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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있는 사물

정리하는 일엔 잼병

단 단 2010. 9. 29. 01:30

 

 

 

 


영국 수퍼마켓에서는 한국이나 미국 수퍼마켓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병 제품이 많다는 점입니다. 유심히 관찰해 보니, 영국인들은 쥐기 편하고 쓰기 편해도 저 미국식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용기를 선호하지 않는 듯합니다. 환경 호르몬 걱정 때문인지, 그놈의 '품격' 때문인지, 공병이 필요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수퍼마켓 선반에 갖가지 크기와 형태의 예쁜 유리병들이 조로록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면 오르가즘이 다 느껴집니다. (응?)
내용물이 휜히 들여다보이니 고르는 소비자 입장에선 여간 편한 게 아니고요.

 

떠올려 보니 한국의 마트에서는 고추장이든 된장이든 간장이든, 마요네즈에 심지어 식초와 식용유까지도, 플라스틱 용기에 든 것들이 선반을 가득 메웠던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는 마요네즈와 식초가 병에 담겨서 팔립니다. 병 케첩도 흔하고요. 마요네즈 쓸 때마다 꼭 숟가락을 써서 덜어 내야 하니 불편하죠. 디저트에 멋지게 휘갈겨야 할 과일 쿨리나 쵸콜렛 소스도 병에 담겨 있습니다. 플라스틱 튜브형 용기에 담으면 살짝 눌러 짜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편하고 좋겠습니까.

 

왜 여기 사람들은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유리병을 고집하는 걸까, 마요네즈 덜어 낼 때마다 투덜거리며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에서 만든 각종 잼이나 소스를 담기 위해 공병이 필요해서일까요? 영국인들이 집에서 요리란 걸 하긴 할까요? (한답니다. 놀랍게도 브릿들이 프렌치들보다 집에서 요리하는 시간이 더 길답니다.)

 

영국의 요리 잡지들을 보면 제철 과일로 잼을 만들거나 제철 채소로 피클을 담그는 법이 매달 실려 있으며, TV에도 연일 유명 요리사들이 나와 '이렇게 만들어 보세요', '저렇게 해보세요'를 주문합니다. 자기 집 정원이나 시가 대여하는 공동 경작지allotment에서 간단한 작물을 길러 먹는 국민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한꺼번에 수확한 제철 농산물을 처리하려면 유리병이 많이 필요하긴 하겠습니다. 소스 만들기도 중요하고요. 이럴 때 이런 빈 병들은 고맙고 소중하죠. 수퍼마켓에서 고급 푸딩을 사 먹고 난 뒤 푸딩이 담겼던 예쁜 유리 용기들을 깨끗이 씻어 채리티 숍에 갖다 주는 사람도 많이 봅니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영국식품을 선물 받았다는 권여사님.

 

"유리병이 아주 제대로야!" 감탄에 감탄을 거듭.

"잘 씻어서 모셔 뒀지. 코스트코에서 보는 식품들은 피클이나 잼말고는 죄 플라스틱이나 깡통에 담겼던데, 유럽인들은 아직도 병을 좋아하나 보지?"

 

유럽인들이 다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영국인들은 확실히 유리병을 사랑합니다.

 

 

 

 

 

 

 



식품이 담겼던 예쁜 유리병을 다 먹고 난 뒤 그냥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요? 한때 안 쓰는 물건 미련없이, 가차없이 내다버리기로 한 끗발 날렸던 단단도 예쁜 유리병만은 차마 그냥 버릴 수가 없던데요. 특히 잼병들이 다른 병들에 비해 예쁜데, 영국식 티타임을 갖다 보면 잼이 많이 필요해 잼병이 많이 생깁니다. 영국 차음식 중 잼이 필요한 것들을 몇 개 꼽아 보자면,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곁들인 스콘,

잼과 생크림을 넉넉히 바른 '빅토리아 스폰지',

레몬 커드로 샌드하고 레몬 소스를 흠뻑 뿌려 준 '레몬 드리즐 케이크',

마말레이드를 바른 토스트와 브렉퍼스트 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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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음식뿐 아니라 디저트에도 잼이 많이 쓰이고요.


<윌킨 앤 선즈Wilkin & Sons> 같은 훌륭한 영국 잼도 많지만 당분간은 가늘고 긴 병이 많이 필요해 프랑스 <쌍 달푸르St Dalfour> 잼으로 고르고 있습니다. 맛이 신통찮고 병이 깊어 잼 뜰 때도 불편하지만 긴 병이 필요하니 감수해야죠.

 

 

 

 

 

 

 



이 잼병을 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소스 담는 용도 외에 주로 작은 티 포크나 티 스푼, 버터 나이프 같은 커틀러리를 보관하는 데 쓰거나 꽃병으로 쓰는데, 독자분들은 예쁜 잼병들을 어떻게 활용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귀띔 좀 해 주세요. 이 빈병 활용의 묘미는, 원래 담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를 담았을 때, 그 담긴 물건과 담은 병의 궁합이 의외로 잘 맞아 마치 처음부터 자기 짝인 양 어울리고, 이것이 담는 행위를 한 자에게 소박한 기쁨을 안겨 준다는 데 있죠.


그런데,
저 많은 잼, 다 어디로 간 걸까요?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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