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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덩케르크, 던커크 Dunkerque, Dunkirk ② 음악 본문

음악

영화 덩케르크, 던커크 Dunkerque, Dunkirk ② 음악

단 단 2017. 7. 24. 00:00

 

 

 

 

영화가 남긴 여운이 길어 며칠째 내용을 곱씹고 있습니다. 대사도 별로 없는 영화가 생각할 거리는 참 많이도 줍니다. 오늘은 영화에 쓰인 음악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공간은 제 놀이터와 같아서 웬만하면 여기서는 일(음악)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드는데, 음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글이 없어 제가 한번 끄적거려 봅니다. 전문 용어는 가급적 쓰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의 작곡가로 다들 한스 짐머를 언급하죠. 음악을 맡은 작곡가는 사실 한스 짐머 외에 두 명이 더 있습니다.

 

 

 

 

 

 

 

Hans Florian Zimmer (1957- )

 

 

 

 

 

 

 

Benjamin Wallfisch (1979- )

 

 

 

 

 

 

 

Lorne Balfe (1976- )

 

 

현대의 영화음악 작곡가들은 좋든 싫든 클래식 음악 악보를 많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각 악기의 소리를 잘 배치하는 기술에 관한 학문인 '관현악법orchestration'도 독학으로든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든 공부를 해야 하고요.

 

그런데, 영화음악 작곡가들이 영화를 위해 음악을 항상 새로 작곡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음악을 갖다 쓰기도 하고 자신이 했던 작업을 슬쩍 가져다 다시 써먹기도 하죠. 감독이 "여기 이 부분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풍으로 작곡해 넣어 주세요.", "여기서부터는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풍의 전투적인 음악이 필요합니다.", "오르간 소리를 적극적으로 써서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느낌이 나도록 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특별 주문을 하기도 해 앞서 살다 간 선배 작곡가들의 음악과 작풍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화 <덩케르크>의 음악을 맡은 작곡가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영화를 위해 기존 음악의 어법을 차용하거나 아예 남의 선율을 가져와 손질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들으니' 저는 다음 두 작곡가의 음악이 즉각 떠오릅니다.

지야친토 셸시에드워드 엘가.

 

 

 

 

 

 

 

Giacinto Scelsi (1905-1988)

 

 

긴장감을 위한 장치들 (for tension)

 

이태리 귀족 가문 태생의 작곡가 지야친토 셸시입니다. 셸시는 단 한 개의 음만 써서 작곡하는 것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습니다. 독특한 발상이죠? 그런데, 그 한 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 다른 음으로 가고 싶어 온갖 제스처를 써 가며 몸무림을 칩니다. 이웃한 음으로 슬쩍 넘어가려다가도 이내 붙잡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죠. 여기서 긴장이 발생합니다.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몸에서 또 다른 자신이 혼령처럼 분리돼 빠져 나오려고 마구 흔들어 보지만 결국엔 도로 갇히게 되는 모습을 상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백견이 불여일문, 곡을 하나 들어 봅시다.

 

 

 

 

 

 

 

 

 

<Quattro Pezzi su una nota sola>(1959)라는 제목의 곡으로, 영어로는 'Four Pieces on a Single Note', 우리말로는 '한 개의 음으로 쓰여진 네 개의 곡' 정도로 번역을 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12분 20초부터 나오는 네 번째 곡만 들어 보세요. 

 

셸시의 어법을 쓰면 사이렌 소리 혹은 독일군의 급강하 폭격기인 슈투카Stuka의 소름 끼치는 '여리고 나팔Jerico-Trompete' 소리를 흉내 낼 수 있고, 공황에 사로잡힌 병사들의 불안한 심리도 표현할 수 있어 좋습니다. 여기에 심장 박동 소리와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까지 얹혀지니 영화 보면서 관객들 마음이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을 겁니다. 초침은 놀란 감독의 시계 소리를 녹음한 뒤 변조해 썼다고 하죠. 초침 소리가 발전해 기차 소리처럼 변할 때도 있고, 영화 <죠스>의 음악처럼 들릴 때도 있는데, 공포를 극대화하는 데 안성맞춤입니다. 영화음악 작곡가한테는 창의력보다 이렇게 원래 있던 요소들을 적소에 잘 '손질'해 배치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듯합니다.

