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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끼는 요리책 - 히스토릭 헤스톤 블루멘쏠 Historic Heston Blumenthal 본문

영국음식

가장 아끼는 요리책 - 히스토릭 헤스톤 블루멘쏠 Historic Heston Blumenthal

단 단 2016. 1. 29. 00:00

 

 


레스토랑 <디너>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는 헤스톤.

지금 보니 벽에 달린 전등갓이 옛날 구리 젤리 몰드 형상이네.

 

 

제가 요리책을 좀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냥 많이가 아니라 정말 많이 갖고 있어요. 둘 데가 없어 막 침대 밑에도 넣어 놓고, 침대 머리맡에도 놓고,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도 놓고, 침대 발 쪽에도 놓고, 옷장 안에도 놓고 그랬어요. 돈 생기면 요리책 사는 데 다 써서 옷도 못 사 입고 이 꼴로 다닙니다. 대부분 영국에서 출판한 것들인데, 영국 요리책들은 내용도 좋고, 만듦새도 좋고, 꼭 필요한 곳에만 '과정샷'을 넣어 요리책 한 권에 레서피가 많고, 한국 요리책들에 비하면 두꺼운 편입니다. 우리나라 요리책들은 사실 과정샷이 좀 과한 경향이 있지요. "양념을 넣는다" 따위에도 과정샷이 붙잖아요. 아니, 고춧가루 한 숟갈 넣고 있는 걸 뭐 하러 보여줍니까? 생소한 재료도 아니고, 고춧가루 한 술 떠서 냄비에 넣는 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없을 텐데요. 

 

 

 

 

 

 

 

 

 

잎 달린 귤clementine을 까먹다가 영국의 괴짜 요리사 헤스톤 블루멘쏠의 대표 요리signature dish가 생각 났으니 오늘은 헤스톤이 쓴 요리책을 하나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많이 갖고 있다는 그 요리책들 중에서 제가 가장 아끼는 요리책입니다. 요리책 표지에 따로 올려 놓은 귤말고 나뭇가지에 데롱데롱 달린 귤 그림이 보이죠? 저게 말이죠, 대단히 재미있는 '요리'입니다. 이따 따로 소개를 해 드릴게요.

 

 

 

 

 

 

 

 

 

속표지.

헤스톤의 런던 레스토랑 <디너Dinner>에 있는 시계 구동부를 담았습니다. 헤스톤 요리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목차.

마치 역사책의 연표처럼 해 놓았죠.

다루고 있는 영국 요리들의 해당 연도와, 그 요리를 소개할 때 함께 언급할 음식사학적 내용들을 간략하게 밝힙니다. 요리가 창작된 연도가 아니라 그 요리가 담긴 요리책이 출판되었던 연도입니다. 

 

 

 

 

 

 

 

 

 

독자에게 드리는 말씀.

이 요리책을 내게 된 동기, 내기까지의 과정, 영국음식의 개관 등 논문으로 치면 서문에 해당합니다. 

 

 

 

 

 

 

 

 

 

제가 위에서 "논문으로 치면"이라고 했는데, 이 책은 정말 학자들의 연구 논문에 맞먹습니다. 이 책을 내기 위해 헤스톤이 브리티쉬 라이브러리에 가서 고문서들을 뒤지고, 영국의 음식사학자나 옛날 음식 재현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고, 연구실(주방)에 틀어박혀 실험과 실습을 거듭해 자기 이론(요리)을 실제화하고 문서화해 선보였으니, 여기 박사과정 학생들이 학위 얻기 위해 하는 것과 똑같은 작업을 한 거죠. 12년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책의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멋진 사진들과 그림들을 잔뜩 넣었다는 겁니다. 중세풍으로 그린 것 좀 보세요. 그림들이 하도 재미있어서 한참을 보면서 키득거렸습니다. 이것도 큰 사진으로 한번 보세요. 맨 왼쪽에 헤스톤이 그려져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헤스톤이 어릿광대jester가 되어 만찬 자리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네요. '귤'이 또 보입니다.

