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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목도리 본문
아, 시음기가 너무 밀렸어요. 깡통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 다 바스라진 마지막 미운 찻잎 탈탈 털어 차 한 잔 우립니다. 아끼는 찻잔에 담아 급하게 치운 상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각도와 구도 고심해가며 재면서 사진 찍고, 시간 들여 시음기 쓰고, 빈 깡통은 잘 싸서 상자에 잡아넣고...
이렇게 해서 홍차 블로그에 시음기 한 편이 올라오게 되는 거지요. 이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에요. 꾸준히 시음기 쓰시는 홍차인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시음기 쓰는 게 귀찮아서 홍차 동호회에 가입을 못 해요. 누리터에서 동호회 활동하시는 분들 대단하십니다. '스사모'라고, 스테인레스 스틸 조리도구 사용자들이 꾸려가는 학구적이고 멋진 동호회가 있는데, 스뎅팬을 즐겨 쓰는 단단이지만 게시판에 글 쓰는 게 귀찮아서 가입을 못 하고 있어요. 저는 그저 제 블로그나 알차게 꾸며 볼랍니다.
<위타드Whittard of Chelsea>의 창립 125주년 기념 블렌드 홍차입니다. 다질링을 골자로 혼합을 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느낌은 다질링과 비슷합니다. 아쌈이 좀 섞여 있어 다질링 향이 물씬 나면서도 쌉쌀한 맛은 덜하고 둥글둥글합니다. 다쓰 부처는 다질링을 좋아합니다. 다질링에서 나는 은은한 포도향이 좋아 혀끝에 남는 알싸한 느낌도 감수하고 다질링을 즐겨 마시는 거지요. 위타드의 홍차 중에서는 <1886 블렌드>와 <125주년 기념 블렌드>가 아주 괜찮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시음기를 쓰면서 한 통 더 사려고 위타드 누리집을 가 봤더니 품절. 안타깝습니다.
알록달록한 게 마치 청소부가 가을철에 길거리 낙엽 죄다 쓸어 담아 놓은 것 같죠. 전형적인 다질링 모양새입니다. 까만색과 황금색 찻잎에는 아마도 아쌈이 섞여 있겠지요.
찻잔과 차통 뒤 화사한 꽃그림은 앤디 워홀의 작품입니다. 이 양반 작품들로만 만들어진 알록달록 예쁜 2012년 달력을 작년에 선물 받았는데, 해가 바뀐 뒤로는 벽에서 내려와 이렇게 찻상 꾸미는 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찻상은 차음식 없이도 전례 없이 화사합니다. 오늘은 마침 햇빛도 들어옵니다.
이건 뭐냐면요,
목이 따뜻해야 몸이 따뜻해진다며 춥게 입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권여사님께서 보내 주신 목도리입니다. 강렬한 오렌지와 홋 핑크의 양면 목도리. 우리 권여사님이 미술 전공을 하셨어요. 색깔 좀 보세요. 앤디 워홀스럽습니다. 얼마 주고 사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가 가진 목도리 중 아마도 가장 고급이 아닐까 싶습니다. 100% 캐쉬미어입니다. 제가 게으르기 때문에 빨래 자주 안 하려고 검은색 갈색 카키색의 칙칙한 외투들만 입고 다니는데, 그걸 어찌 아셨는지 목도리라도 좀 화사한 걸로 둘러 액센트를 주라고 하십니다.
영국에서는 목도리가 아주 중요한 소품입니다. 사람들이 사철 목도리를 두르고 다닙니다. 저도 이곳에서는 목도리 없이 외출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기후 탓도 있고 문화 탓도 있지요. <해리 포터> 이야기를 떠올릴 때 아마 아이들마다 두르고 있던 목도리가 먼저 떠오를 겁니다. 한국에서는 두툼한 겨울용 목도리는 '머플러'로, 봄·가을용 얇은 실크 재질의 것은 '스카프'로 부르는데 영국에서는 목에 감는 건 모두 스카프로 통일해 부릅니다. 각 학교마다 전통적으로 써 오던 스카프 고유의 배색이다 있을 정도로 목도리가 중요한 나라입니다. ☞ Academic Scarf 눈사람한테 옷은 안 입혀도 목도리는 반드시 둘러 줘야 합니다. ☞ John Lewis Ad
이 목도리는 도톰해서 아마 여름을 제외하고 늘 두르게 될 것 같습니다. 여름에도 바람 불고 쌀쌀한 날이 꽤 많아 이럴 땐 얇은 거라도 목에 무언가 두르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되곤 하지요. 여름에 영국 여행 오실 분들은 얇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는 전략으로 준비해 오시면 됩니다. 둘둘 감을 수 있는 얇은 목도리도 필수입니다. 미처 못 챙겨 왔더라도 영국에는 도처에 목도리 파는 집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목도리에 맞춰 입술연지도 보내 주셨습니다. 대단한 감각입니다. 단단이 대학 시절 저런 비슷한 색 연지를 바르고 다닌 적이 잠깐 있었는데 그게 예뻐 보였다고 하십니다. 저는 기억도 안 나는데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계셨다가 목도리 색과 맞춰 보내 주신 거예요. 감동의 물결이 밀려 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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