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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영문판 The Vegetarian, Han Kang·Deborah Smith 본문

잡생각

한강 <채식주의자> 영문판 The Vegetarian, Han Kang·Deborah Smith

단 단 2016. 5. 24. 00:00

 

 

 

 

 

한강.

부끄럽게도 이 작가의 이름은 이번 수상 소식을 통해 처음 들었다. 영국에 있으니 한국 문학을 접하기 힘들어 그랬노라 변명하려는 찰나, 무수한 전자책들이 떠올라 냉큼 입을 닫았다. 작가 이름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딸의 이름을 '강'이라고 지을 수 있는 부모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부모 중 한 명은 문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다.


영국 언론에서 ☞ 수상 소식을 접하고는 곧바로 영국 아마존에 들어가 책을 주문했다. 다음 날 정오에 받았고 하던 일을 전폐한 채 하루종일 앉아 읽었다. 속독가들 같으면 몇 시간만에 뚝딱 읽을 수 있는 분량이나, 나는 한 문장 읽고 생각에 잠기고, 한 단락 읽고 생각에 잠기고, 한 장 읽고 생각에 잠기는 불편한 버릇을 갖고 있어 책 읽는 속도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많이 느리다. 책은 곧 품절되었고 지금은 부지런히 증쇄 중이라 한다. '맨부커상 후보작'에서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표지 문구를 바꾸어 달고 나올 것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상 받았다니까 그제서야 찾냐며, 우르르 몰려가 책 사는 나 같은 사람을 비웃는 지고하신 우리 문학 애호가들이 많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작가와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어 책을 산 사람들은 적어도 작가가 두부 한 모라도 더 사 먹고 기운 차려 다음 글을 쓸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다.

 

미술작품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음악작품은 열려 있는 귀로 듣고만 있어도, 심지어 딴 생각 하면서도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문자로 표현한 예술은 책을 손에 들고 어딘가에 조용히 틀어박혀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 한줄 한줄 읽어 자기 머리 속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도 수십 배나 더 들여야 한다. 게다가 책이 지장본paperback으로 묶여 있기라도 하면 '네가 무슨 독서를 하겠다고 그래?' 비웃으며 자꾸만 덮으려 드는 책에 맞서야 해 읽는 내내 손에 힘까지 잔뜩 주고 있어야 한다. 감상자를 이렇게 번거롭게 만드니 미안해서 책 값은 항상 그토록 싼 모양이다. 다음의 이유들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1. 한국인이 쓴 소설을 영국인이 번역했다는 점.

2. 채식주의자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

3. 서평을 읽다가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이 나처럼 브라를 하지 않는데다 옷 입기를 매우 귀찮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동질감과 호기심에.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젊은 영국 여성이 뜬금없이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갖고 독학으로 우리말을 공부해 옮겼다. 한글판은 읽어 보질 못 했으니 영문판만 놓고 평가를 하자면, 과연 '번역문학상'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이 매끄럽고 마치 처음부터 영어로 쓰인 것처럼 읽힌다. 영국의 독자들도 번역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번역투' 문장이 없어서 읽기 좋다고 평을 한다. 번역가 데보라 스미쓰는 성실한 사람이다. "번역가라서 다행인 것 하나는 'writer's block'이 없다는 거죠. 그저 시간 들여 앉아서 열심히 작업하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한다. 아, writer's block. 창작하는 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반갑지 않은 그것.

 

제목만 보고는 남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개인에 가해지는 사회나 집단의 폭력과 야만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내용이겠거니 섣불리 짐작하며 첫 장을 펼쳤는데, 읽어 보니 다행히도 날것 냄새 풀풀 풍기며 무언가를 고발하려 들거나, 가르치려 들거나, 신파 뚝뚝 묻어 나는, 그런 지겨운 주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채식주의가 아직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에 6년 넘게 채식주의자로 살아 본 경험이 있으므로 나는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느껴 보고 싶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한창 쓸 시기가 공교롭게도 내가 채식주의자였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읽어 보니 이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인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트라우마와 불면증을 가진 엄격채식주의자vegan이면서 종국에는 거식증anorexia 단계로 넘어가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띤 인물이다.

