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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날에 리스트를 생각하다 World Piano Day, Franz Liszt 본문
▲ 영국 <왕립음악대학The Royal College of Music> 강의실의 피아노. 2016년 런던.
피아노 관련 산업과 학문에 종사하는 이들은 피아노의 88개 건반 수를 따서 그 해의 88번째 되는 날을 '피아노의 날'로 기념합니다. 재미있는 발상이죠? 2월의 날수가 유동적이어서 달라질 수 있는데, 올해는 3월 29일입니다. 피아노가 처음 발명된 1700년경부터 건반 수가 88개였던 건 아니고 차츰 늘어나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가청주파수 범위가 대략 20-20,000Hz라고 하니 건반 수가 지금보다 더 많아도 되지만, 연주자가 악기 정중앙에 앉아 편하게 팔을 뻗을 수 있으려면 건반 수를 마냥 늘릴 수 없겠지요. [건반상의 최저음 A0 27.5Hz - 최고음 C8 4,186.009Hz]
▲ 1839년경의 리스트(1811-1886).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 가능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작곡가로는 헝가리 태생의 '범유럽인' 리스트를 꼽습니다. (활동 무대가 넓어 학계에서는 범유럽인으로 분류합니다.) 리스트는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는데, 그가 직접 연주했던 자신의 작품은 낭만주의 시대(c.1800-c.1890) 작품들 중에서도 감정의 스펙트럼이 특히 더 넓고 대비가 심하면서 기교적이고 음향이 화려해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다음의 기사 제목이 당시 리스트의 위상을 가늠케 합니다.
☞ [BBC Culture] Forget the Beatles - Liszt was music's first 'superstar'
☞ (음악계의 '수퍼스타' 원조는 비틀즈가 아니라 리스트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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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2년의 풍자화. 꺄악 옵빠아.
단발머리 훈남의 카리스마 넘치는 초절기교적 연주 모습에 혼절하는 여인 속출.
수많은 작곡가가 있음에도 리스트는 제가 한 학기 15-16주 수업 중 한 주를 꼬박 할애해 다룰 만큼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작곡가를 평가할 때는 크게 (1) 작품의 탁월성, (2) 음악사적 중요성, 이 두 가지를 놓고 따지는데, 배 아프게도 (1)과 (2)를 모두 겸비한 작곡가들도 있지만, 대개는 (1)과 (2) 중 어느 하나만 차지할 때가 많습니다.
리스트는 굳이 분류하자면 저는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음악사적 중요도가 높은 작곡가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 자신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여서 관현악orchestra뿐 아니라 피아노를 위한 작품도 참 많이 썼는데, 건질 만한 작품은 많지 않고 대신 발상 자체가 훌륭하거나 악곡 중간중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번뜩임, 기발함 등이 사람 혼을 쏙 빼놓을 때가 있어 후배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습니다. 리스트가 창안해서 시작된 음악 관행도 많은데 그중 하나가 연주자들이 장시간 독주회를 할 동안 그 긴 악보를 전부 외워서 연주해야 한다는 겁니다. 후대의 연주자들이 아주 이를 갈죠.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표현적인 새 관현악 형식을 개척한 것도 큰 공로로, 훗날 영화음악의 탄생과 융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공포영화 음악의 원조로 꼽히기도 합니다. 인상주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도 리스트부터 언급해야 합니다.
이 아래에 리스트의 피아노 곡을 한 곡 걸어드릴 텐데요, 듣다 보면 쇼팽, 바르톡, 무소르그스키, 드뷔시, 라벨,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거슈윈, 어떤 곡에서는 사티와 심지어 쇤베르크까지, 동시대 혹은 후대의 작곡가들 음악이 수두룩 떠오를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리스트의 매력은, 너무 다듬지 않은 재료로 직설적이고 열광적rhapsodic이고 분방capricious하게 표현하는 데 있습니다. 문명의 시대, 예의바름의 시대, 세련의 시대에 사는 단단에게는 이런 거친 면이 또 좋게 들릴 때가 있죠. 연주 기술에 치우친 '서커스 음악'이라는 평을 받는 곡들도 많지만 오늘 걸어드리는 곡에서는 이 기교가 잘 승화되어 귀를 즐겁게 합니다. '연주하다'를 영어로는 'play'라는 동사로 표현하는데, 리스트의 피아노 곡들을 듣고 있으면 이 영어 동사가 참으로 적합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감정 폭이 넓은 것도 저는 마음에 듭니다. 걸어드리는 음악을 들으시면서 한 곡 안에서 조표가 얼마나 자주 바뀌고 템포 변화와 무드 변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유심히 보세요.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식으로 표현하자면,
'바흐의 것은 철학적이고 중후한 느낌이라면 리스트의 것은 감각적이고 다채롭지.'
