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spotter
외국에서 잣 사 먹을 때 주의할 점 본문
오늘은 잣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인이 잣 사 먹을 일은 그리 많지 않지요. 한국에서도 잣은 명절 때 선물 들어온 거나 먹지 평소에 일부러 사서 먹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그러나 집에서 이태리 페스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집에 늘 잣이 있어야 하죠. 영국에 살고 있지만 저는 유럽산 잣을 안 사고 권여사님이 보내 주시는 한국산 햇잣을 씁니다. 한국 잣이 더 맛있어서가 아니라, 잣도 사려면 돈이 드는데 집에 있는 남는 잣 보내 주신다니까 넙죽 받는 겁니다. ㅋ 유럽 잣도 비싸요. 생산량은 한국 잣보다 훨씬 적은데 수요가 많아 구하기도 쉽지 않고요. 서양인들은 빵 과자 케이크 구울 때도 잣을 많이 쓰거든요. 그런데, 잣 품종 중에 '한국 잣Pinus Koraiensis'이라는 품종이 따로 있다는 사실 아세요?
▲ 한국 잣 Pinus Koraiensis 분포지
전세계에는 약 백여 품종의 잣이 존재하고 이런저런 교배종도 많이 있는데, 그중 상업적으로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종은 고작 20여 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또 소비자가 사 먹을 만한 품종은 서너 가지로 더 줄어든다는데, 여기에 우리 한국 품종인 'P. koraiensis' 잣이 끼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그냥 'Korean pine nut'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도는 1966년 미국 농림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잣나무 목재가 워낙 훌륭해 남벌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가 각국 정부가 보호에 나서서 다시 회복 중에 있습니다.
▲ 지중해 잣 Pinus Pinea 분포지
('딸깍' 하면 큰 그림이 뜹니다.)
이태리 페스토에 쓰이는 잣은 어떤 잣일까요? 당연히 지중해산 'Pinus pinea' 잣이겠지요. 스페인, 이태리, 터키 등 지중해 쪽에서 많이 생산됩니다. 잣 끝에 갈색 끝눈이 없이 전체가 뽀얀 품종입니다. 한국 잣보다 날씬하고 길죽하면서 덜 바삭거립니다. 페스토 만들 때 볶지 않고 갈아 쓰면 더욱 부드러운 질감을 내죠. 지중해산 잣은 값이 비싸 수퍼마켓들은 잘 취급하지 않습니다. 델리나 고급 식료품 점을 따로 가야 볼 수 있어요. 대개는 중국산 잣을 들여와 팔고, 간혹 맨 첫 지도에서 보이는 북한산이나 러시아산 한국 품종 잣을 팔기도 합니다. 영국 수퍼마켓에서 파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산입니다.
▲ 중국 서북부산 잣 Pinus Armandii 분포지
- 피해야 할 잣이다.
그런데 중국이란 나라가 땅덩이가 좀 큽니까. 중국 땅에서 나는 잣에도 품종이 여럿 있겠지요. 생산량도 많고 값도 비교적 싼 모양인지 유럽에서도 지중해산 잣보다는 중국산 잣이 더 많이 팔리는데, 안타깝게도 이 중국산 잣들이 평판이 별로 좋지가 않아요. 중국산 잣 중 위의 한국 품종말고 'Pinus armandii'라는 품종이 있는데, 이 품종의 잣을 사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잣 신드롬pine nut syndrome (PNS)'이라는 것이 자주 문제가 되곤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잣 신드롬이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을 텐데, 이 품종의 잣을 먹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특이한 신체적 반응으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어 학계에서 주목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인체상의 큰 해는 없지만 한 번 '걸리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하니 외국에 사시는 분들은 잘 알아 두었다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잣 신드롬
'Pinus armandii' 품종 잣을 먹고 소화가 된 시점부터 갑자기 입안에 쓴맛과 금속성의 불쾌한 맛이 나기 시작해 길게는 2주 넘게도 지속이 된다고 합니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 특히 이 쓴맛과 금속맛이 증폭돼 애써 먹은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가 없게 된다네요. 심한 사람은 두통, 복통, 설사, 메스꺼움, 목구멍 이물감 등도 겪는다는데, 누리터에 이 증상을 겪은 이들의 수기가 정말 많이 돌고 있습니다. 'Pine nut syndrome'을 'pine mouth'라고 간단하게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심지어 단 디저트를 먹어도 쓴맛이 난다 하니 희한한 증상이죠. 이 증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래서 잣을 살 때 포장의 문구를 잘 살펴야 한다고 조언을 합니다.
