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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은 왜 발을 밟히고도 쏘뤼라고 하는가 본문
▲ 청바지가 참 잘 어울렸던, 60대쯤 돼 보이던 어느 영국 여인. <웨이트로즈> 수퍼마켓에서.
영국인들은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를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므로 영국 가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 와 살면서 가만히 관찰해보니 여기 사람들은 이 두 표현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쓴다. "고맙습니다"는 정말 고마워해야 할 상황에서 쓰기 때문에 별로 특이할 게 없는데 "미안합니다"는 좀 희한하다. 미안해해야 할 상황에서뿐 아니라 이들은 자기가 사과를 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 발을 밟히고도 미안하다고 한다. 밟은 사람은 난데?!
수퍼마켓에서 트롤리(영국에서는 카트cart가 아니라 트롤리trolley라고 한다.)를 끌고 매장을 여기저기 누비며 장을 보다 보면 때로 남의 트롤리와 내 트롤리가 닿을 때도 있고, 상품 구경을 다 마친 뒤 뒷걸음질하다가 내 뒤에 있던 사람을 미처 보지 못 해 발을 밟거나 몸이 닿게 될 때도 종종 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해서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같이 화들짝 놀라는 제스처를 써주며 "Sorry"라고 한다. 신기하지 않나? 영국생활 한 지 이제 꽤 되었는데 이건 아직도 신기하다. ㅋ
만일 가게 점원이
"손님, 외투 주머니 밖으로 지폐가 빠져나와 곧 땅에 떨어지려고 해요."
알려주면 우리 같으면
"앗?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라든지,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아이구, 저런!" 하면서 돈을 도로 잘 챙겨 넣을 텐데
영국인들은 이 상황에서도 "Sorry"라고 한다.
"죄송합니다만, 소금통 좀 주시겠어요?"
Sorry, could you pass the salt, please?
"죄송합니다만, 지금 제 발을 밟고 서 계세요."
Sorry, but you're standing on my foot.
"죄송합니다만, 거스름돈을 잘못 주신 것 같네요."
Sorry, you've given me the wrong change.
심지어
"미안하지만 사과 못 하겠네."
I'm sorry, but I'm not going to apologise.
도 영국에서는 가능하다. ㅋ
미국인들이 "Excuse me"를 쓰는 상황에서 영국인들은 "Sorry"를 쓴다.
미국인들은 "실례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하는데
영국인들은 "미안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한다.
영국인들은 그럼 "Sorry" 대신 "Excuse me"를 들으면 충분히 예의 바르지 않다고 생각할까?
상황에 따라 다르다.
미국인들은 자기들만큼 "Sorry"를 남발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미국인이나 외국인이 이렇게 말할 때는 무례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때는 "Excuse me"를 "Sorry"로 잘 '번역'해서 듣는다. 항상 그렇듯, 표정과 어투가 중요하다. "Excuse me"라도 표정과 어투에 따라 무례하게 들릴 소지가 충분히 있다.
"실례합니다, 좀 지나갈게요."의 느낌이 아니라
"저기요, 좀 지나갑시다(길 막고 뭐 하는 거야?)."로 들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BBC가 보도한 한 연구에 따르면 영국인은 일생 동안 "Sorry"를 무려 190만번이나 입 밖에 내뱉는다고 한다. 85세까지 산다 치면 31,025일을 사는 것이니 하루에 61번이나 "Sorry"라고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파트너나 낯선 사람들에게 특히 많이 하고 직장 상사에게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와는 어째 반대다.
한국에서는 부부 사이에서 이 말을 아껴 화를 부르고
윗사람이나 '갑'에게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해야 해서
몸과 영혼을 좀먹히지 않나.
그래, 영국인은 왜 발을 밟히고도 쏘뤼라고 하는가?
답을 하자면,
좀 복잡하다.
영국의 오랜 속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의 적극적인 실천에서 '내 발이 하필 당신 발이 갈 곳에 미리 가 있었던 것을 사과 드립니다'일 수도,
'미안하지?' 하고 남에게 응당 지녀야 할 매너를 일깨워주는 것일 수도,
'어쭈? 미안하다고 안 해?'의 뜻을 담은 우아한 협박일 수도,
남과 부딪혔을 때 으레 내는 단순한 "아이쿠"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배려의 뜻일 수도 있어
뉘앙스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기가 잘못했거나 상대방의 딱한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 "쏘뤼",
어렵지 않은 단순한 부탁을 하거나 양해를 구할 때는 "익스큐즈 미",
남에게 발을 밟히면 상대방이 사과하는 것을 듣고 나서 "괜찮습니다".
명쾌하다.
누군가 새치기를 했을 때도
투덜이 왕국 영국에서는 뒤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 새치기한 자의 매너 없음을 한탄하거나 낮은 소리로 구시렁거리기만 할 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없는 반면 미국에서는
"어이, 형씨, 줄 끝은 저 뒤에 있소!"
Hey Buddy, the end of the line is over there!
당장 나서서 해결을 보는 이가 있고 직설적이면서 명쾌하다는 것.
☞ Sorry to say
☞ Gosh, Sorry: Over-apologetic Brits in America
☞ That's Not English by Erin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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