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spotter

골드 우유를 달라 본문

투덜이 스머프

골드 우유를 달라

단 단 2014. 5. 5. 00:00

 

 

 

 제대로 하고 있는지 5년 더 지켜보고 나서

당신네 제품 다시 사 줄지 말지 결정하겠노라.

 

 


한참 머리 굵을 때인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 -


집에 우유 배달을 신청해 먹은 적이 잠깐 있었다. 우유 회사는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간 일주일에 두 번, 골드 우유 세 개씩 배달해 줄 것을 주문했었다. 그러니까 골드 우유를 일주일에 여섯 개 주문해 먹은 것이다. (제품명은 기억이 안 나므로 편의상 고급 우유는 '골드', 보통 우유는 '실버' 우유라 쓰기로 한다.)


처음 한 달은 꼬박꼬박 골드 우유 세 개가 배달돼 왔다. 한 달이 지나자 골드 우유 두 개와 실버 우유 두 개가 오는 날이 가끔씩 생겼다. 의아했지만 골드 우유 양이 모자라 실버 우유로 대신 넣어 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골드 우유 하나 대신 실버 우유 두 개를 넣어 주었으니 전체 값은 대략 비슷하겠다 싶어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실버 우유로 대체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심한 날엔 골드 우유 하나와 실버 우유 네 개가 올 때도 있었다.


나는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개수를 늘려 준다 해도 그렇지, 골드 우유를 시켰는데 일부를 실버 우유로 바꿔 넣어 주는 건 명백한 계약 위반 아니우, 엄마?" 권여사님은 내가 배달하는 곳에 전화 걸어 따지겠다고 할 때마다 극구 만류를 하셨다. "얘, 단단아, 인생 너무 팍팍하게 살지 말고 그냥 먹어라.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일어나는 일인데다, 대신 우유 하나를 더 넣어 주잖니."


마뜩지는 않았지만 우윳값을 지불하는 것은 부모님이고, 골드 우유 대신 실버 우유 먹는다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뭐...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세월이 지나고, 흰머리가 찔끔 보이기 시작했을 때, 권여사님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양유업 밀어내기 사건을 목도하고 나니 골드 우유가 왜 실버 우유로 가끔씩 둔갑해 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내막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밖에다 대고는 차마 말 못할 딱한 사정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가령, 대형 마트에 납품하는 수많은 을이라든가...  그래, 너무 따지며 팍팍하게 인생 살지 말자. 다 사정이 있는 게지. 어른들 말씀이 옳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관행이라는 이름을 달고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다시 미심쩍어 보이기 시작했다. 골드 우유 세 개를 주문했으면 골드 우유 세 개를 받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맞다. 여객선의 적정 화물량이 987톤이면 987톤까지만 싣는 게 맞다. 내야 할 세금이 50만원이라면 50만원을 내는 것이 맞다. 봐주고 꼼수 부리고 잔머리 굴리며 사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계약대로, 원칙대로, 법대로, 단순하고 우직하게 사는 게 훨씬 편하고 쉽지 않나?


딱한 사정에 처해 있을지 모르니 계약 좀 위반해도 그놈의 '정'을 발휘해 인내하자는 생각, 꼼꼼히 점검하고 따져야 할 일을 '설마 큰일 나겠어?' 하며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자는 생각들이 모여 결국 요 모양 요 꼴의 나라를 만든 것 아닌가. 딱한 사정은 마냥 봐주고만 앉았을 게 아니라 뒤에 어떤 음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 세상에 알리고 공분을 일으켜 고쳐 나가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 참에 ☞ 만화 한 편 보시라.)

 

해외 여행 가니 이제는 한글 안내문도 보이네, 눈부신 발전을 이룬 우리 대한민국 만세, '자뻑'하던 우리 부모님 세대 노인들의 환한 얼굴이 떠오른다. 계약과 원칙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얼렁뚱땅 국가를 만들어 낸 사람들. 암만 봐도 어른들이 잘못했다. 

 

 

 

'투덜이 스머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석, 차례상, 제사상  (7) 2014.08.28
인간과 식량  (4) 2014.08.01
미국  (3) 2014.05.29
짠 밥상  (9) 2014.05.16
내 친구의 아들 딸  (2) 2014.04.21
기상 캐스터 몸매가 왜 중요해?  (12) 2014.03.12
내 아들 딸만큼은 절대 이런 운동 시키지 않으리  (2) 2014.02.22
화려한 상차림 강박증  (8) 2013.09.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