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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 '그리스도의 군병들아 일어나' (Soldiers of Christ, Arise) (1749) 본문

음악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 '그리스도의 군병들아 일어나' (Soldiers of Christ, Arise) (1749)

단 단 2023. 9. 7. 21:22

 

 

 

 

처럼 아름다웠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1992)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노먼의 회고:

(그때 막 교제하기 시작한) 제시네는 감리교 신자였는데 (장로교회 목사인) 내 아버지는 그 교파를 '읽을 줄 아는' 침례교도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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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네 가족 및 친척:

(인사하러 온 사윗감을 환영하며 온 가족이 이런저런 질문과 친밀한 농담을 쏟아내자 집안 어른 중 한 명이)

"아휴, 노먼에게 숨 돌릴 틈을 줘요. 장로교인이라 (이런 분위기가) 어색할 거예요."

 

 

이 장면들을 보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장로교 통합, 장로교 합동, 감리교, 성공회 저교회파, 성공회 고교회파를 모두 경험해본 단단은 신기해서 눈이 커졌었습니다. 교인들이 개신교 교파간 성향 차이를 저렇게 극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다쓰베이더가 어릴 때 읽은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1908)에는 감리교도를 불신하는 장로교도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군요.

 

현재 교회 다니고 계시거나 다니셨던 분들이여, 감리교도와 장로교도의 차이를 느끼십니까? 제가 둔했던 걸까요? 아니면 교회에서 음악일 하느라 정신이 팔려 교단간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걸까요? 

 

 

 

☞ 개신교단들의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누리터 문서가 사라질 경우를 대비해 PDF로도 첨부)

개신교단들의 차이점을 알고 싶은데요.pdf
0.20MB

 

 

글 쓰신 분이 정리를 간결하게 잘해주셨습니다. 자라 온 배경이 있으니 저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차이에 특히 주목해봅니다.

 

"또 한 가지 장로교의 특징은 예정론에 있다. 구원에 관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론이다. 만세 전에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하시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가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보존의 은총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실제 구원을 얻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구원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만심이 들어갈 여지를 없애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정론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다 예정된 것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아담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원래 지옥 가기로 예정된 사람은 예수 믿어도 소용없단 말인가? 예정론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교단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감리교이다. 감리교는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가르친다. 즉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한다는 이론인데,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이 먼저 사람에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예비적 은총을 주시면, 그는 그 은총에 힘입어 자신의 의지력을 발동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이다. 감리교의 두 번째 특징은 성서와 이성과 전통과 경험의 조화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성서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지만 성서를 독단적으로 해석하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므로 균형 잡힌 성서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강요한다면 여자는 교회에서 입도 뻥긋하지 말고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성과 전통과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면 성령의 의도에 맞는 올바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 주장에 더 수긍이 가십니까? 혹은 어느 쪽 주장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양시쌍비兩是雙非, 저한테는 둘 다 성경적으로 보이고,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신학적 입장에 미흡함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성경 지식이 많지 않은 날라리 신도임에도 단단은 성경에서 양쪽의 근거가 될 만한 예들을 당장 뽑을 수 있습니다. ☞ 출애굽기 12장에 감리교의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예가 나옵니다. 각 집의 맏아들 목숨을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이 맞지만 이 전언을 믿고 ☞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발라 두는 것은 인간이 의지를 발휘해 행해야 할 부분이죠. 

 

(신기하게도, 이때 믿음의 강도는 중요치 않아 보입니다. 확신에 차서 힘차게 찬송 부르며 구원의 순간을 기다리는 집과, '그래도 혹시' 하며 맏아들 끌어안고 벌벌 떨며 숨 죽이고 기다리는 집, 두 집 다 구원 받습니다. 동료 인간의 믿음이 좋으냐 아니냐, 상급을 쌓았느냐 아니냐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제 시부께서는 높은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면 63빌딩이나 5층짜리 빌딩이 별 차이 없어 보인다는 표현을 하십니다. 아주 높은 기준을 갖고 있는 이한테 공로나 선행을 쌓아 구원 받아보겠다는 생각은 그래서 틀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장로교 신자들 중에는 감리교의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지적하며 심지어 이단 취급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전능자의 성스러운 구원 계획에 '인간의 손때'가 묻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는 그 의지조차도 하나님의 이끄심[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으로 보는 걸까요?

흠...

나는 창세 전부터 예정되어 구원받을 자, 사랑하는 내 배우자 혹은 내 자녀는 예정 받지 못해 영멸할 자라고 쳐봅시다. 끔찍하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너무 슬퍼서, 하나님께 섭섭해서 대성통곡하느라 있던 믿음도 달아날 것 같군요.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허허... 가룟 유다의 인생은 뭐였나, 깊은 상념에 젖곤 합니다.

