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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Oppenheimer 본문
이달의 영화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 예고편의 포스터를 보니 미국에서는 7월 21일에 개봉했군요.
한국은 광복절인 어제 개봉했습니다. 개봉일 '센스' 있게 잘 정했죠.
햇빛을 쬐고 싶지 않아 마지막 시간으로 표를 끊었더니 3시간짜리 영화라서 엊저녁 10시 45분에 입장해 오늘 새벽 1시 55분에 나왔습니다.
우리 권여사님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 감독 영화 팬,
그 딸은 크리스토퍼 놀란(1970- ) 감독 영화 팬입니다.
놀란 감독과 동시대 사람인 것을 단단은 늘 신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놀란 감독 영화 좋아하고, 공방이 오가는 법정 영화 좋아하고(이 영화에서는 청문회), 시간이든 시점(視点, point of view)이든 뒤죽박죽 왔다갔다하는 영화나 다층적인 플롯의 영화 좋아하고, 편집이 리드미컬하거나 음악적인 영화 좋아하고, 수학자나 물리학자를 섹시하다고 여기며 흠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충족시킵니다. 게다가 저는 '재미'에 대한 민감도도 굉장히 높아 남들 지루해하는 이야기도 흥미진진해하며 잘 봅니다. 고로, 이 영화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습니다. 실존 인물을 다룬 전기 영화 중 수작으로 꼽고 싶어요.
그런데, 놀란 감독 영화는 어려우니 사전에 공부를 좀 하고 봐야 한다며 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도 공부하라는 분들이 있어요. 아니오. 저 물리학 하나도 모르고, 당시의 정치나 사회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하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군 핵폭탄을 개발한 과학자들 중 한 명이 주인공이라는 사실 하나만 겨우 알고 가서 봤습니다. 포스터도, 예고 동영상도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내용 이해하며 따라가는 데 전혀 문제 없었습니다. 제발 부담 갖지 말고 그냥 가서 즐기다 오세요. 심지어 출연하는 배우에 대한 정보도 일절 없이 갔다가 좋아하는 배우, 유명 배우 잔뜩 나오는 거 보고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 왔습니다. 감독이 친절하게도 오펜하이머 1인칭 시점의 장면들에는 컬러를, 스트로스 시점의 장면들에는 흑백을 써서 구분해줍니다.
줄거리는 누리터에 많이 있으니 저까지 또 쓰고 싶지는 않고, 이 영화의 특징과 느낀 점을 두서없이 적어봅니다.
세 시간 동안 정말 쉴새없이 대사가 쏟아집니다. 이렇게 대사 많은 영화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인물들의 대화만 가지고 긴장감 있게 세 시간을 끌고 나가는 감독의 역량에 경의를 표합니다.
대사만 많은 게 아니라 등장인물도 많습니다. 그런데 배역을 참 잘했고 연기들도 다들 잘했어요. 특히 킬리언 머피는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인물의 표정과 대사에 집중해 전개되는 영화라서 배우의 연기력이 두드러집니다.
오펜하이머가 복잡한 물리학 생각과 향수병으로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영국 유학 시절 장면들에서는 물리학적 영상들이 꼴라쥬처럼 화면에 턱턱 박히는데, 매우 아름답습니다. 과학자가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영화 보면서 단단도 당시의 지식인이었으면 갓 태어난 공산당의 기치에 매력을 느끼고 (열혈) 당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으로선 성공한 공산주의 사례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으니 피식 웃지만요. 굳이 우파냐 좌파냐 묻는다면 (동의하지 않으실 신자들도 많겠지만) 좌파 사상이 제게는 좀 더 기독교적(성경적)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사실 정치나 전시戰時에 시달린 집단에는 과학자들만 있는 게 아니지요. 작곡가들은 또 국민들·인민들 사기 진작과 체제 선전을 위해 수시로 동원되어 쓰기 싫은 곡을 억지로 써야 했고 검열로 쓰고 싶은 곡을 쓰지 못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과 더불어 예술가들도 타국으로 망명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정치와 체제에 휘둘려 희생만 당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요. 이때가 아니면 언제 국가로부터 이 많은 연구비를 지원 받아 실컷 연구해보겠나,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기기도 했을 텐데요. 전쟁 한 번 치르고 나면 과학과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해 왔잖아요. 게다가, 과학계에서도 누가 먼저 새로운 걸 세상에 내놓느냐가 첨예한 화두 아니겠습니까. 내가 안 하면 저 놈이 할 텐데. 조바심이 과학자를 움직이는 큰 원동력 중 하나일 것이고, 영화에서도 독일과 소련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도 경쟁자로 놓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물리학자면 다들 수학은 기본으로 무지무지 잘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인슈타인도 오펜하이머도 "수학엔 자신 없네" 죽는소리하는 대목에서 재밌어서 웃었습니다. 이건 마치 작곡가라면 다들 피아노를 무지무지 잘 치는 줄 알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러 있는 것과 같은 형국.
정사 장면이 세 번 나오는데 청문회장 안에서의 과감한 연출은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엄격한 공적 장소에서, 그것도 아내가 듣고 있는 데서 진술하고 시인하려면 정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을 겁니다.
영화 초반에 T. S. 엘리엇의 <황무지>, 피카소의 회화, 작곡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발레곡 <봄의 제전>이 젊은 시절 오펜하이머에게 영감을 준 예술작품으로 언급되는데, <봄의 제전>은 저도 역대 작곡된 발레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음악사 교재에서도 한참을 다루는 아주 파격적인 곡이죠. 따로 글 써서 소개해드릴게요.
히로시마 원폭을 생생히 그려낸 음악 작품이 있으니 감상해보세요. 제가 소개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에 대한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 음악은 한 번쯤 들어보고 가시면 좋을 듯합니다. 영화 중간에 유사한 소리들이 나오거든요. 이제는 고전이 된 유명한 곡이라서 이 영화의 음악을 작곡한 이도 잘 알고 '오마쥬'로 차용했을 겁니다.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런 류의 소리는 이제 영화에 흔히 쓰이지만요.
《덩케르크》(2017), 《테넷》(2020) 등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의 소리들도 들릴 텐데, 이것들도 이제는 긴장감을 주기 위한 상투 어법cliché이 되어서 어느 한 작곡가의 전매특허 소리라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꼭 아이맥스로 봐야 하느냐? 아니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과 주변인들과의 갈등을 조명한 영화라서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그런 '스펙타클'한 투하 현장의 폭발 장면은 나오지 않으므로 아이맥스관이 아니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음악이 오펜하이머의 심리를 드러낼 때가 많아 중요하므로 음향 좋은 곳에서 볼 필요는 있습니다.
성격 이상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보고 나니 이 나이에 새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의지가 솟습니다. 성격 이상한 건 충족하니 훌륭한 업적만 남기면 되겠습니다.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보았는데, 관람을 마치고 새벽 2시 넘어 나오니 그 복잡한 테헤란로 일대에 차와 사람이 없어 집에 걸어 오는 동안 초현실감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영화는 마지막 시간으로 예매해서 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