원산지를 밝히지 않는 잣 포장들
문제는, 수퍼마켓들이 잣 포장에 원산지를 제대로 기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Packed in USA', 'Packed in Ireland', 'Country of Packing: UK', 이런 식으로 표시하는 판매자들이 많아 소비자는 원산지를 알 길이 없어요. 원산지를 밝힌다 하더라도 잣 품종을 모르면 또 소용이 없는 게, 중국산이라도 이게 문제를 일으키는 그 'Pinus armandii' 품종인지, 문제가 없는 우리 한국 품종 'Pinus Koraiensis'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한국 품종 잣이라 하고는 문제를 일으키는 잣을 섞어 납품하는 악덕업자도 수두룩하고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소비자 단체가 캠페인도 하고 판매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이제는 원산지를 밝히는 곳이 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품종을 잘 따져 봐야 하는 일이 남았지요. 일단 한국에 계신 분들은 그냥 우리 땅에서 난 우리 잣을 제철에 사 드시면 되니 염려하실 필요가 없고, 외국에 살면서 페스토나 잣이 들어간 요리를 즐기시는 분들은 잣 먹고 나서 낭패 보지 않으려면 주의를 좀 하셔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비싸더라도 믿을 만한 공급처로부터 지중해산 잣을 구입하는 겁니다. 아니면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한국 잣을 공수 받든지요. 이도저도 여의치 않을 경우엔 잣의 품종별 외형을 알아 두었다가 스스로 잘 골라야 합니다. 아래에 잣의 품종별 특성과 잣 신드롬에 관해 연구한 분의 블로그를 연결해 드릴 테니 사진과 설명을 보면서 품종별 외형과 특성을 잘 기억해 두세요. 정리가 잘 돼 있습니다.
☞ 잣 품종별 외형과 특성 비교 - 섭취해도 좋은 잣과 피해야 할 잣
연구자는 한국 잣, 지중해 잣, 히말라야 잣을 가장 먹기 좋은 잣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잣이 전세계에서 먹기 좋은 잣 셋 중 하나에 든다니, 정말 눈물 나게 감사한 일입니다. 잣 신드롬을 일으키는 녀석은 중국 서북부산 잣입니다. 한국 잣보다 훨씬 작고 잣 끝부분에 거의 예외 없이 짙은 갈색의 끝눈이 붙어 있습니다. 보기에도 벌써 썩 예쁘지가 않네요. ■
▲ 지중해 잣 [왼쪽 위], 한국 잣 [왼쪽 아래],
히말라야 잣 [오른쪽 아래],
잣 신드롬을 일으키는 중국 서북부산 잣 [오른쪽 위].
▲ 히말라야 잣 Pinus Gerardiana 분포지.
이 지역 잣도 괜찮다. 매우 길죽한 형태를 하고 있다.
▲ 페스토에 쓰이는 부드러운 질감의 길죽한 지중해 잣 'Pinus pinea'
▲ 우리 잣 'Pinus koraiensis'도 페스토에 얼마든지 넣을 수 있다. 맛 괜찮다. [사진 -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
'한식과 세계 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 음식 후기 (20) | 2015.04.04 |
---|---|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 음식 열 가지 (21) | 2015.04.02 |
하가우 만들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10) | 2015.02.24 |
바질 페스토 In Search of Perfect Pesto (2) | 2015.01.29 |
전통 페스토 절구 (11) | 2015.01.21 |
신간 "집에서 프랑스 가정식" 표지를 보고 (8) | 2015.01.18 |
지중해 샐러드 ⑤ 향기로운 모로코 당근 샐러드 (2) | 2014.08.25 |
까수엘라와 테라코타 타파스 그릇에 대하여 Cazuela (14) | 2014.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