilton: 6주~12주 숙성
Mature Blue Stilton: 10주~15주 숙성
Vintage Blue Stilton: 15주 이상 숙성

 

제가 닐스 야드 데어리에서 사 온 스티첼튼은 아마 '머추어'나 '빈티지'급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살 때 숙성 기간을 미처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대개는 12주에서 14주 숙성을 시킨다고 합니다. 수퍼마켓 스틸튼들도 무시무시하게 생겼는데 이건 외모가 그보다 훨씬 더 거칠어 보여 마치 땅 속에서 캐낸 치즈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푸른곰팡이 치즈를 깨작거리며 겨우 먹는 분들은 엄두도 못 낼 겁니다. 외모, 맛, 향, 모든 면에서 더 거칠고raw 덜 '문명화'돼 보입니다. 심지어 푸른곰팡이 핀 어떤 부분들은 마치 송충이 너댓 마리가 으깨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푸른곰팡이 색이 푸르기만 한 게 아니라 몇 가지 색으로 알록달록해서 더 그렇게 보여요.


기웃이: 꽥! 자기만 맛보고 남들 못 먹게 하려는 수작!
단단: 아니야~ 진짜 송충이 짓뭉개진 것 같다니까? 어허, 고건 사진을 못 찍었네.

 

맛은 매우 복잡하고 먹는 곳마다 다 달라 글로 표현하기가 좀 힘듭니다. 같은 제법으로 만들지만 우유를 생유로 쓰느냐 저온살균유를 쓰느냐의 차이가 바로 이런 건가 봅니다. 치즈 전문가들과 애호가들이 '저온살균유 치즈는 맛이 단순하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맛들이 났습니다:

 

내장과 대가리 딴 국물용 큰 마른 멸치를 기름 없이 냄비에 따닥따닥 볶아 국물 맛을 낸 다소 강한 맛의 집된장찌개에서 국물에 불은 멸치와 메주콩을 동시에 씹었을 때의 맛

 

적포도주 짜내고 남은 포도 찌꺼기must의 쏘는 단맛 (머스트가 덕지덕지 붙은 이태리 치즈를 먹어봐서 맛을 앎.)

 

퐈~한 금속성 매운 맛


해태 참크래커풍의 고소한 맛


곰팡내와 오래된 나무 냄새를 합친 것 같은 거친 자연의 맛과 흙맛

 

카리스마 넘치는 맛있는 치즈입니다. 블루 치즈 애호가들께 추천합니다. 수퍼마켓 스틸튼들보다는 좀 더 짠 것 같았는데, 숙성 기간이 더 길고 풍미가 강해서 짜게 느껴지는 건지, 실제로 소금이 더 들어 짠 건지 감이 잘 안 옵니다. 참고로, 스틸튼은 100g당 소금이 2g을 넘지 않습니다. 세계 유명 블루 치즈들 중 영국 스틸튼이 가장 덜 짜죠. 메주 향이 많이 나긴 하나 전반적으로는 스틸튼보다 단맛이 전면에 많이 드러납니다. 스틸튼과 마찬가지로 크래커 위에 올려 포트port와 함께 즐겨도 좋고 요리에 두루 활용해도 좋습니다. 활용법은 ☞ 스틸튼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생유 치즈라서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해외에 계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본 모습에 더 가까운데도 스틸튼이라 불릴 수가 없다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원래 스틸튼마을의 옛 이름이 스티첼튼이었다고 하니 나름 적절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맛있는 치즈이니 유럽연합이 개정 신청을 거부해 스틸튼으로 편입되지 못 해도 괜찮겠는걸요. 그냥 이 상태로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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