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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영문판만 읽은 독자로서 본문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다.
☞ '채식주의자' 영어로 읽은 독자들이 어리둥절한 이유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 번역판을 읽고 ☞ 독후감 비슷한 것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맨부커상 수상 직후 한국의 번역자들 사이에 이미 오역에 관한 말들이 오갔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 내용을 이해하고 작품이 가진 아우라를 느끼기에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한글 원문도 안 읽어봤는데 어떻게 아냐고? 한글로 쓰인 평들과 내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
그런데 어느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뒤늦게 엉터리 번역이라고 주장하고 나섰고, 이를 며칠새 언론들이 너도나도 소개하며 떠들고 있다. 논문을 뒤늦게 쓴 건지, 일찍 쓰인 논문을 놓고 언론들이 이제 와 떠들어 대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후자라면 왜 지금에 와서? 전라도 출신 '빨갱이' 작가 잘되는 꼴이 못마땅해서?
나는 영문판만 읽은 사람이므로 원문의 어떤 부분이 번역 과정에서 누락되고 오역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번 교수가 언급한 "처형에 대한 제부의 은밀한 욕망"은 작품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서술되고 있으므로 한 번 놓쳤다고 해서 영어판 독자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책장을 덮을 리는 없다. 오역 탓에 영어권 독자들은 알 수 없었을 거라며 김 교수가 우려하는 "두 부부의 엇갈리는 욕망과 갈등",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지는' 영혜에 대한 형부의 경이로움"도 나는 선명하게 잘만 느끼며 읽었는데, 이게 웬 아무말 대잔치인가. 오역 때문에 영문판을 읽고도 위와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없었다면 김 교수야말로 영어를 잘 못하거나 독해력이 달리는 건 아닌가? "그로테스크"라는 한글 단어 하나가 "obscene"으로 번역됐다고 해서 2부를 읽는 내내 형부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느낄 사람이 대체 어디 있나. 단어 하나 오역된 것 때문에 2부에서 "영혜가 자신의 몸을 통해 격렬하게 제기하고 형부가 가장과 예술가로서 자신의 파멸을 무릅쓰면서까지 추구하는 바를 가리키"려 했다는 것을 못 알아차릴 영어권 독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존 독자평에서 투덜대는 독자들은 오역 때문에 내용을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이 작품이 자기 취향에 맞지 않아 싫은 것이다. 한국에도 이 작품이 어둡고 끔찍하다며 싫어하는 사람 많다. 게다가 이런 일에는 으레 수상하지 못한 자국 후보 작품를 위한 분풀이로 '별점 테러' 하고 악평 쓰는 이도 있게 마련이다. 김 교수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사람들의 글에서 입맞에 맞는 문장들만 쏙쏙 뽑아 마치 영어권 독자 태반의 의견인 것처럼 제시를 하고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후기에서 독자의 43%가 불만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아래의 화면 갈무리를 보라. 43%라는 수치는 대체 어디서 얻은 것인가.
오역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마치 작품 내용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돼 전달되고 있다는 식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맨부커상은 영문판만 읽고 수여하는 상이다. 번역을 얼마나 정확히 했는가 원문과 번역문을 자자구구 대조해 따져서 주는 '번역상'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보고 평가하는 '번역문학상'이다. 오류를 조목조목 짚어 내는 것은 학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영어권 독자를 배반했다",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지" 등, 황색 언론에서나 볼 법한 자극적인 표현을 써 가며 공격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나도 그 "영어권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누락된 문장들이 있었다는 것은 문제다. 개정판을 낼 때는 오역과 빠진 문장들이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기자들은 이번 일에도 역시나 영문판을 직접 읽어 '팩트 체크'할 생각 않고 그저 앵무새처럼 김 교수의 말을 열심히 받아쓰고 있다. 그리고는 땡. 기사 끝. 과연 김 교수가 주장하는 대로 오역 탓에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영문판을 읽고 확인했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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