어우, 나도 저런 중세풍 그림에 출연하고 싶다! 

고풍스러운 건물에 가고일gargoyle로도 남고 싶다!

 

옛날에는 연회 때 음식 먹으면서 저렇게 유흥을 했다는데, 음식 자체도 주최한 자의 부를 뽐내기 위해 매우 화려해야 했고, 귀하고 비싼 재료들을 아낌없이 팍팍 써서 주최자의 호탕함을 보여줘야 했답니다. 연회 한 번 치르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다고 하죠. 때로는 주방장도 자기 음식에 해학을 담아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었다는데, 그래서 옛 시절 영국음식들에 "써프라이즈!" 하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과일인 줄 알았는데 반을 가르니 엉뚱하게도 고기가 나오거나, 식탁에 난데없이 체스판이 올라왔는데 알고 보니 당절임 과일sweetmeat로 만든 것이었다는 등. 이런 거 궁리하느라 요리사들 얼마나 골치 아팠을까요? 요즘 아방가르드 파인 다이닝에서 하는 짓들을 옛날에 이미 다 하고 있었다니까요.

 

 

 

 

 

 

 

 

 

영국음식 개관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도 사진 꼭 눌러 크게 보세요.

튜더 시대[1485-1603]와 스튜어트 시대[1603-1714]인 듯합니다.

 

엘리자베쓰 1세 여왕이 체셔 캣처럼 웃고 있는데, 이가 다 썩어서 까매요.  그말인즉슨, 영국인들이 이 시절부터 해외에서 들여온 설탕을 마구 먹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탐닉으로 먹은 게 아니라 당시에는 단 음식이 몸에 이로운 역할을 해준다는 잘못된 믿음들이 있어서 그렇게 먹어댔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먹어 보니 맛있거든요. 

 

중간쯤에 거창한 샐러드가 보이는데, 이 시기 사람들이 샐러드를 얼마나 근사하게 해먹었는지 모릅니다. 

 

국기로 된 리본들이 보이죠? 

처음 것은 네덜란드 국기입니다. 프랑스 국기와 늘 헷갈리죠. 더치들이 이 시기에 농업기술을 많이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엔 이탈리아 국기의 리본이 보입니다. 르네상스 때 이탈리아의 문예뿐 아니라 식문화도 유럽 전역에 영향을 많이 끼쳤습니다. 저기 맨 끝은 1666년 런던 대화재 때를 담은 것 같네요.

 

 

 

 

 

 

 

 

 

이 양반, 여기 또 들어가 있네.

영국에 파인애플 열풍이 불어 귀족들이 너도나도 자기 영지에서 경쟁적으로 파인애플을 재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후와 토양이 안 맞는 작물을 재배하려니 농업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요. 영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물입니다. <디너> 레스토랑에 가면 그래서 파인애플을 근사하게 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파인애플 소동 다음에는 남자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세상사를 논하고, 철학과 자연과학을 논하고, 농작물의 육종을 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성은 출입 금지였죠. 남편이 커피하우스에만 갔다 하면 집에 올 생각을 안 한다고 마나님들의 불만이 대단했습니다.

 

 

 

 

 

 

 

 

 

조지안 시대[1714-1837]와 빅토리안 시대[1837-1901]로 넘어옵니다. 먹거리가 풍성해지고 부엌에서 쓰는 도구들도 눈부시게 발달을 합니다. 1820년대에 영국에서 가스 스토브가 처음 개발되어 가스불로 조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폭발 사고가 잦아 다들 무서워하다가 1880년대나 되어서야 널리 보급이 되었습니다.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도 퍼져 나갔죠.

