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치즈 ◆ 캐필리 Caerphilly

 

 

 

 

 

웨일즈 지역의 대표 치즈인 캐필리입니다. 농가에서 소량 만드는 정통 캐필리는 생유로 만들고 동물성 효소를 써서 굳힙니다. 대량생산 캐필리는 시장 확보를 위해 저온살균유를 쓰고 식물성 효소로 굳힙니다. 전통적으로 웨일즈 지역의 광부들이 광산에서 점심 도시락에 곁들여 먹던 치즈였습니다. 웨일즈 지역에 광산이 많았거든요.

 

2차대전 후 식량 배급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절, 농가에서 생산되는 모든 우유는 잘 발달된 영국의 철도망을 따라 식량 배급제ration에 동원되기 바빴으므로 한동안 영국의 다양한 지역 전통 치즈들의 생산이 금지됐었습니다. 캐필리 생산도 중단됐고요. 정부 식품국The Ministry of Food에 의해 전국의 모든 우유는 배급과 체다 생산에 쓰였거든요. 1차대전 이전에는 독립 소규모 치즈 농가가 영국 전역에 3,500개가 넘었었는데 2차대전 끝무렵에는 백개도 채 안 남게 되었지요. 1980년대부터 치즈 농가가 야금야금 다시 늘고 그 많던 치즈 종류들도 부활해 영국에서 생산되는 치즈 종류는 현재 700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캐필리의 생산도 1980년대 와서야 재개되었는데, 먼저 서머셋 지역의 전통 체다 생산자들이 체다보다 빨리 숙성되는 캐필리의 환금성에 주목해 체다가 숙성될 동안 자금 융통을 위해 캐필리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전역에서 누구든 만들어 팔 수 있으나 대개는 대량으로 생산된 영혼 없는 것들로 시큼하기만 하고 맛이 '드랍게' 없습니다. 이런 캐필리만 먹어본 사람들은 '캐필리 = 맛없는 치즈'로 평생을 알고 살다가 죽는다고 하죠.

본고장인 웨일즈에서도 다시 전통 방식으로 깐깐하게 캐필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사온 치즈가 바로 전통 방식의 웨일즈산 캐필리입니다. 외피가 심상치 않죠? 백년은 족히 넘은 돌덩이 같아 보입니다. 영국인들은 매끈한 치즈보다 이렇게 '러스틱rustic'한 외피의 치즈를 좋아합니다. 영국 치즈들에서는 왁스 입은 매끈한 치즈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들은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치즈를 좋아합니다.

 

 

 

 

 

 

 

껍질에 흰곰팡이가 앉아 있네요. 아마도 브리 껍질과 유사한 맛이 나겠죠? 색이 저토록 진하고 마른 것으로 보아 브리보다는 맛이 훨씬 진할 거라 추정도 가능하겠고요.

 

 

 

 

 

 

 

속살은 뽀얗고 껍질 쪽은 색이 어둡습니다. 그에 따라 맛과 질감도 급격히 달라집니다. 먹는 재미가 좀 있어요. 껍질까지 다 먹는 치즈입니다.

 

 

 

 

 

 

 

 

껍질에서는 비에 젖은 가을 숲 향, 흰곰팡이 특유의 쏘는 맛, 쇠고기 맛, 버섯 맛이 납니다. 복잡하기 짝이 없어요. 브리보다 숙성을 오래 시키는 치즈라 버섯 맛도 역시 진하게 납니다. 껍질 안쪽의 진한 색 속살 부분에서는 쇠고기 육수beef stock 넣고 끓인 진한 버섯 크림 수프 맛이 납니다. 우마미가 일품입니다. 질감도 부드럽습니다. 안쪽의 뽀얀 부분에서는 젖산의 산미가 물씬 납니다. 시큼하죠. 보슬보슬 잘 부서집니다. 진한 부분과 뽀얀 부분이 완전히 다른 맛을 내고 다른 질감을 냅니다. 껍질, 껍질 안쪽, 가운데 속살 부분을 모두 포함시켜 먹어야 복잡한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으니 자를 때도 먹을 때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 치즈는 외형도, 맛도, 향도, 가을을 닮았습니다. '어른의 맛'이에요. 치즈 향이 꼬리꼬리하거나, 곰팡내가 강하거나, 아주 짜거나, 부담스럽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먹기에는 좀 힘들 것 같아요. 맛이 복잡하고 대지의 맛이 물씬 나거든요. 미식가용 치즈입니다. 대량생산 캐필리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기품이 있습니다. 반드시 웨일즈 지역의 소농가에서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캐필리를 사 드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제가 먹은 것은 고르위쓰Gorwydd 농가에서 생산한 3개월 숙성 캐필리였습니다. 이 농가의 제품이 우수한 캐필리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수입을 해 간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