 

 

 

 

 

 

 

 

 

(1) 온갖 제스처를 써 가며 몸부림치고 있는 하나의 긴 음 

(2) 박동 

(3) 초침

 

긴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영화의 작곡가들은 이 요소들 외에,

 

(4) 끝없이 상승하는 듯한 청각적 착각을 주는 '셰퍼드 톤Shepard tone' 기법도 차용합니다. 영상에 원리 설명이 담겨 있으니 참고하세요.

 

(5) 첼로나 더블 베이스 같은 낮은 소리를 내는 현악기들에게 일부러 고음역대의 소리를 내게 하는 것도 긴장감을 더하는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높이의 음pitch을 구현할 때 바이얼린 같이 원래 높은 소리가 나는 악기들을 써서 편하게 내게 하는 것과, 저음 악기들이 힘겹게 고음으로 내게 하는 것은 긴장도에 있어 많은 차이가 나죠. 이 영화의 작곡가들도 이를 잘 알고 활용하고 있고요.

 

 

 

 

 

 

 

Edward Elgar (1857-1934)

 

 

집, 고향, 조국, 숭고한 희생, 견뎌내기, 고결함 ('Home' and 'Nobility')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s>과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으로 잘 알려진 영국 작곡가 엘가입니다. <수수께끼 변주곡> 중 아홉 번째 곡인 '님로드Nimrod'가 영화 <덩케르크>에 여러 번 쓰였는데 어떤 곡이냐면요,

 

 

 

 

 

 

 

 

 

곡 이름과 작곡가는 몰랐어도 음악은 많이 들어 이미 알고들 계셨을 겁니다. 이 음악은 영국인들에게 '영국'과 동의어로 통합니다. 영국인들의 장례식, 추도식, 각종 국가 기념일, 그리고, 영국의 현충일인 'Remembrance Sunday'에 런던 화이트홀 전몰자 기념비The Cenotaph 앞에서 매년 연주가 됩니다. (놀란 감독의 아버지 장례식 때도 연주됐었습니다.) 1997년 홍콩 반환식과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도 연주됐었고요. 엘가의 님로드 = 영국, 이렇게 생각해도 될 정도로 영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음악입니다.

 

그런데, 이건 마치 한국영화에서 아리랑 쓰는 것과 같은 형국 아니냐고요? 다릅니다. 일단 님로드에는 '한'의 정서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훨씬 복잡한 의미를 지니죠. 한국인들에게 이제 아리랑은 올림픽 개·폐막식 등 대외적으로 한국을 알릴 때나 쓰는 음악쯤으로 여겨지지만 님로드는 영국인들의 일상 깊숙이 박힌 음악입니다. 일부러 찾아 듣기도 해 영국의 음악회장과 교회에서는 님로드 선율이 흔히 연주됩니다. 일상에서 아리랑을 찾아 듣는 한국인은 흔치 않잖아요? 음악회장에서 아리랑 연주를 들을 일도 거의 없고요. 이 영화에서는 그래서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그토록 도달하기 힘든 '집',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던 소중한 '일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게다가, 님로드는 작자 미상의 민요와 달리 자국의 인재가 공들여 창조한 잘 만든 예술품이라서 맥락을 떠나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즐길 명분이 충분합니다.

 

 

 

 

 

 

 

 

 

현충일의 군악대 관악합주로도 들어 봅니다. 감미로운 소리로 연주 잘하죠? 영국인들이 관악기, 특히 금관악기를 좀 잘 다룹니다. 저 잉글랜드 북부 탄광촌의 금관합주단colliery band들도 과거 명성이 대단했죠. 진폐증으로 광부들 폐활량도 그리 좋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여가 시간에 관악기 연주할 생각들을 다 했는지 놀랍습니다. 광부들 취미 한번 고상하네요. 우리 집 영감은 군필자라서 그런지 오리지날 오케스트라 연주보다는 군악대의 이 관악합주 연주를 더 좋아합니다.

 

 

 

 

 

 

 

 

 

널리 사랑 받는 곡이라서 다양한 편성으로도 편곡돼 연주되곤 합니다. 영국식 창법의 무반주 중창으로도 들어 봅니다. <VOCES8>의 연주입니다. 가사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기도문으로, '진혼곡requiem'의 것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라틴어 가사
Lux aeterna luceat eis, Domine, cum sanctis tuis in aeternum, quia pius es.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영어 번역

May light eternal shine upon them, O Lord, with Thy saints forever,

for Thou art kind.

