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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있는 사물

쓰지는 않고 죽도록 감상만 하는 다구

단 단 2013. 1. 27. 04:08

 

 

 

 

 

새해를 맞아 우리 한국 다기를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영감님이 쓰시던 한 30년쯤 된 다기입니다. 꾸준히 쓰면서 관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깨뜨릴까 염려하여 영감님 돌아가신 이후로는 쓰지 않고 곱게 모셔두고만 있었더니 표면에 먼지와 세월이 내려앉았고 안에 박혀 있던 차심이 단단히 굳었습니다. 처음 우리 영감님 손에 들어왔을 때는 아마도 지금보다 좀 더 뽀얬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물식힘그릇은 깨졌는지 온데간데 없고 찻주전자와 함께 찻잔 덜렁 두 개와 합 두 개만 남았습니다. 저 합은 설탕기일까요, 찻잎을 담아두는 차합일까요? 원래 한국식 다기는 찻주전자, 물식힘 그릇, 찻잔 5조가 기본 구성이죠. 또 다른 세트에서 빠져나와 합류를 했는지 합이 둘이나 있네요. 희한한 구성이 되었죠. 찻잎을 보관하는 차합이라 하기엔 크기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찻잎이란 게 냄새와 습기를 잘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으므로 밀폐용기에서 적은 양을 자주 덜어 담는 게 좋다고 하네요. 그러니 차합은 크기가 작을수록 좋겠지요.

 

돌아가신 우리 영감님이 도예가이셨습니다. 그래서 단단이 도자기와 다기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거예요. 도자기를 빚어 그 위에 붓으로 동양화를 그리시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릇이나 다기 같은 생활 자기를 즐겨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다기는 가천요 송기영 선생께서 빚어 우리 영감님께 선물로 주신 겁니다. 누리터를 뒤져 보니 놀랍게도 이 분이 연세 많으신데도 아직도 이천에서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아아, 어찌나 반갑던지...

 

취미로 도예 배우시거나 우리 한국 다기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다기에 쓰인 기법을 대번 알아차리실 겁니다. '박지' 기법으로 제작된 '분청자'죠. 단단은 도예가의 딸이긴 해도 부끄럽게도 도자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합니다. 어디 가서 도자기집 딸이라고 말하기도 두려울 정도예요. 그래도 이게 분청자 중에서도 박지 기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쯤은 압니다.  

 

'분청사기' 또는 '분청자'(둘 다 맞아요)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고려 청자에서 조선 백자로 넘어가던 과도기적 시기에 유행하던 기법입니다. 품질과 색상이 떨어지는 칙칙한 흙으로 식기를 만들어 쓰려니 밤낮 어떤 궁리들을 했겠어요. 동서고금 막론하고 인간은 거무튀튀해 보이는 것들은 죄다 뽀얗게 만들어 버리려는 못된 습성이 있지요. 그래서 암회색 태토에 백토 '국물'을 뒤집어씌워 백자인 양 뽀얀 화장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흙에 뽀얀 분칠을 하고 나니 이제는 또 속살이 그리워집니다. 무늬와 함께 속살을 드러내는 방법, 즉, 분청 장식 기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건 아마 중·고생들도 요즘은 국사 시간에 배우지 않나 싶은데, 이에 대해 정리를 잘 해 놓은 분이 계셔서 ☞ 연결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잠시 마실 다녀오세요.

 

 

 

 

 

 

 

 


저는 우리 영감님의 다기를 들여다볼 때마다 후후 웃곤 합니다. 물고기와 연꽃을 그린 선이 유려하고 정교하지가 않고 삐뚤빼뚤, 무늬를 제외하고 백토를 긁어 낸 자리도 완벽하지가 않고 우툴두툴, 어쩐지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유사한 느낌이 나지 않나요? 같은 분청 박지 기법으로 된 시판 다기 중 여러분이 잘 아실 만한 것으로 <광주요>의 목부용문 시리즈가 있지요.

 

 

 

 

 

 

 



저는 광주요의 이 목부용문 그릇들을 볼 때마다 색감도 좋고 예쁘긴 한데 너무 잘 다듬어져 매끈하고 단정한데다 무늬도 우리 영감님 다기만큼 조밀하지 못하고 다소 할랑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값도 비쌉니다. 무늬를 내려면 일일이 수공을 들여야 하니 비싼 건 이해가 갑니다만, 우리 한국인의 미감에 비춰 볼 때 너무 단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자유분방함이 그 생명이랄 수 있는 분청자에 있어서는 더더욱이요.

 

전에 영국인들은 너무 다듬어진 세련된 것들보다는 투박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씀 드린 적 있죠. 제가 만난 영국인들, 특히 대학 교수들이나 전문직 사람들은 하나같이 완벽하고 정교한 중국·일본의 공예품보다는 거칠고 투박하고 분방하고 해학적이며 때로는 무심하다 못해 다소 무욕한 듯 보이는 한국 공예품들이 훨씬 흥미롭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저 세련되기 짝이 없는 중국의 자스민차보다는 구수하고 텁텁한 한국의 둥굴레차를, 완벽에 가깝게 조형된 자사호보다는 삐뚤빼뚤, 때로는 균형도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한국 다기를 더 좋아합니다. 유럽에는 17, 18세기에 중국 취향Chinoiserie이, 19세기에는 일본 취향Japonism이 대단히 유행을 했지요. 이 두 나라 공예품과 미술품의 완벽성과 정교함에 여전히 감탄들을 하면서도 현대 유럽인들은 이들의 것은 뭐든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지나치게 다듬어졌다"고 여기며 "perfect and dead"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최근 세계 원예계에서 우리 한국의 정원 디자이너가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데, 대회 최고상을 수상한 이 분의 ☞ 작품도 한국적 미감에 충실합니다. 영국의 도예가들 중에 우리 한국 도자기에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작가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우리 영감님 제자 중에 일본인도 있었고 프랑스인도 있었는데, 이 프랑스인 제자가 특히 한국의 분청자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겨울이라 사진 찍기가 참 힘듭니다. 햇빛 보기가 힘들어요. 비타민D 부족으로 뼈가 아주 다 삭았어요. 다기가 좀 어둡게 나왔는데, 날씨 좋을 때 이 다기에다 차를 우려 사진을 다시 찍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려한 서양식 다기에 이어 매끈하고 완벽한 중국 다기를 갖추셨다면 이제 우리 다기에도 관심을 한 번 가져 주십사 글을 올려 봅니다. 고가의 백화점 입점 유명 브랜드들도 좋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기장들의 손맛 '지대루' 나는 다기도 하나쯤 집에 있으면 좋지요. 특히, 서양인 친구에게 차 대접할 일 있을 때 소박하고 정겨운 우리 한국 다기로 한번 우려줘 보세요. 그 친구, 가뜩이나 큰 코에 콧굼기가 아주 발씸발씸할 겁니다.

 


☞ 가장 한국적인 그릇: 분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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