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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 스머프

먹고 싶지 않은 걸 먹지 않을 권리

단 단 2010. 4. 18. 10:34

 

 

 

 

 

 

어두웠던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자칭 미식가였던 내 아버지는 주지육림酒池肉林 세상을 꿈꾸며 세상의 산해진미라는 것은 가리지 않고 모조리 즐기셨지만 어릴 적 생선을 잘못 먹고 크게 혼이 난 뒤로 평생 생선만은 드시지 않았다. 아마 식중독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넘겼던 모양인데, 어릴 적 트라우마가 평생을 간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문제는 이 영감님이 생선 냄새조차도 맡기 싫어한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집에서 생선 요리만큼은 해먹을 수가 없었고, 멸치 다시로 국이나 찌개를 끓이는 것도 일절 금지였다. 영감님이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에 생선 냄새가 남아 있기라도 하면 그 날은 밤새도록 엄마와 우리를 못살게 들들 볶아댔으므로 집에는 아예 생선을 들여놓지도 않게 되었다. 대신 식탁에는 언제나 고기가 넘쳐났다. "왜 고기를 안 드세요?" 지금도 사람들이 내게 물으면 시시콜콜 설명하기가 귀찮아 "어릴 때 이미 평생 먹을 고기를 다 먹어 뒀거든요." 농담조로 말하곤 하는데, 사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다른 해산물은 괜찮지만 생선만은 안 된다는 이 특이한 미식가 독재자께서는 살과 꼬리와 내장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집에서 소 젖통에, 혀에, 머릿골까지 구워 먹으며 식도락을 한껏 즐기곤 하셨다. 나도 고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풍기는 고기 냄새와 연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골치가 자주 아팠었다.

 

아무거나 잘 먹는 성격 좋은 큰 오빠나 셋째 오빠와는 달리 감수성이 지나치게 예민했던 둘째 오빠와 나는 어릴 때 입이 좀 짧았다. 하루는 전복죽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고 있는 나와 둘째 오빠를 이 영감님께서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호되게 윽박지르며 야단을 치는 바람에 식당에서 음식을 앞에 두고 눈물을 뚝뚝 흘린 적이 있었다. 열 살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이것이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향해 행사하는 횡포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열 살밖에 안 된 꼬마의 생각에도 이건 하나도 공평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른인 자기도 안 먹는 음식이 있으면서 나한텐 왜 윽박지르는 거야? 그리고 징그럽기로 치면 생선보다 전복이 훨씬 더 징그럽잖아?'


나는 지금도 열 살짜리 꼬마가 전복을 안 먹으려 드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야 그깟 전복쯤 아무 문제없이 먹지만서도. 이젠 비싸서 못 사 먹지. 자라면서 때가 되면 어릴 때 안 먹던 음식도 다 알아서 먹게 돼 있다.




*   *   *

 

 

 

큰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밤 늦게 다들 출출해지자 큰아버지께서 사촌 언니들과 나를 동네 포장마차로 데리고 가셨다. 그런데 맙소사, 시뻘겋게 양념된 뻣뻣한 닭발이 놓여 있는 것 아닌가. 우리 아버지나 큰아버지나 성격이 두 분 다 비슷하니 곧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을 알아차렸지만 야밤에 꼬맹이가 덜렁 혼자 집에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저 조용히 앉아 마음속으로 십자가나 긋고 있었다. 역시나 닭발을 먹지 않겠다는 나를 향해 큰아버지의 맹비난과 공격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우리 큰아버지 목소리는 우리 아버지보다 세 배는 더 크다.) 사촌 언니들은 모처럼 놀러왔다가 곤경에 빠진 이 가련한 동생 편들어 줄 생각은 않고 열심히 닭발을 뜯으며 자기 아버지와 한편이 돼 나를 성격파탄자 보듯 조롱하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내가 안 먹으면 자기들 몫이 더 생기거나 돈을 아낄 수 있을 텐데 왜! 지금도 나는 열 살짜리 꼬마가 닭발을 안 먹으려 드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만일 내게 아이가 있다면 부모 된 입장에서 나는 내 아이가 불량식품 사 먹고 돌아다니는 것은 '적당히' 말릴 작정이다. 한편, 고기를 먹고 싶어하면 질 좋은 고기를 사다 정성껏 양념해서 구워 줄 용의도 있다. 고기 맛을 알고 안 먹는 것과 처음부터 기회를 박탈 당하는 것은 다른 데다 공평한 일 같지가 않아서다. 하지만 내가 즐기는 음식, 먹으면 몸에 이로울 만한 음식을 아이가 싫다는데 윽박질러 가면서까지 억지로 먹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버려 두면 자라면서 언젠가는 먹게 될 것이고 성인이 된 후에도 본인이 싫어서 안 먹는다면 그건 개인의 취향 문제이기 때문에 나무랄 생각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어른들도 누구나 다 싫어서 안 먹는 음식이 한두 가지쯤은 있지 않는가 말이다. 먹고 싶지 않은 걸 먹지 않을 권리는 아이들에게도 있다.



휴...


이십 여년이 훌쩍 지나 우리 집 영감님과 큰아버지의 child abuse를 폭로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군. 두 분, 이제는 용서해 드리리다.

 


참, 'child abuse' 하니 생각 났는데, 손 작은 꼬맹이들 피아노 콩쿨이나 입시 과제곡으로 옥타브가 난무하는 곡을 선정하는 것 역시 아동학대에 해당한다고 본다.




*   *   *

 



오늘의 머핀 재료:

 

달걀, 쵸콜렛, 버터, 뜨거운 물,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코코 파우더, 카스터 슈가, 체리, 사워 크림, 아이싱 슈가, 라즈베리 잼. 끝.

 


'블랙 포레스트 갸또'의 머핀 버전이다. 머핀과 컵케이크의 근본적인 차이 중 하나는 바로 유지의 양. 이 유지의 양과 공정이 텍스처를 결정하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하도 기름지고 촉촉한 걸 좋아하다 보니 요즘 시판 머핀들은 다들 컵케이크처럼 유지를 잔뜩 넣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제과명장이라는 김영모씨의 책을 봐도 머핀인지 컵케이크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유지 사용량이 많아 아쉽다. (미국인들, 설마 그런 기름 범벅 머핀을 아침 식사로 먹는 건 아니겠지. 가만. 크화썽을 아침으로 먹는 프렌치들도 있는데. )

 

가장 바람직한 것은 머핀의 근본에 어긋나지 않도록 일단 머핀 자체는 담백하고 퍽퍽하게 구운 후 먹을 때 취향껏 크림이나 소스를 발라먹게 하는 것. 컵케이크보다는 머핀이야말로 저 스콘처럼 소스나 크림이 필요하다고 본다. 쵸콜렛과 사워 크림을 섞어 발라 먹으니 퍽퍽했던 머핀도 술술 넘어간다. 역시 간식은 사악해야 맛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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