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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월동 준비 끝 - 노교수와의 차 수다

단 단 2010. 12. 15. 09:44

 

 



홍차인 여러분, 크리스마스가 '길모퉁이를 돌아선 곳까지' 바싹 다가왔습니다. 다들 홍차의 세계에 들어선 난 뒤 생긴 긍정적인 변화를 꼽아 주십시오. 저는 더이상 남들 접하기 힘든 비싼 음식을 먹어 보고 싶다는 소망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홍차 한 통과 그에 어울리는 비스킷 한 상자만 있으면 세상 다 가진 것 같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다구 꺼내 우린다면 금상첨화이고요. 명품 옷, 명품 핸드백 따윈 필요 없어요. 좋아하는 차 우리고 좋아하는 비스킷 한입 베어무는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소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우리 홍차인들 아니겠습니까. 

단단은 우기에 일조시간까지 짧아 우울하다는 영국의 겨울을 <포트넘 앤드 메이슨>의 크리스마스 홍차와 <더치 오리지날스>의 '스템 진저 쇼트브레드'로 아주 거뜬히, 즐겁게 나고 있습니다. 그간 먹어 본 <더치 오리지날스>의 비스킷 중에 이 '스템 진저 쇼트브레드'는 단연 최곱니다. 어라? 지난 번 극찬했던 줄무늬 쇼트브레드는? 이게 훨씬 맛있습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죠. 새로운 걸 계속 시도하고 있으니 언제 또 바뀔지 모릅니다. 영국인 지도교수께 차를 우려 드리며 이 비스킷을 냈더니, 아 글쎄 이 분이, "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스킷이야!"하며 반가워하시는 거예요. 저도 어찌나 반가웠던지.

이 분과는 그간 몇 차례 찻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단단이 매번 알현 때마다 연구실에 다구를 챙겨 가서 정성껏 차를 우려 드립니다.) 이 양반이 우리 한국의 마트표 싸구려 티백 둥굴레차를 너무 좋아하시는 겁니다. 한번은 아주 비싼 고급 자스민 백호은침을 우려 드린 적이 있는데 좀 실망한 얼굴로 "이건 자스민 아닌가?" 하십니다. "왜요, 별로예요? 그간 우려 드린 차 중에 오늘 우려 드린 이 중국 자스민 백차가 제일 비싸고 고급이라고요. 백차는 몸에도 얼마나 좋은데요." 이랬더니만,

"바로 그 점이 별로란 걸세. 중국 것은 뭐든지 너무 오랜 세월 다듬어지고 정제돼서 매력이 없단 말일세. 그래서 종종 우리 서양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하고. 지난 번 투박하고 구수nutty, earthy한 한국의 둥굴레차가 나는 더 좋네만. 예술작품도 너무 리파인refine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게."

오오, 그렇군요. 영국인들의 미감은 참으로 별납니다. 너무 다듬어진 것에는 매력을 못 느낀다니. 당장 영국의 요리책과 호주, 한국, 일본 등의 요리책을 비교해 보세요. (미국 요리책은 본 적이 없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각 국의 음식이 다르니 사진의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따지실 분들을 위해, 좋습니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서양식 베이킹 책을 비교해 보지요. 영국 요리책들의 사진들은 그야말로 지저분messy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부러 완성품을 부수거나 쪼개고 접시와 접시 밖에 쵸콜렛 소스와 부스러기를 잔뜩 흘려 놓습니다. 접시와 커틀러리들도 죄다 한 백년쯤은 밖에서 풍화작용에 견디다 온 것들 같고요. 그런 걸 아름답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 영국인들이란 말이죠.

 

영국식 정원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온갖 종류의, 온갖 텍스처가 한 정원 안에 마치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고 방치된 듯 있지요. 사진도 쨍한 사진보다 노이즈 낀 것들을 더 좋아합니다. 이 곳에서 이제 꽤 지내다 보니 사진 좀 찍는다는 우리 한국의 맛집·요리 블로거들의 사진이 너무 선예도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습니다. 형광등 불빛이나 과한 조명 아래 찍은 창백하고 지나치게 쨍한 사진들 말예요. 

차 마시면서 이런 수다를 떨 때도 있었습니다.

"난 사실 영국인이지만 홍차보다는 카페인이 잔뜩 든 코피를 더 좋아한다네."
"에에? 그러셨어요? 왜요, 홍차가 맛없으세요?"
"난 인디안 홍차들이 별로야. 쓰기만 하고."
"인디안 홍차라뇨, 짜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인디안 홍차들 있잖나. 다질링이나 아쌈, 뭐 이런 거. 너무 써. 그래서 영국인들은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마시는데, 이렇게 되면 차가 주는 베네핏을 다 깎아먹는 거라고."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인디안 홍차들이 쓰다니요, 그건 교수님이 후진 차만 마셔 봐서 그런 거예요. (허억, 내,내가 지금 무슨 말을;; 이런 건방을 떨다니 학위는 다 땄어;;) 질 좋은 아쌈과 다질링이 얼마나 달고 맛있는데요."

안되겠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골든 팁이 많이 섞인 상품의 아쌈과 질 좋은 다원 다질링을 한 통씩 선물해 드려야겠습니다. 싫다는데 선물 드리면 웃기겠지요? 평생 아쌈과 다질링은 쓰고 맛 없는 차로 알고 살아온 영국인이 있다는 건 정말 놀랍고도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죠. 산지말고는 이 영국처럼 좋은 차를 싼 값에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또 없을 텐데 말입니다. 아아, 안타깝습니다. 정성껏 차 우려 마시는 이 "진진한 즐거움"을 모르는 우리 오라버니들을 생각해도 안타깝고요. 맛난 크리스마스 홍차를 우려 놓고 보니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권여사님이 요즘 슬슬 차의 세계에 빠져 이런저런 다구까지 다 사 모으기 시작하셨다고 하니 위로가 됩니다. 한국 갔을 때 사진 잔뜩 찍어 와야겠습니다.   

 

 

 

 

 

 


단단이 콜콜 자는 새벽, 일찍 일어난 다쓰베이더가

하도 아름다워 담아 봤다는 우리 집 창밖.

이 영감이 이제 늙어서 잠도 읎어요.

 

 

 

 

 

 

2019년 1월 현재는 포장이 이렇게 바뀌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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