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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간지러운 옷

단 단 2016. 5. 21. 00:00

 

단단은 오빠만 셋이 있습니다.
고명딸인 거죠.
이렇게 말하면 대개
"아유, 예쁨 받고 귀하게 자라셨겠네에~" 
합니다만, 

전혀요. 
저어어어어어언혀요.

그냥 부모님과 자식들 간에 마찰 없고 형제들 간에 원래 우애가 깊어서 그렇지, 집이 아무리 작아도 딸이라서 항상 독방 쓸 수 있었다는 것말고는 제가 고명딸이라서 특별 대접 받은 것은 없었습니다. 


늘 남자 형제들하고 놀면서 자라 저는 남자들 놀이를 잘 압니다. 운동도 잘합니다. 아직도 여자들 많은 데 있는 것보다는 남자들 많은 데 있는 게 좀 더 익숙하고 편합니다. 언니라는 소리도 입에서 매끄럽게 잘 안 나옵니다. 저는 막내 오라버니가 둘째 오라버니를 "작은형"이라 부르는 걸 따라 부르면서 자랐기 때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둘째 오라버니를 "작은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권여사님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 고운 아가씨로 자랐으면 하는 소망에 백화점이나 옷가게에 저를 데리고 가면 늘 하늘하늘 잠자리 날개 같은 여성스런 옷에 예쁜 또각 구두를 권하셨고 다른 아가씨들처럼 손톱도 좀 예쁘게 칠하고 가꾸기를 원하셨지만, (저도 손톱 예쁘게 길러 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피아노 쳐야 하고 손끝으로 식재료 질감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하므로 기르고 싶어도 못 기릅니다.) 


실상은

야상에, 군화 같은 신발에, 가방도 꼭 내셔날 지오그래픽 사진 기자들이나 메고 다닐 것 같은 넉넉하고 칙칙한 것에,

병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씻고,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머리도 한두 번 슥슥 빗고, 

장신구도 일절 안 하고, 

영혼을 옥죄는 브라, 코르셋은 갖다 버린 지 오래.

옷도 귀찮아 죽겠지만 안 걸치면 문명인이 아니라니까 마지못해 겨우 걸치고 다닙니다. (밤엔 알몸으로 잡니다.)

 

 

 

 

 

 

 

한 벌로 다 끝나는 이런 간단한 옷차림 좋아합니다.

 

 

게다가, 

성질 더럽죠, 설상가상 목소리까지 낮고 허스키하죠, 

여기 오셔서 제가 쓴 글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직설 독설 욕설 외설이 난무하는데다 아저씨 같은 전투적인 말투죠, 

지금은 차가 없어서 못 하고 있지만 

예전엔 취미도 자동차 정비에 지도 들여다보기였죠,

하여간 

뭐 하나 여성스러운 구석이 없어요.

그렇다고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요.

(예전 남자친구들과 지금 남편을 저는 변태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선머슴 같은 딸이 염려되는지 

권여사님은 아직도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십니다. 

집에 있을 때도 단장하고 있어라, 

다쓰 서방은 잘 챙겨 먹이고 있냐,

외출할 때 잘 차려입고 나가라... 


이제는 심지어 저희 잠자리까지 다 걱정을 하십니다. 

필요한 물건 영국에 부쳐 주실 때마다 짐에 말없이 넣어 주시는 게 있는데 뭔고 하니,



 

 

 

 

 

 

란제리chemise.

 

"엄마, 나 이런 간지러운 거 안 입어." 

하는데도 지금쯤은 권태기가 왔을 거라 생각하시는지 열심히 부쳐 주십니다.

"우리 이런 거 없이도 잘 하고 있어."

극구 사양하는데도 자꾸 부쳐 주십니다.

(사진은 저 아닙니다. 놀라지 마세요. 만인 공개 블로그에 자기 속옷을 막 올릴 순 없죠. 권여사님이 보내 주신 것들은 살이 비쳐 보이는 감이라서 사실 이보다 더 야합니다. 권여사님 웃겨 죽것어요 아주.) 
.

.

.

. 


어제 속옷들을 정리하다 보니 

입지 않고 곱게 접어 둔 야사시한 란제리가 수두룩.


'어휴, 안 입는다는데 엄마는 왜 자꾸 쓸데없는 데 돈을 써? 그냥 돈을 주지.' 

예전엔 이랬었는데, 

.

.

.

.

아, 철이 들었는지 어제는 그걸 하나하나 펼쳐 보고는 갑자기 
엄마가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열심히 부쳐 주신 엄마 정성도 있고

5월 21일 부부의 날도 맞았고 하니


험험,


오늘 저녁엔...

한번 입어 보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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