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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길(Passus duriusculus) 탄식 저음의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 - 헨리 퍼셀 《다이도와 이니어스》 '내가 땅에 묻힐 때' Dido's Lament 'When I am Laid in Earth' from Henry Purcell's 《Dido and Aeneas》 (1688) 본문
험난한 길(Passus duriusculus) 탄식 저음의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 - 헨리 퍼셀 《다이도와 이니어스》 '내가 땅에 묻힐 때' Dido's Lament 'When I am Laid in Earth' from Henry Purcell's 《Dido and Aeneas》 (1688)
단 단 2023. 10. 12. 17:00
'베이스 연주자 안아주기' 날이 돌아왔습니다. 작년 이날에 제가 베이스가 근사한 음악들을 소개했었지요.
☞ 바흐, 재즈 워킹 베이스(walking bass)의 선구
이번 해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멋진 베이스를 가진 음악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악보를 더듬더듬 대충이라도 읽으실 줄 안다는 전제하에 글을 써볼게요. 제가 제 블로그 독자의 수준을 좀 높게 잡고 있습니다.
한 옥타브octave 사이를 이렇게저렇게 채운 것을 음계scale라고 합니다. 이 악보에서처럼 건너뛰는 음 없이 조로록 채울 수도 있고, 군데군데 건너뛸 수도 있고,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계 중 '솔sol'을 시작음으로 하는 단음계minor scale를 그려보았습니다. 단조minor key 음악을 만들기 위한 단음계는 장조major key 음악을 만들기 위한 장음계major scale에 비해 어둡고 슬픈 느낌을 줍니다. 음악의 분위기mood를 형성하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이 음계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위 음계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음들은 각각 자기 역할을 드러내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맨 첫 음은 으뜸음tonic, 네 번째 음은 버금딸림음sub-dominant, 다섯 번째 음은 딸림음dominant, 이런 식으로요.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이 정도는 배우셨을 거예요.
예로부터 지금까지 작곡가들이 슬픔, 고통, 고난, 불안, 낙심, 죽음 등을 표현하기 위해 흔히 쓰는 관행 중 음계의 으뜸음tonic에서 딸림음dominant까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descending tetrachord. 상승하는 음들보다는 하강하는 음들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 고통과 슬픔 등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아무래도 더 적합해 보이지요.
으뜸음에서 딸림음까지를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빠짐없이 모두 써서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슬픔, 고통, 고난, 불안, 낙심, 죽음 등의 무게가 한층 더 무거워진다고 여겼습니다. 이를 '반음계적 4도chromatic fourth'라고 부릅니다. '크로마틱'이라는 단어는 사진이나 미술 쪽에서도 쓰고 있지요?
이 선율이 주는 효과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라틴어로 '험난한 길Passus duriusculus'이라는 근사한 별명까지 다 붙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파수스 두리우스쿨루스'라고 읽습니다. [파수스 = 길, 여정. 두리우스쿨루스 = 험난한, 어려운.] 이 '험난한 여정' 선율은 작곡가라면 누구나 사용했기 때문에 음악 예를 들자면 끝이 없는데요, 오늘 글에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아리아로 이 선율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영국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95)입니다. 퍼셀 다음에는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이 영국으로 건너와 영국 바로크 음악의 대를 잇죠. 헨델은 독일 태생의 이태리 작풍을 가진 영국 작곡가입니다. (응?) 저는 헨델을 소개할 때마다 재미있어서 웃습니다. 이태리뿐 아니라 독일과 영국의 음악적 특성도 물론 보이고 있고요. 글로벌한 사람이에요. 옛날에는 이런 작곡가들이 많았습니다. 유럽은 개성 있는 작은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창작이나 학문 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 되어줍니다. 퍼셀의 음악에서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적 특성이 두루 보입니다. 참고로, 오늘 소개해드리는 오페라가 완성되었을 때 J. S. 바흐와 헨델은 세 살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퍼셀이 너무 이른 나이[36세]에 죽은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짧은 생애치고는 작품을 꽤 많이 남겼지만 좀 더 살면서 작품을 더 내고 후배들을 키웠으면 영국 바로크 음악이 훨씬 융성했을 거라면서요.
퍼셀이 쓴 오페라 《다이도와 이니어스Dido and Aeneas》의 여주인공 다이도가 부르는 아리아가 단단이 현재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아리아인데,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가락도, '험난한 여정'의 베이스 선율도, 복잡미묘한 반음계적 화성(화음)도, 바로크 단조 음악 특유의 비장미도, 이 곡의 후주가 내는 최고조의 진지한 분위기도, 음악적 아이디어와 전개 방식도, 구조도, 모두 훌륭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한숨)
▲ Nathaniel Dance-Holland (1735-1811). Dido and Aeneas (1766). oil on canvas. 122×1,718 cm. Tate Britain.
《다이도와 이니어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7,18세기는 신화 오페라의 전성기였습니다.
