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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크리스마스 특집 -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 본문

영국 이야기

BBC 크리스마스 특집 -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

단 단 2016. 1. 2. 00:00

 

 

 

 

 

 

 

BBC에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3부작을 방영했습니다. 제목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멋진 제목이네, 하고는 읽어 볼 생각은 못 했어요. 추리소설에 관심이 많지 않아 부끄럽게도 영국 살면서 그 유명한 아가사 크리스티 이야기들을 하나도 모릅니다. TV에서 <포와로Poirot> 재방송을 수시로 해대 밥 먹으면서 찔끔찔끔 보기는 했으나 관심이 없으니 내용은 기억 안 나고, 일부러 찾아서 볼 정도로 즐기지도 않았지요. 마지막에 꼭 사건 해결자가 관련자들을 죽 앉혀 놓고 장황하게 무언가를 설명한 뒤 단호한 얼굴로 범인을 집어내 꾸짖는 클리셰가 있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도 줄거리를 전혀 모르는 백치 백지 상태에서 시청을 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 분 이거,
보통 이야기꾼이 아니잖아?


제게는 포와로 이야기들보다 이 작품이 훨씬 흥미진진했습니다. 한 권짜리 이야기라서 밀도가 높아 그런 걸까요? 줄거리를 모른 채 봐서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를 하도 재미있게 봐서 책으로 읽고 싶다는 충동이 다 일 정도였습니다.


이제 막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덮었는데, 역시 드라마가 소설보다는 훨씬 강도가 셉니다. 시작부터 시종일관 울리는 무거운 음악과 어두운 영상 탓도 있겠지만요. 소설과 드라마 모두 잘 만들었어요. 제가 작가의 문체를 논할 정도로 문학적 소양이 있지는 않지만 원작 소설은 기교 부리지 않은 극히 평범하고 직설적인 문장들로 쓰여 있고 대화체가 많아 읽기가 쉬웠습니다. 대본 작업을 여성 극작가가 맡아서 그런지 소설에서보다 여자(Vera)가 좀 더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원작도 좋고, 대본도 좋고, 배우들 연기도 좋고, 삼박자가 척척.

 

제가 예술 작품 속 반복의 양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논문 주제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이 작품에 나타난 반복적 요소도 유심히 관찰을 했습니다. 전개의 틀이 이미 정해져 있어 결말을 뻔히 다 알고 보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다음의 반복적 요소가 언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일어날지 몰라 가슴 졸이고 보았으니 작가의 솜씨가 실로 대단하달 수밖에요. 공포영화에서 인형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처럼 동시nursery rhyme도 추리소설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편리하면서 멋진 장치를 발견해 작품화한 크리스티의 운과 두뇌 모두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 애독자 혹시 계세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크리스티 작품 중 어떤 위치를 차지하나요? 수작 맞죠? 다른 작품들도 궁금합니다. 작품이 너무 많아 다 찾아서 읽는 건 힘들 것 같고, 특별히 좋다는 작품들 몇 개는 더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어떤 폐쇄된 극한의 환경에서 위선으로 감춰져 있던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까발려지거나, 공황에 빠지거나,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좋은 놈과 나쁜 놈,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상황말고 각기 다른 양상으로 모두가 사악하거나 모두가 구제불능인 도긴개긴 상황.


저도 의외로 이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섬에 갇힌 아이들 하는 짓 좀 보세요. 애새끼들도 사악하기로는 어른에 결코 뒤지지 않지요. 희한하게도 아이들은 나쁜 건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금방 잘도 배웁니다. 섬의 낭만은 개뿔.

 

<프랑켄슈타인>, <폭풍의 언덕>, 크리스티 추리소설들, <해리 포터>... 영국 여자 작가들이 좀 독특한 정신 세계들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남자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주제, 여자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주제가 구분돼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영국의 여성 작가들은 묵직한 이야기, 어두운 판타지를 잘 써내는 것 같아요. 문학이나 글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저도 여기 살다 보면 졸문이라도 자꾸 쓰고 싶다는 충동이 일곤 합니다. 기후, 풍토, 사회 환경 등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아요. 예측 불가능한 변덕스런 날씨가 글을 쓰도록 충동질을 해대고(햇빛 쨍한 저 지중해 어느 섬을 배경으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작가를 아끼고 기려 주는 풍토가 사기를 북돋웁니다. 작가 한 명이 대체 얼마나 많은 후대인들에게 일거리를 주는지.

 

 

 

 

 

 

 

 


참,
이 배우 말입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본 배우인데,
뉘 집 아들인지 참 흐뭇하게 잘 자라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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