Eternal rest

give to them, O Lord,

and let perpetual light shine upon them.

 

 

 

 

 

 

 

 

 

 

같은 음악을 이번에는 악보를 보면서 듣도록 하죠. 악보 읽으실 줄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12분 41초부터 나오는 제9곡이 '님로드nimrod'입니다. 맨 윗단에서 까만 '콩나물 대가리'만 눈으로 따라가 보세요. 들죽날죽, 머리와 머리 간에 굴곡이 매우 심하다는 걸 알아채실 수 있을 겁니다. 선율melody 자체가 마치 인생의 부침ups and downs을 상징하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에 이는 벅찬 감정을 영국인 특유의 저 '꽉 다문 입술stiff upper lip'로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극히 영국스러운 선율입니다.

 

영국 살면서 가만히 관찰해 보니 영국인들은 들죽날죽한 선율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사가들과 음악학자들도 저랑 같은 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미감에도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이들의 정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요. 아니면, 자연환경이 미감에, 그리고 음악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역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까요? 이 님로드 선율은 제가 참 좋아하는 영국 선율 중 하나입니다. 이런 선율은 그야말로 신의 은총을 입어야만 써 낼 수 있는 겁니다.

 

 

 

 

 

 

 

 

 

자, 영화에서는 어떻게 쓰였을까요?

 

영화 초기에는 이 엘가의 님로드 선율이 스산한 파도 리듬 위에 아주 느린 속도로, 그리고 작은 음량으로 희미하게 얹힙니다. 들리십니까? 여기에 힘찬 심장 박동 소리와 초조한 초침 소리까지 더해져 네 개의 요소가 동시에 흐르게 되죠. 님로드 선율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선명해집니다. 집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암시로 해석하면 될 듯합니다. 님로드 선율은 듣자마자 순식간에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 위험한 힘을 지녔으므로 감독의 요구로 선율을 천천히 드러내느라 작곡가들이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Earned emotion'이 되어야지, 음악만 듣고 감정이 갑자기 격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음향sound designer은 리차드 킹Richard King이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음향도 음악 못지 않은 비중을 지닙니다. 작곡가들과 긴밀하게 협업한 덕에 음악과 음향이 매우 성공적으로 밀착되거나 교차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예를 들어, 배의 모터 소리와 음악을 동일한 속도로 맞춰 진행시키는 등.)

 

아래에 사운드트랙을 모두 올려 봅니다. 곡 제목을 누르면 한 곡씩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시간 없으신 분은 건너뛰고 마지막 곡인 10번을 들어 보세요.



사운드트랙

 

1The Mole (includes a theme by Sir Edward Elgar)

2We Need Our Army Back

3Shivering Soldier

4Supermarine

5The Tide (includes a theme by Sir Edward Elgar)

6Regimental Brothers (includes a theme by Sir Edward Elgar)

7. Impulse

8Home (includes a theme by Sir Edward Elgar)

9The Oil

10Variation 15 (Dunkirk) (includes a theme by Sir Edward Elgar) 

11End Titles (includes a theme by Sir Edward Elgar)

 

 

영화 보러 가시면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린 음악과 음향들이 놀란 감독의 영상에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주의 깊게 들으며 감상해 보세요.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 곡이 좋은가 나쁜가를 따지기보다는, 저는 이 영화에서 음악이 영상과 한 몸처럼 붙어서 움직인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대개의 전쟁영화들에서는 그렇지가 못 하거든요. 전투 장면 음악이 마치 게임 음악처럼 내용과 유리되어 빈 공간을 채워 주는 배경 차원에 머물기 일쑤죠.

 

놀란 감독은 그 자신이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으로, 여가 시간에 첼로 연주하기를 즐깁니다. 작곡가들한테 자기 영상에 입힐 음악에 관한 요구를 꽤 구체적으로 하는 감독으로 소문 나 있고요. 음악을 잘 알고 있으니 음악에 까다로울 수 있고, 그래서 그런 음악들이 나오는 거지요. 놀란 감독의 영화들을 죽 보면 예술음악(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대번 듭니다.

 

참, 이 영화의 시간 얼개time structure가 복잡해서 보기 어려웠다는 분들은 평소 예술음악을 들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예술음악은 서로 다른 음악적 요소가 두어 개 이상 복잡하게 얽혀 진행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복잡한 스토리를 접했을 때도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갈 수 있게 훈련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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