트로이 성이 함락된 후 이니어스 왕자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카르타고 해안까지 오게 되고, 이곳을 다스리는 여왕 다이도와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평소 다이도 여왕을 시기하던 한 마법사가 다이도를 파멸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며 제우스 신이 이니어스에게 다시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명령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이 말을 곧이 들은 이니어스는 고민에 빠진다. 결국 이니어스가 다이도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자 다이도는 이니어스가 떠난 바닷가에서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국의 소프라노 엘린 매너헌 토마스Elin Manahan Thomas의 청명하고 여린 음색으로 듣겠습니다. 바로크 음악 훈련을 특히 잘 받은 성악가이기도 하고 목소리가 이 아리아에 잘 어울리는 듯하여 선택했는데, 아리아를 이탈리아어나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들으니 좀 더 친숙한 느낌이 들고 오페라가 아니라 마치 뮤지컬을 듣는 듯합니다.
1. Recitative
(레시터티브: 말하듯 노래하는 부분. 본격적으로 노래하는 부분인 아리아 앞에 붙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퍼셀의 레시터티브는 감정을 실어 낭독조로 말하기보다는 단어의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해 좀 더 노래처럼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Thy hand, Belinda, darkness shades me,
벨린다*, 그대의 손을 주오. 어둠이 나를 가려오네.
On thy bosom let me rest,
그대의 품에서 나를 쉬게 해주오.
More I would, but Death invades me;
더 살기를 원하지만 죽음이 나를 엄습해오네.
Death is now a welcome guest.
죽음은 이제 반가운 손님.
* 다이도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던 시녀confidante
2. '험난한 여정' 베이스 솔로 [0:50]
(곡이 끝날 때까지 총11회 반복)
3. Aria [1:05]
(죽어가면서 부르는 아리아)
When I am laid, am laid in earth, May my wrongs create
내가 죽어 땅에 묻힐 때, 내 잘못으로 하여금
No trouble, no trouble in thy breast;
그대 가슴에 한이 되지 않기를 바라오.
Remember me, remember me, but ah! forget my fate.
나를 기억해주오, 기억해주오, 그러나, 아! 나의 운명만은 잊어주오.
Remember me, but ah! forget my fate.
나를 기억해주오, 그러나, 아! 나의 운명만은 잊어주오.
4. 기악 후주 [3:51]
마지막까지 저 '험난한 길' 베이스가 이어집니다. 베이스 위로는 붙임줄 없이 비화성음suspended notes을 써서 날카롭게 부딪히는 음향으로 고통의 느낌을 가중시키고, 한숨음형sighing figure을 사용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허무한 바닷물결을 훌륭하게 형상화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후주가 아닐까 싶은데, 저는 박해일, 탕웨이 주연의 《헤어질 결심》(2022)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 아리아를 떠올렸습니다.
악보를 보면서 다시 들어볼까요?
56초부터 나오는 베이스를 특히 눈여겨보십시오.
'험난한 여정' 베이스, 탄식 저음입니다.
▲ 오페라 《다이도와 이니어스》의 아리아 '다이도의 탄식'에 앞서 연주되는 레시터티브.
반음계적 하강 골격음이 보인다.
영리하게도 작곡가가 레시터티브 부분 역시 반음계적 하강 선율로 계획해 썼습니다. 분홍색 표시한 음들을 따라가보세요. (오늘 글에 쓰인 악보들도 전부 다쓰베이더가 그려주었습니다.)
▲ 오페라 《다이도와 이니어스》의 아리아 '다이도의 탄식'에 쓰인 반복되는 베이스 선율.
죽음, 고난 등을 상징하는 '험난한 길' 반음계로 되어 있다.
레시터티브가 끝나고 나서는 곧바로 이 곡의 주된 음소재인 '험난한 길' 베이스를 소개합니다. 그리고는 아리아가 끝날 때까지 이 베이스 선율을 열한 번 반복해 울립니다. 베이스 선율이 멈추지 않고 끝까지 반복되는, 단조로 된 3박자의 음악을 '파사칼리아passacaglia'라고 부릅니다. 즉, 이 곡은 "'험난한 길' 베이스로 된 '파사칼리아'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잘 기억해 두셨다가 어디 가서 유식한 척 하세요. 저는 파사칼리아(샤콘)의 반복되는 비장미 가득한 선율과 화성 진행을 들을 때마다 벗어날 수 없는 끝없는 윤회輪廻가 연상돼 고통스럽습니다. 좋아하는 악곡 형식입니다. (변태)
그런데 이 곡의 여러 묘미 중 으뜸은, 제 생각엔, 소프라노가 부르는 아리아 선율이 베이스 선율의 반복 주기에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진행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 덕에 곡이 다차원적이고 입체적으로 들리죠. 설명이 어려워질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언급하렵니다. 한 마디로, 퍼셀이 아주 노련한 작곡가라는 뜻입니다.
내년 이맘때 또 베이스가 근사한 곡을 들고 나타나겠습니다. 음악을 사랑해주시는 여러분께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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