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spotter

아주 특별한 액자 하나 본문

사연 있는 사물

아주 특별한 액자 하나

단 단 2011. 9. 11. 05:00

 

 

 

 

 

단단이 아끼는 그림 중에 부엉이를 그린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액자 맞출 돈이 없어 그간 문구점에서 산 아크릴 판에 끼워두고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문득,

 

'채리티 숍에서 이발소 그림 사다가 그림은 버리고 액자만 활용하면 되겠구나!'


하는 묘안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채리티 숍을 돌며 살피다 3천원짜리 낡은 나무 액자를 하나 집어왔지요. 조잡한 이발소 그림 대신 아주 오래되어 빛바랜 소녀의 사진이 담겨 있었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를 섬뜩함이 좀 느껴졌었습니다. 이렇게 낡은 사진이면 어쩌면 빅토리아 여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빅토리안 시절의 어린이 사진 하면 떠오르는 게 있었거든요.


오늘의 차수다는 여름 다 지나서 펼치는 뒷북 납량특집이 되겠습니다. 빅토리안들이 어떤 깜찍한 짓들을 했었는지 링크를 한번 따라갔다 다시 와 보세요.
Post Mortem Photography


빅토리안들의 취향이 별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서민들은 부자들처럼 화가를 고용해 자녀들 초상화를 남길 만큼 부유하지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영·유아 사망률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이니,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죽음을 맞게 되면 이렇게 뒤늦게나마 사진을 남겨 유족들이 살아가는 남은 날 동안 죽은 이를 기억하고자 했던 거지요. 사진은 초상화보다 저렴했으니까요. 아이가 죽으면 산 사람처럼 분장시키고 억지로 일으켜 세워(눈을 억지로 띄우는 경우도 있었음) 남은 형제·자매들과 나란히 놓고 찍는 일이 많았는데, 애틋한 일이긴 해도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어쨌거나 보기가 좀 섬뜩하죠. 니콜 키드먼 주연의 《The Others》(2001)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액자를 사기 전 소녀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어 이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 부릅 뜨고 의자에 손 짚고 당당하게 서 있는 품이 아무리 봐도 죽은 아이 같아 보이지는 않길래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의 옷차림과 액자의 품질을 보니 부잣집 아이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복식과 머리 모양을 자세히 보면 어쩌면 빅토리아 시대보다는 좀더 후대의 사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에드워드나 1차대전 전후쯤? 그닥 고급스러운 나무를 쓴 것 같지는 않지만 오래된 나무가 주는 느낌은 어쨌거나 참 좋네요.

 

 

 

 

 

 

 



눈웃음치며 애교 있게 웃고 있는 귀여운 부엉이 그림입니다. 소개해 드린 적 있죠? 일본 목판화의 복사본이에요. 이 녀석을 액자에 넣어 주겠다는 거지요. 소녀의 사진은 필요 없으니 꺼내서 버리고 액자 크기에 맞춰 그림을 약간 다듬어야겠습니다.

 

 

 

 

 

 

 



앗?
깜짝이야!
사진 뒤에 웬 증서가 하나 숨어 있었습니다!

 

 

 

 

 

 

 



아하!
사진의 주인공이 누군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몰리Molly'라는 이름의 소녀였군요. 영국의 권위 있는 음악 협회The Associated Board of the Royal Academy of Music and the Royal College of Music 주관으로 1924년에 치러진 음악 시험에서 우리 몰리 양이 당당하게 통과했다는 증서였습니다. 음악 시험은 다름 아닌 '화성학Harmony'이었고요. 단단과 다쓰베이더는 자지러졌었지요. 이제 섬뜩했던 몰리 양에게 급 호감이 갑니다. 스미스Smith 선생을 사사했군요. 무슨 음악 시험 통과 증서가 이리 거창한가요?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GLORIA IN EXCESIS DEO,

 

 

 

 

 

 

 



땅에는 평화ET IN TERRA PAX.
따,땅에 평화까정 ^^;

 

 

 

 

 

 

 



1924년이면 현 여왕의 할아버지인 조지 5세가 다스리던 시절. 'DIEU ET MON DROIT'은 'God and My Right'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입니다. 'God and my right shall me defend'의 준말이라죠.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왕권을 일컫는 말인데, 영국이라는 나라 참 재밌죠. 음악 시험 통과한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왕권의 신성함을 다 각인시키려 들다뇨.

 

 

 

 

 

 

 



증서 한번 거창합니다.
예술Ars,

 

 

 

 

 

 

 



현대어 '과학'의 어원인 '지식, 기술Scientia'.
암요, 음악도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하지요.

 

 

 

 

 

 

 



몰리 양에 대한 정보를 좀더 얻기 위해 어느 유명한 '조상 찾기' 누리집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몰리는 1908년 아일랜드 이민자 부모의 막내 딸로 태어나 살다가 198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1924년 음악 시험을 치를 당시에는 대략 16세 정도 됐었겠네요. 1871년 아일랜드의 런던데리Londonderry에서 태어난 몰리의 아버지는 몰리의 엄마가 될 한 살 아래의 여인과 결혼한 뒤 기근을 피해 일자리를 찾아 영국 남부로 왔습니다. 그 후 그는 어느 식료품점의 관리인이 되었군요. 서민 가정의 막내딸인 몰리가 꿋꿋하게 음악인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거죠. 몰리에게는 아이비Ivy와 루비Ruby라는 예쁜 이름의 언니 둘이 있었어요. 큰 언니와의 나이 차이를 보니 몰리는 늦둥이였던 모양입니다. 넉넉지 못한 생활 가운데 우리 막내가 시험에 통과했으니 온 가족이 자랑스러워하며 티파티를 열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캬~ ^^

 

몇 가지 정보를 조합해 소설을 구성해본 겁니다. 더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군요.

 

 

 

 

 

 

 



이렇게 해서 단단의 집에 뜻하지 않게 어느 영국 소녀의 음악 시험 통과 증서가 벽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수줍은 몰리는 증서 뒤에 숨기로 했어요. 십년쯤 지나 몰리의 얼굴을 다시 꺼내어 보도록 하지요.


그건 그렇고,

부엉아, 이거 또 미안하게 됐구나.;; 내 꼭 좋은 액자 사다 끼워줄게. 약속하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