 

인물과 사건들의 단순 묘사보다는 심리 묘사들이 많고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감정이 농축돼 있어 다 읽고 나서 나는 소설을 읽은 것인지 시를 읽은 것인지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섬세하면서 섬뜩하고, 아프도록 슬프며, 시적이고, 초현실적이다.


이 소설은 각기 다른 템포와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1부는 긴박하고, 2부는 교향곡 2악장처럼 느리고 조용히 시작해 뒤로 갈수록 촘촘해지고 격렬해지며, 3부에서는 시간이 멈춘다.

 

작품은 색채와도 강하게 연결돼 있다. 붉은 피와 흰색의 대비가 곳곳에서 불쑥거린다.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딸의 종아리에 회초리질을 해댄 아버지는 어린 딸의 종아리를 문 개를 벌 주기 위해 최대한의 고통을 가하며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기억은 딸의 내면의 심연에 죄의식으로 자리잡는다. 흰둥이가 붉은색과 흰색의 체액들을 쏟아내며 죽어가는 장면은 그 묘사가 너무 생생해 내 머리속에서는 곧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전환이 되었고, 기이하게도 이는 아름답다는 느낌으로 한 번 더 전환이 되었다. 등장인물은 저항의 표시로 손목을 긋는다. 흰 접시 위에 피가 흩뿌려진다. 눈가에 흰 깃털을 가진 작은 동박새는 채식주의자에게 깨물려 붉은 피로 물든다. 남자는 자신의 흰 셔츠를 적신 여인의 붉은 피와 피 냄새의 기억을 떠올린다.

 

내게도 붉은 피와 흰색에 얽힌 강렬한 기억들이 있다. 이십여 년 전, 선인장처럼 말이 없던 이십대 초반의 청년은 연모하는 이를 향한 오랜 구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손가락을 따 흰 종이에 피로 절절히 사랑 고백을 담았고, 결국 내 남편이 되었다. 고기의 핏물을 빼려다 하얀 대접에 담긴 물에 끝없이 우러나는 피를 보고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피를 머금은 붉은 살과 흰 지방의 눈이 시린 대비, 남의 살을 찢고 씹는 데서 느끼는 그 관능적인 이의 감각과 혀의 감각을 잊지 못 해 긴 세월이 지나 나는 다시 고기로 돌아왔다. 고기를 포기하기에는 리비도가 너무 강한 인간으로 잉태된 것이 문제였다. 나는 육식을 언제나 폭력과 관능, 이 두 가지와 엮어 생각한다. 피는 두렵게 하고, 흥분시키고, 영감을 준다.

 

이 소설의 2부에서는 붉은색이 녹색과 교차한다. 하체를 흥건히 적신 짓이겨진 녹색의 즙 묘사를 통해 녹색도 관능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오늘, 절구에 바질 잎을 으깨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3부 전체는 나무의 이미지가 만연함에도 무채색 배경에 간헐적으로 붉은 피가 얼룩진다.


Do judge a book by its cover. 책의 표지에 관해서도 언급을 하고 싶다. 소설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이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책 표지는 영문판을 선택하게 만든 또 하나의 동인이었다. 사보이 캐비지savoy cabbage 같은 촘촘하고 섬세한 잎맥은 인간과 동물의 정교한 혈관과도 닮아 있고 그것들을 싸고 있는 거죽의 살결과도 닮아 있다. 피를 흠뻑 머금고 있는 잎맥처럼 그녀의 채식도 그렇게 피로 얼룩지고, 결합된 남녀의 몸은 동물인지 식물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붉은 잎 위에 떨어진 하얀 날개 한 쪽도 서늘해서 아름답다. 마지막에 가서 우리는 이 날개가 누구를 상징하는지 알게 된다.

 

육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아름다운 작품이므로 여러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이라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 번역은 전반적으로 유려하게 잘되었으나
☞ 오역들이 몇 군데 발견된다고 한다
☞ 그럼에도 데보라 스미쓰의 번역은 원작의 아우라를 충분히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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