니체+단단식으로 말하자면,
'이 풍성한 음악의 시대에 아폴로적인 것(지적인 것)만 듣고 살 순 없지. 디오니소스적인 것(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원초적인 것)도 필요하지. We are spoilt for choice.'
랄까요.
▲ Liszt, Der Tanz in der Dorfschenke: Erster Mephisto-Walzer
(The Dance in the Village Inn: First Mephisto-Waltz)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1번> '마을 여관에서의 춤' (1859년)
악보에 써 있는 빠르기와 표현에 관한 지시어들만으로도 이 곡의 무드 변화가 얼마나 잦은지가 드러납니다. 옮겨 적어볼게요.
1. Allegro vivace (quasi presto)
2. Un poco meno mosso (ma poco) espressivo amoroso [2:53]
3. Presto [4:55]
4. Poco Allegretto e rubato [5:08]
5. Presto [5:47]
6. (espressivo amoroso) (short transition) [5:59]
7. Un poco meno mosso (come prima) [6:08]
8. Piu mosso [7:33]
9. Presto [8:33]
10. leggiero molto [8:52]
11. arpeggio, fff [9:14]
12. cadenza [9:32]
13. Presto [9:43]
14. ritenuto il tempo - dolce espressivo [9:55]
15. Presto [11:14]
여러분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풀이하자면,
1. 개GR 같았다가 (비글미)
2. 농염하고 나른했다가 (리비도 자극)
3. 새GR 같았다가 (이른 새벽과 해질녘의 새들의 지저귐dawn chorus)
4. 농염하고 나른했다가
5. 새GR 또
6.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 가교 역할로 농염하고 나른한 주제가 단편적으로 들렸다가
7. 농염 나른한 주제가 유리 모빌처럼 영롱하고 아름답게 변주되었다가 (빠른 속도의 연타에 주목)
8. 음산한 개GR + 새GR + 화려한 아르페지오의 농염·나른 주제가 일관성 있는 무드로 결합되었다가
9. 고음 옥타브와 저음 쿵짝 반주의 개GR이 큰 소리(f)로 활기차게 연주됐다가
10. 발랄한 비글미 나와 주셨다가
11. 농염·나른 주제가 이번에는 큰 소리(fff)의 화려한 아르페지오로 변신했다가
12. 연주자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 삽입하게 돼 있는 '카덴짜'(cadenza)가 잠깐이지만 카리스마 넘치게 등장하고
13. 트릴 위의 새GR로 바로 연결된 뒤
14. 다시 농염하고 나른했다가
15. 한층 사악해진 음산한 개GR 왈츠로 마무리
이런 현란한 피아노 음악이 나오기 위해서는 산업혁명의 덕이 있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우선, 스팀 엔진의 도입과 기술의 발달로 악기 생산량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때마침 부상하기 시작한 중산층의 음악 소비에 발맞출 수 있었다는 점과, 피아노의 재질과 작동부에 특히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그 발전들에는,
• 음역이 6옥타브에서 7옥타브(+단3도)로 넓어져 고음과 저음 대비를 더 심화시킬 수 있게 되었고,
• 현을 때리는 해머에 부드러운 펠트를 씌워 작은 음은 더 작게 연주,
• 금속 프레임 도입으로 현의 장력tension을 높여 센 음은 더 세게 연주할 수 있게 되어 음량 표현 폭이 넓어졌으며,
• (악기의 원래 이름이 '여리고 센pianoforte'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세요.)
• 건반 작동부의 ☞ 'double-escapement' 장치 고안으로 같은 음을 반복해 누르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 빠른 연타가 가능해졌고,
• 페달 장치로 더욱 서정적이고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연주가 가능해졌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음악을 누리는 환경뿐 아니라 이렇게 음악 자체도 크게 변화를 시킵니다.
저는 오늘 걸어드린 곡과 ☞ 피아노 소나타 1번 나단조, 작품번호178 (1854년), 이 두 곡을 리스트 피아노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좋아합니다.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좋은 곡이 생각 나면 추가로 걸어 놓겠습니다. ■
▲ <노다메 칸타빌레> 6권 치아키의 졸업연주 장면.
오늘 소개한 <메피스토 왈츠 1번>을 연주한다길래
만화책 보다가 반가워 의자에서 벌떡.
그림작가가 음악을 잘 아는지 작품에 어울리는 적절한 손모양 컷을 삽입했다.
'히트작'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다는 절실한 예술가상은
시대를 불문, 작곡가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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