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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있는 사물

볼셰빅 이리나 우스트볼스카야 Irina Ustvolskaya, a Bolshevik

단 단 2010. 5. 27. 02:54

 

 

 

 


우리 미일리어'Melia에게 외국인 친구가 생겼습니다. 이름은 '이리나Irina', 성은 '우스트볼스카야
Ustvol'skaya'라는군요. 이리나 우스트볼스카야. 어떻게 해서 이 파란 눈의 러시아 처녀가 영국 아가씨 미일리어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사연인즉슨 이렇습니다. 1903년 제3차 볼셰빅 전당대회가 바로 이 런던에서 열렸었는데(그렇습니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 유명한 <공산당선언>이 발간된 곳도 이곳 런던이었습니다.) 전당대회 참석차 런던을 방문했던 이리나는 런던 외곽의 어느 꽃이 만발한 작은 티룸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퍼석해 보이는 동그란 빵에 잼과 꾸덕꾸덕한 이상한 노란 크림을 열심히 바르고 있는 미일리어를 만났다고 하죠.

 

아아, 그렇습니다. 둘은 이 때 이렇게,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만났었지요. 대각선 맞은 편 테이블에 앉아 미일리어의 깃털 꽂힌 모자가 아주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던 이리나는 용기를 내어 미일리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미일리어는 한편 이리나의 차 음용법이 매우 독특해 흥미를 갖고 지켜보던 터였죠.


'우유와 설탕도 넣지 않은 쓴 차를 잼 한 술 먼저 입에 머금고 나서 천천히 마신다니? 오, 러시아 사람들은 정말 희한하기도 하지.'

 

 

 

 

 

 

 

 


귀한 티가 나는 고운 외모로 봐서 이리나는 마치 백러시아쪽 부유한 혹은 귀족 집안의 후손 같아 보이지만 그녀는 사실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습니다. 성실했지만 비참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던 부모를 보면서 이리나는 머지않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새 세상이 건설되리라는 믿음을 키우고 있었지요.

 

그녀의 연인 알렉세이 역시 볼셰빅이었으나 그는 부유한 상인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형은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된 평화시위대의 가두행진에 참여했다가 크렘린 궁 앞에서 왕실 기마대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복수를 꿈꾸는 미망인 형수 아레나와 함께 알렉세이는 현재 독일에서 적군赤軍을 위한 비밀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독일의 한 유서 깊은 음악학교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적을 두고 동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는 것이 그의 임무입니다.

 

이리나가 알렉세이를 못 본 지는 꽤 되었습니다. 이리나는 그의 안전이 늘 걱정입니다. 무엇보다, 독일 처녀와 바람이나 나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이리나가 처음부터 열성적인 볼셰빅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알렉세이의 품에 안겨 때로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왜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원하니까."

"누가 원한다고 그래..."

"지금은 다들 못 느끼고 있지만 곧 깨닫게 될 거야."





"............"

여기까지 잠자코 듣던 다쓰베이더.

"그것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닥터 지바고>와 <올훼스의 창>의 어설픈 적스타포지션, 몽타주, 내지는 파스티쉬인 것이냐."

윽, 들켰다.

 

 

 

 

 

 

 



디테일을 같이 보십시다. 오, 금단추 박힌 부츠가 아주 멋지군요. 전체적으로는 군복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보입니다. 단단은 드레스 입은 바비, 전통의상 입은 바비, 미인대회 참가자처럼 웃고 있는 바비, 분홍색으로 치장한 바비는 아무리 비싸도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까다롭게 범위를 좁혀 놓으면 수집질을 하려다가도 의지가 꺾이겠죠.

 

 

 

 

 

 

 



웃을 듯 말 듯 모나리자 같은 미묘한 표정. 미일리어의 새침한 입술과는 달리 시원스럽고 강렬한 저 입술. 어쩐 일인지 요즘은 빨간 립스틱 바르고 다니는 여인들이 드물어 아쉽습니다. 렘피카가 그린 빨간 립스틱의 여인들을 보세요. 다쓰베이더와 단단은 아직도 저 흥청망청 글래머러스하던 아르데코 시절 여인들의 차림새와 화장이 젤루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리나의 파란 눈은 꼭 시베리안 허스키 같습니다. 보슬보슬 러시아 털모자 우샨까, 일명 '메텔모자'는 눈 펑펑 내리는 겨울이면 언제나 생각나는 아이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리나가 단단의 손에 들어왔을까요?

미일리어 글에 영감을 얻은 단단의 모친 권여사님께서 예쁜 봉투에 담은 편지와 함께 서울에서 애써 부쳐 주셨다고 합니다.


"딸아, 갑자기 웬 인형 타령이냐. 너 인형 모을 거면 엄마도 하나 사 주리?"

"켁, 인형을 모으긴. 됐어요."

"근데 영국 인형이 어쩜 얄밉니? 강아지도 다 있고. 옆구리에 낀 건 또 뭐니? 신문이야? 보스톤 백도 다 들고, 어쭈 제법이야."


아래의 쨍한 사진은 마텔사의 광고 사진입니다. 역시 광고쟁이들의 사진은 다릅니다. 영국에서 장비의 도움도 없이 무식하게 막 찍은 보통 사람들의 사진은 항상 광량 부족으로 노이즈가 낄 수밖에 없어요. 햇빛 사정이 그만큼 안 좋다는 뜻입니다.

 

 

 

 

 

 

 


 
휘리릭 금발 컬이 멋지지 않습니까? 저도 물 묻혀 우리 이리나 멋지게 '고데' 해줘야겠습니다. 다쓰베이더가 건반 위에 진열된 바비들을 보더니 이럽니다.


"허허, 우리 집에도 바비가 이제 두 마리나 있구나."




내가 미쵸.


영감, 
바비 인형을 '마리'로 세는 사람은 내 처음 봤소.


※ 이리나 우스트볼스카야의 이름에 대해 -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와 알프레드 슈니트케(1934-1998)의 아내 이름이 둘 다 이리나였고, 성은 러시아 여성 작곡가인 갈리나 우스트볼스카야(1919-2006)에서 따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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