 

오후에 이것저것 차려놓고 간식 즐기는 아프터눈 티 관습도 빅토리안 시대 때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림에 있죠? 이것도 큰 사진으로 보십시오.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

레서피는 어떻게 구성돼 있냐면요,

먼저, 옛날 요리책에 담겼던 수많은 레서피들 중 헤스톤이 특별히 관심 있어 하는 것들을 골라 고음식 재현 전문가들과 함께 그 시절 조리 도구들을 쓰고 최대한 그 시절에 근접한 조리법을 써서 만들어 봅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요리를 실력 있는 푸드 스타일리스트와 사진 작가를 써서 사진에 담습니다. 정교한 배치와 조명을 통해 마치 ☞ 카라바지오 정물화처럼 보이게끔 했는데, 근사하죠? 1390년경의 영국 쌀 요리를 담은 사진입니다. 육수와 아몬드 밀크로 맛을 내고 사프론saffron으로 선명한 노란색을 냈어요. 요즘으로 치면 이태리의 리조또 같은 건데, 쌀 한 톨 안 나는 나라에 저 옛날 쌀 요리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죠. 영국인들은 자기 나라에서 안 나는 식재료를 보면 부지런히 구해다 들여 놓는 특출한 재주가 있습니다. 지금도 영국 수퍼마켓에 가면 전세계 올리브 오일을 다 볼 수 있어요. 산지에서는 자기들이 생산한 것만 먹을 확률이 높지만 영국인들은 전세계 것들을 다 갖다 놓고 먹습니다. 제가 늘 '비산지의 역설'이라고 설명하곤 하죠. 식민지 건설하면서 생긴 못된 버릇이라고 말하는 한국인들이 많은데, 대항해·대발견 시절 이전부터 갖고 있던 습관입니다. 영국인들 '종특'이에요.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사진을 실은 뒤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옛 요리책의 레서피를 그대로 싣습니다[왼쪽]. 

 

이렇게 옛날 레서피 대로 음식을 만든 다음에는 맛을 보고 어떤 요소를 취하고 어떤 요소를 버릴지, 또, 취한 요소는 어떻게 현대식, 자기식으로 재해석할 건지 궁리합니다. 고민과 시행착오를 책에 그대로 밝혀 놓았습니다. 말하자면, 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비화를 담은 거죠. 그림과 사진도 많지만 글도 많은 요리책입니다. 내용이 풍부해서 제가 좋아합니다.

 

 

 

 

 

 

 

 

 

이 쌀 요리를 담은 요리책이 나온 시기(1390)의 영국 정세와 음식문화도 간략히 서술을 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자기가 재해석한 요리의 레서피를 싣습니다. 헤스톤의 미슐랑 3-스타 레스토랑 <팻 덕>과 2-스타 레스토랑 <디너>에서 내는 것들이므로 특수 장비도 필요하고 조리법도 복잡합니다. 중세 레서피의 재해석에 재미있게도 첨단 조리 테크닉들이 난무합니다. 업계에 계신 분들께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저 같은 일반인이 따라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해 볼 만한 쉬운 레서피가 아주 드물게 끼어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여염집 시답잖은 도구들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고난도의 요리들이에요. 저는 영국음식에 대해 글을 써야 하니 한 권 샀지요. 요리는 안 따라해 보더라도 파인 다이닝에 관심 있고 영어 문서 읽는 데 큰 문제 없는 분들은 재미있게 보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조리법, 조리도구, 식품저장법 등의 발전, 다른 나라들의 요리책 및 음식들도 많이 언급하므로 읽고 나면 상식이 많이 늘 거예요. 멋만 잔뜩 부린 여느 레스토랑 포트폴리오 쿡북들과는 다릅니다.

 

 

 

 

 

 

 

 

 

짠. 

그렇게 해서 나온 헤스톤의 재해석 작품.

1390년경의 영국 쌀 요리가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 2013년 후배 요리사의 손에서 재탄생했습니다. 현재 ☞ 런던의 <디너> 레스토랑에서 전채로 내고 있는 요리입니다. 이 책에 있는 요리 대부분이 <디너>에서 내는 것들이니 <디너> 가서 드실 분들은 이 책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영국은 정말 '온고지신'의 나라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잘 보존해 둔 옛것들이 현대의 창작자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줍니다.

 

 

 

 

 

 

 

 

 

예를 하나 더 보여 드릴게요.

이건 1390년경의 영국 치즈케이크입니다.