 

그런데 또, 예정론이 진리로 느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신이 세계를 창조한 의지로 우주를 지배하며 인간의 구원에 관한 계획을 이루려는 뜻, 또는 그 목표로 이끎.], 혹은 일하시는 방식이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물음표가 한가득인 상황, 내 이성과 의지로는 믿음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면 경이로움에 휩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구나, 예정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죠. 

 

예정론 비판, 어떻게 봐야 하나

칼뱅의 예정론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 예정설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우리가 천국 문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신학이 아니라 삶에 대하여 물으실 것이다."

칼빈과 웨슬리의 8대 교리를 비교분석한 돈 톨슨의 『웨슬리 vs 칼빈』, KMC, 박도웅 옮김 [미리보기]

 

 

 

서론이 길었습니다.

 

하여간 교파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올해 감리교계 리더들과 석학들이 기고한 글들로 꾸려진 월간지를 다달이 읽을 기회가 생겼는데, 어? 다릅니다! 무식한 우리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차이가 윗분들이 쓴 정제된 글을 보니 드러납니다. 좀 더 사회 참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면서 살짝 좌파스럽달까요. 딱 제 '취향'의 교파라는 생각을 하고는 무릎을 쳤었죠.  

 

그 감리교계에 최근 경축할 만한 큰 행사가 있었다 하여 블로그에 좋아하는 음악과 찬송가를 소개하고 있는 단단도 숟가락 얹어봅니다. 

 

이달에는 감리교 운동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92)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88)의 찬송시hymn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시는 출판된 것만 무려 4천 5백 개가 넘으며 이를 통해 형인 존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회의 전파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존 웨슬리는 누구나 알고 칭송하는데 동생 ☞ 찰스의 공은 자주 간과되곤 합니다. 감리교가 다른 교파와 차별되는 큰 지점 중 하나가 바로 막대한 찬송 유산이라고 하죠. 우리가 아는 찬송가들 중에 찰스 웨슬리가 작시한 것들이 꽤 많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찬송시는 웨슬리 형제가 포교 당시 받았던 비난과 핍박에 대항해 지은 것으로, 그야말로 ‘전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아 일어나 갑옷을 입고
하나님이 영원한 아들을 통해 주시는 힘 안에서 강건하여라 
만군의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굳세어라 
예수의 힘을 의지하는 자는 넉넉히 이기느니라" (1절)

[단단의 영한 발번역 감수: 블친 더가까이 님]

 

신자를 병사에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 훌륭한 선례가 있지요? 

 

에베소서 6장 10-17절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나님의 전신갑주",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등 전사를 연상케 하는 상징적 단어들이 가득합니다. 여덟 줄로 구성된 절이 무려 16개나 되는 기나긴 찬송시이지만 예배 시간에 부를 때는 보통 3-4개 절로 추립니다.  

 

 

Soldiers of Christ, arise,

and put your armour on,

strong in the strength which God supplies

thro' His eternal Son;

strong in the Lord of hosts

and in His mighty pow'r,

who in the strength of Jesus trusts

is more than conqueror.

 

 

2 

Stand then in His great might,

with all His strength endued,

and take, to aid you in the fight,

the panoply of God.

From strength to strength go on,

wrestle and fight and pray;

tread all the pow'rs of darkness down

and win the well-fought day.

 

 

3 

Leave no unguarded place,

no weakness of the soul;

take every virtue, every grace,

and fortify the whole.

That, having all things done

and all your conflicts past,

ye may o'ercome thro' Christ alone

and stand complete at last.

 

 

그런데 영국과 미국에서 이 찬송시에 붙여 부르는 곡tune이 다릅니다. 찬송가 상단 우측의 작곡자 이름 위에 쓰인 “6.6.8.6.”과 같은 숫자의 나열은 찬송시의 음절 개수metre를 뜻하는데 이에 맞춰 쓴 음악이라면 어떤 것이든 붙여 부르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의 찬송시가 여러 곡을 가질 수 있는 것, 혹은 하나의 곡이 여러 찬송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며,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순간에 악사들이 연주했다고 알려진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의 선율이 ☞ 미국 것(새찬송가 338장)과 ☞ 영국 것 중 어느 것이었는지를 놓고 지금까지 의견이 갈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래에 걸어드리는 두 곡 중 어느 쪽이 웨슬리의 찬송시에 더 잘 어울리는지 비교해 들어보십시오. 악보는 다쓰베이더가 또 말끔하게 새로 그려주었습니다.   

 

 

 

 

 

 

 

 

 

미국판.

영국인 조지 엘비 작곡. 1868년.

찬송가 25장 '면류관 벗어서'의 선율과 똑같습니다. 놀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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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MB

 

 






 

 

영국판.

영국인 에드워드 네일러 작곡. 1902년. 

이 선율은 여러분께 좀 생소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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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어느 곡이 가사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는지요?

혹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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