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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경의 크리스마스 음악 본문
해피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맞아 단단이 역대 프랑스 작곡가 중 으뜸으로 꼽는 페로탱(Pérotin, 1200년경 활약)의 음악 두 곡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곡이라서 소개는 하고 싶은데 성탄절이 올 때까지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중세의 문명 전달자이자 인간 복사기였던 수도사들이 필사한 시편 98편 일부입니다.
(고마운 분들이에요. 다들 천국에 가셨기를.)
지금 들으시는 음악의 가사는 구약성경의 시편 98편 앞부분에서 따왔습니다.
"세상 끝들이 모두 보았도다" (Viderunt omnes)
[시편 98편의 3절, 4절, 2절을 발췌해 엮음]
오리지날 라틴어 가사
Vīdērunt omnēs fīnēs terræ
salūtāre Deī nostrī.
Jubilāte Deō, omnis terra.
Notum fēcit Dominus salūtāre suum;
ante conspectum gentium
revelāvit justitiam suam.
영어 가사
All the ends of the earth have seen
the prosperity of our God.
Rejoice in the Lord, all lands.
The Lord has made known his prosperity;
in the sight of the nations
he has revealed his righteousness.
한글 가사
[3절]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4절]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2절]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남성4부를 위한 곡이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낸 게 아니라 수 세기 전부터 존재하던 단성성가Gregorian chant(위의 악보)를 가져다가 최하성부bass에 깔고 그 위에 페로탱이 3성부를 새로 작곡해 얹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창작한 성부를 얹는 데도 나름 법칙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작곡가들은 곡을 자유롭게 쓰는 것보다 '시스템'에 의지해 작곡하는 것을 더 재미있어하고 좋아합니다. 시스템이 없으면 자기가 만들어 스스로를 속박하기도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니 가까이하지 마세요.)
1
원곡인 위 악보에서 가사가 촘촘히 붙은 부분[예: "Viderunt", "Nostum fecit"]들은 한음 한음 길게 잡아 늘려 지속음drone으로 처리를 하고 그 위에 까불까불 움직이는 세 개의 성부를 새로 작곡해 얹습니다. 새로 붙인 이 세 개의 성부는 음역대가 같아서 음들의 교차가 빈번히 일어나 감상자의 정신을 혼미케 합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죠. 첫 시작 "Viderunt"의 "Vi-" 부분 연주하는 데만 50초가 걸립니다.
2
반대로, 가사 한 음절에 음이 많이 붙은 곳[예: "omnes"의 "o", "Dominus"의 "Do"]은 베이스가 지속음을 그만두고 위의 3성부와 비슷한 리듬으로 성큼성큼 진행합니다. (1)의 방식만 고수하다간 하루종일 불러도 음악이 끝나지 않을 겁니다.
3
신나게 잘 가다가 뜬금없이 원곡을 그대로 들려주기도 합니다. 중간에 한 번, 끝 부분에 다시 한 번, 단선율로 된 비非박절적인 원곡이 들립니다. [예: "fines terae salutare Dei nostri. Jubilate Deo omnis terra.", "justitiam suam. (다시 처음으로) Viderunt omnes fines terrae salutare Dei nostri: jubilate Deo omnis terra."의 꽃표(*) 표시된 제창 부분]
(1)(2)(3)을 통해 구조와 짜임새에 대비를 줌으로써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긴 악곡에 변화와 다채로움을 부여했습니다. 음향도 1200년경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던'합니다. 페로탱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붓고 있는 적금을 해약해 신혼여행 때 충분히 보지 못했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어집니다. (얼마 전에 불에 타서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갔죠. 뉴스 보고 제 마음도 같이 탔습니다. ㅠㅠ)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에 걸쳐 노트르담 대성당과 그 주변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을 '노트르담 악파'라고 부르는데, 페로탱은 이 악파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곡은 그러니까, 1200년경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탄절 미사 때 특별 훈련된 수도승들이 떼지어 나와 불렀던 성가였습니다. (종교 전례 음악들은 엄숙하고 지루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중세에 이런 '스팀 펑크'적이고 'sci-fi'적 음향의 기나긴 노래가 교회에서 불렸다니, 듣는 이들은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반주 없는 단출한 중창이어도 건축물 구조 덕에 긴 잔향의 풍성한 음향이 전방위에서 감상자를 에워쌌을 테니 황홀감의 극치를 경험했을 겁니다. 반복의 양상으로 치자면 '미니말리즘 음악'의 원조로 보아도 손색이 없고, 여러 성부가 리듬 타며 신나게 부르다가 정색하고 무심 경건한 오리지날 단성성가를 부르니 병치juxtaposition의 과격함으로는 20, 21세기의 복합양식polystylism 음악들이 무색합니다.
한 곡 더 걸어봅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St Stephen's Day 미사에 불리던 성가로, 위의 음악보다 더 긴장감과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스테파노(스데반)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인물이라서 이런 절박한 가사가 쓰였습니다.
"지배자들이 법정에 앉아" (Sederunt principes)
오리지날 라틴어 가사
Sederunt principes, et adversum me loquebantur:
et iniqui persecunti sunt me.
Adjuva me, Domine Deus meus:
salvum me fac propter misericordiam tuam.
영어 가사
The princes sat, and spoke against me:
they have persecuted me unjustly.
Do thou help me, Lord my God:
Save me for thy mercy's sake.
한글 가사
지배자들이 법정에 앉아 나를 공격하고
나의 적들이 나를 박해하네
주여 나를 도우소서
나를 구하소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입니다. 안에서 본 ☞ 장미창은 이렇습니다. 유럽에 여행 많이들 가시잖아요? 유서 깊은 곳에는 으레 대성당이나 교회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곳을 방문할 때는 그곳에서 봉직했던 역대 작곡가들 이름을 찾아 음악을 미리 듣고 가시면 감동이 배가 될 겁니다. 지역민들을 위해 음악회를 베풀기도 하니 일정을 살폈다 맞춰 가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교회 건물은 그 안에 회중과 음악이 차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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