요즘 보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아 깜짝 놀랐습니다. 

 

 

 

 

 

 

 

 

 

이건 헤스톤의 재해석.

마치 숯가루 뿌린 단순한 고트 치즈 원기둥처럼 보이게 만들었는데 반을 가르면 속에는 별천지가 펼쳐집니다. 조리법이 복잡해요. 옛 요리사들의 "써프라이즈!" 기법을 쓴 거죠. 저는 치즈 시식기 쓰는 사람이니 <디너>에 가면 디저트로 이걸 시켜 먹어야겠습니다.

 

 

 

 

 

 

 

 

 

이건 베자루에서 퇴비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죠?

부엌에서 채소 다듬고 생긴 자투리 식재료들도 함께 형상화했고요. 흡사 영국인들의 가드닝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Compost'라는 이름의 전채입니다.

 

푸욱 익힌 과일이나 채소, 고기 등을 뜻하는 콩포트compote,

과일과 채소를 함께 향신료로 맛내고 식초와 꿀에 절인 콩포스트composte, ('혼합물'이라는 뜻.)

퇴비를 뜻하는 콤포스트compost, (퇴비도 '혼합물'임.)

 

재미있게도 이것들의 라틴어 어원이 모두 같은데[componere = put together], 이 점에 착안해 개발한 요리입니다. 이 양반이 이런 짓을 잘 합니다. 알록달록 야채밭과 정원도 만들곤 하죠. 우리나라 요리사들 중에도 흙 깔린 밭 흉내 내는 사람 많아요.

 

 

 

 

 

 

 

 

 1591년경의 영국 딸기 타트tart와 단것들.

하얀 원뿔은 설탕.

 

 

 

 

 

 

 

 

헤스톤의 재해석. 딸기와 크림은 영국 디저트의 대표 재료.

커스타드와 쇼트브레드도. 딸기 철에 가야 맛볼 수 있음.

 

 

 

 

 

 

 

 

 사진이 하도 신기해서 한 장. 과일 중에 중세 요리가 하나

들어가 있으나 아무도 못 찾을 거라 장담. 정답은 댓글에.

 

 

 

 

 

 

 

 

헤스톤의 재해석.

중세 영국의 유머가 담긴 헤스톤의 시그너춰 디쉬.

 

 

 

 

 

 


레스토랑 <디너>에서 전채로 내고 있는 "Meat Fruit".

겉모습은 영락없는 귤인데 토스트에 발라 먹는

치킨 리버 파르페!

 

 

하여간, 최고의 요리사, 그림쟁이, 사진쟁이, 푸드 스타일리스트, 북 디자이너, 고음식 전문가, 역사가들이 총동원돼 만든 요리책을 보니 저는 이런 환경을 가진 이 나라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잘 나가는 자기 레스토랑의 비법을 이렇게 낱낱이 공개하다니, 서양인들 사고방식 참 신기하죠. 학술논문과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만천하에 이건 내가 연구한 거다, 공표하는 거죠. 예술가들의 포트폴리오 같기도 하고요. 이 글도 한번 읽어 보십시오. ☞ 요리책과 레서피 저작권에 관하여 

 

혹 이 책에 관심 있는 분들은 ☞ 아마존에서 지금 주문하세요. 정가 40파운드짜리 책인데 1월 한달간 행사로 저 잘 만든 두꺼운 책을 겨우 10파운드에 팝니다. (슬립케이스가 딸린 고급 천 제본cloth-bound 판도 있는데 비싸요. 이건 염가판입니다. 책 내용은 똑같습니다.)

 

파일을 하나 걸겠습니다.  

 Historic Heston: Meat Fruit Recipe [pdf]

출판사에서 맛보기로 배포한 자료인 것 같은데, 이 책에 있는 헤스톤의 시그너춰 디쉬를 담고 있습니다. PDF 파일이니 관심 있는 분은 저장해 놓고 보십시오.

 

 

 

 

 

 

 

 

 

 

헤스톤의 <디너>에서 밥 먹은 이야기

 영국음식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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