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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신년 특집 <셜록 - 유령 신부 The Abominable Bride> 본문
저희 집은 작년에 BBC 1년 시청료를 145파운드, 우리돈으로 약 25만원을 냈습니다. 아깝지 않냐고요? 전혀요. 외국인들은 BBC TV나 BBC 라디오를 끼고 살아야 영국에 빨리 적응할 수 있습니다. 1년 영어 학원비, 1년 교양비, 1년 공연 관람비, 1년 요리학원 강습비, 1년 오락비라고 생각하면 결코 아깝지가 않아요. 한국 가서도 이 돈 내고 BBC 방송을 마음껏 보고들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BBC 도큐멘터리의 명성은 다들 잘 아실 테고, BBC는 드라마도 상당히 잘 만듭니다. 교양과 토론 프로그램도 좋은 게 많아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BBC에서 배운 게 백 배는 더 많습니다. 그야말로 '방송 대학'이죠. 햇빛 좋은 호주로 이민 갔다가 BBC 방송이 그리워 돌아왔다는 사람도 다 있을 정도입니다. 단단이 귀국할 때 갖고 가고 싶은 것 세 가지 - BBC, 웨이트로즈 수퍼마켓, 공원. 15분마다 끊고 광고 5분씩이나 내보내는 상업방송은 짜증 폭발해서 못 봅니다.
영드 애호가들은 잘 아시겠지만,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공들여 제작한 드라마를 내보내는 전통이 있습니다. <다운튼 애비> 크리스마스 특집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가 새로 제작돼 지난 크리스마스 때 방영이 됐었고요, 엊저녁에는 <셜록> 신년 특집 '유령 신부The Abominable Bride'가 방영됐습니다. 다쓰 부처 둘 다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인물들을 원작의 배경인 빅토리안 시대 신사들로 꾸며 내보내니 그 멀끔한 입성에 눈이 아주 즐거웠죠. 소품과 인테리어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요. 여기서 잠깐 빅토리안 젠틀맨의 복식 감상.
영국인들에게 가장 풍부한 크리스마스적 상상력을 주는 시대 - 바로 빅토리안 시대[1837-1901]입니다. 현재 영국의 크리스마스 풍경 중 상당 부분이 이 시기에 비롯되었죠. 잘 꾸민 크리스마스 트리, 이런저런 크리스마스 장식, 최초의 상업적 크리스마스 카드, 풍성한 크리스마스 만찬상, 명절의 단란한 가족, 찰스 디킨스 소설에서 묘사되는 일련의 크리스마스 풍경 등. <셜록>의 원작 자체도 빅토리안 시기에 쓰였으니 신년 특집의 배경을 빅토리안 시대 크리스마스로 잡은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이번 신년 특집에서 눈여겨볼 몇 가지
영어 표현을 주의 깊게 들어보세요. 옛날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우선, 호칭부터가 달라집니다. 지금처럼 격식 없이 "존", "셜록", "몰리" 하면서 이름을 막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전부 "왓슨", "홈즈", "후퍼"로 대체가 되죠. 이름을 부르느냐, 성을 부르느냐가 극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성으로 부르기 때문에 가능해진 설정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내용과는 크게 상관없는 가벼운 상식 하나 -
상대방의 칭호title를 글로 적을 때 영국에서는 Mr, Mrs, Dr 등의 끝에 점을 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극 중에서는 옛 시절이라 점을 찍습니다. 미스터의 'r', 미시즈의 's', 독터의 'r' 모두 원 단어의 마지막 글자이므로 점을 찍지 않는데, Professor를 Prof.로 줄일 때는 'f'가 마지막 글자가 아니므로 점을 찍어야 합니다. 원칙을 아시겠지요? 고로, 영국인한테 편지를 쓸 때는 칭호 끝에 점을 찍을 것이냐 안 찍을 것이냐를 잘 판단해서 써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상관없이 모두 점을 찍습니다. 영어를 쓰는 다른 영연방 국가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 지 궁금하네요.)
'221B Baker Street'의 숫자를 말할 때도 요즘처럼 "투투원 비"로 읽지 않고 또박또박 "투 헌드레드 앤 트웬티 원 비"라고 읽습니다.
요즘은 '맙소사'를 "지저스Jesus!"라 하는 사람이 많은데 옛 시절엔 "굿 로드Good Lord!"가 인기 있었나 봅니다. 극 중에서 자주 들립니다. 요즘도 쓰긴 하지만요. 'Good Lord', 'Good heavens', 'Good God', 'Good grief', 'Good gracious' 모두 영국인들이 잘 쓰는 감탄사입니다. 다 같은 뜻이므로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셜록의 "Mrs Hudson, the game is on."도 "The game is afoot."으로 전환됩니다. 그 외, 왓슨의 해설에서 원작의 표현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 거의 그대로 쓰입니다.
빅토리안 시대부터 스멀스멀 일기 시작한 여성참정권women's suffrage 운동도 이번 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이 때문에 반가운 얼굴이 나옵니다.) 영국 여인들이 남녀평등 실현과 참정권 쟁취를 위해 얼마나 과격하게 '활동'했는지가 이 드라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왓슨이 <스트랜드Strand> 잡지에 자기들이 해결하고 다닌 범죄에 대해 인기리에 연재를 하는 중인데, 주변의 몇몇 여인들이 자신들의 존재가 이야기 속에서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며 삐죽거리기도 합니다. ㅋ 몰리 후퍼가 왜 그런 모습을 하고 나올 수밖에 없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그 시절엔 여성의 전문직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었죠.
극 중 실내 배경이 인형의 집처럼 전환되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복식과 인테리어, 소품들을 눈여겨보세요.
젠틀맨스 클럽 테이블의 ☞ 정교한 젤리들도 꼼꼼히 보세요. 영국인들은 아직도 정교하게 만든 젤리들을 만찬 때 디저트로 내곤 합니다. 근사한 젤리 몰드가 아직도 생산되고, 수퍼마켓들도 만찬상의 센터 피스 역할을 할 수 있는 성castle 모양의 큰 젤리들을 냅니다. 머핀 전용 디쉬 위에 잉글리쉬 머핀도 보이죠. 셜록에서마저 테이블을 논하는가. ㅋ
왓슨의 친구인 스탬포드 보고 하도 반가워서 다쓰 부처 둘 다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진지한 내용이긴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저런 유머들을 가득 심어 놓았으니 알아차리는 분들만 키득키득 웃을 수 있을 겁니다. 셜록이 자기 형에게 얼마나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자기보다 똑똑한 형을 머리 속에서 어떻게 그리며 '복수'하고 있는지 보세요.
죽은 신부의 부활과 죽은 모리아티의 부활 미스테리를 같이 엮어 병행으로 풀어나가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소 복잡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이번 화의 주제입니다. 다음 시즌 모리아티의 등장을 더욱 기대하게 하는 잘 만든 특별편입니다. 두 이야기를 엮은데다 과거와 현재가 수시로 교차하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쫓아가야 합니다. 이번 특별편을 재미있게 보시려면 이전 편들 내용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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