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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은 생선 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본문
'자연주의 한정식'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가원>이라는 한정식집에 다녀왔습니다. 뜰에 꽃과 나무가 많아 한참 구경했습니다. 음식도 괜찮았습니다. 가게 이름 앞에 '자연주의 한정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집입니다.
'자연주의'라는 용어는 영국에서도 많이 들었으나,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이 용어를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달라 같은 북유럽이라도 스칸디나비아쪽 요리사들과 영국 요리사들의 생각이 또 다릅니다. 영국에서는 제철 중에서도 최상의 상태에 이른 재료들을 적극 활용해 요리한다는 뜻을 지닐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계절별이 아닌 재료 수급별로 메뉴가 달라져 심할 경우 음식이 매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재능 있고 야심찬 요리사들에게는 재미도 있고 대단한 도전도 될 수 있죠.
스칸디나비아쪽 요리사들은 '제철' 개념을 '현지 재료local ingredient' 개념과 접목해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서 나는 것들만 써서 요리하거나 '채집요리'를 선보이기도 합니다. 레몬이나 향신료 같은, 자국에서 나지 않는 재료는 일절 배제하는 엄격파들도 있어 이 점에서 영국의 요리사들과 노선이 갈립니다. 지구를 그리 넓지 않은 '촌'으로 인식하는 영국인들은 예로부터 남의 땅에서 나는 재료들에도 관심이 많아 심지어 만든 지 하루 이틀 안에 다 먹어야 하는 이태리의 ☞ 부라따도 초고속으로 공수해 수퍼마켓 선반에 올려 놓을 정도이고, 레몬·오렌지·라임 같은 감귤류와 이국 향신료도 우리가 식초, 참기름 쓰듯 많이 씁니다. 멀리 있는 재료들도 얼마든지 'seasonality'를 맞춰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돼 있는 나라여서 우리가 김장하듯 오렌지 제철에는 스페인산 오렌지Seville oranges를 가져다 수백년째 마말레이드를 담급니다. 영국에서 잘 익은 스페인산 천도복숭아 사 먹고 감격해 ☞ 글을 남긴 적도 있는데,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채집요리에 관한 제 입장은 단순합니다: 너도나도 밖에 나가 채집하다가는 산천 거덜나고 야생동물 다 굶어 죽는다.
한국에서는 자연주의의 의미를 대개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 조미료를 써서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요리' 정도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간혹 유기농 식재료나 전곡whole grain을 쓴 음식을 뜻할 때도 있고, 내가 내 손으로 기른 것을 먹는다는 의미를 지닐 때도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채식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하고, 국수주의, 배타성과 손잡을 경우 저 사악하고 기름진 '코쟁이들' 음식의 대척점으로 한식 전체를 자연주의 음식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음식 나온 것을 가만히 보니 <가원>은 자연주의라는 용어를 '천연 조미료를 써서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요리'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습니다. 탕평채, 해물볶음, 갈비찜,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등은 특별히 'seasonality'를 살린 요리라고 보기 어렵죠. (이 집은 일년 내내 같은 음식을 냅니다.) 그렇다고 'local ingredient'를 적극 활용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벽에 붙은 원산지 표시를 보니 주재료 중 상당수가 미국, 호주, 노르웨이에서 온 것들입니다. 유기농을 고집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그런데 또, 갈비찜 같은, 여러 재료들과 함께 넣고 장시간 익힌 스튜를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요리'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 아닌가 싶습니다. 탕평채도 딱히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요리라고 보기 어렵고요. 비빔밥처럼 여러 재료들을 한데 넣고 섞어 먹어야 참맛이 나는 요리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집 음식에 왜 자연주의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는지, 먹는 내내 사실 의아했습니다. 이 집 음식은 그냥 '맵거나 짜거나 달지 않고 양념 범벅하지 않은 음식'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연주의 음식에 대해서는 날 잡아 따로 글을 하나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 오늘은 맛과 격식보다는 음식을 내는 방식에 대해 논해 보려고 합니다.
한정식도 이제는 양식처럼 코스의 틀이 잡힌 듯합니다. 대개는 죽을 먼저 내지요. 호박죽이었는데 먹기 편하도록 1인 1그릇에 다 따로 담아 줍니다. 1인 1그릇. 가장 이상적인 형태죠.
새콤달콤한 과일 소스를 끼얹은 샐러드 3인분이 한 접시에 담겨 중앙에 놓였습니다. 세 사람이 재빨리 눈으로 접시 위를 훑어 3분의 1 양을 가늠한 뒤 각자 자기 앞접시에 옮겨 담았습니다. 처음부터 1인 1접시로 나뉘어 제공됐으면 더 편했겠지만 이렇게 덜어 먹는 것도 그리 많이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탕평채 역시 3인분이 한 접시에 담겨 나왔습니다. 일행 중 한 명이 섞는 수고를 마친 뒤 세 사람이 또 눈치껏 3분의 1씩 자기 앞접시로 옮겨 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권여사님이 딸과 사위 많이 먹으라고 3분의 1보다 약간 적게 담으시는 듯 보입니다. 마음이 쓰였으나 상 위에서 옥신각신 하기 싫어 그냥 넘어갔습니다. 처음부터 1인 1접시로 나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권여사님, 이런 데 오시면 늘 자식들 먹이느라 많이 드시지도 못 하고.
새우를 얹은 셀러리 전이 세 개 나왔습니다. 세 사람이 깔끔하게 하나씩 집을 수 있어 편했습니다.
참,
이 집은 식기를 제대로 된 도자기로 씁니다. 셀러리 전을 담았던 그릇인데, 삐뚤빼뚤 목판화 느낌의 국화 무늬가 정겹죠. 음식이 제공될 때마다 그릇에 쓰인 기법을 따져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김치 대신 낸 오이 피클입니다. 곁들임 음식이므로 먹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집어먹을 수 있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으나 가장자리에 놓인 탓에 먼데 앉은 사람은 팔을 좀 많이 뻗어야 해서 불편했을 겁니다. (그게 저였습니다. 그래서 오이 피클은 하나밖에 먹질 못 했습니다.)
해산물 요리가 나왔습니다.
으음... 구성 재료가 좀 복잡하네요. 세 명 모두 각 재료들이 빠짐없이 포함되도록 퍼 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재빨리 훑어보니 빨간 페퍼가 두 쪽밖에 안 보입니다. 누군가는 빨간 페퍼를 못 먹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제가 빨간 페퍼를 빼고 3분의 1정도를 먼저 떠서 얼른 제 앞접시에 담아 버렸습니다. 중화풍으로 전분을 써서 소스를 재료에 들러붙게 하면 좋았겠지만 한식이므로 중식 기법은 쓰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숟가락을 가져가 바닥에 고인 맛난 즙을 두어 번 떠 왔습니다. 옮겨 담는 동안 상에 즙을 조금 흘리기도 했습니다. 불편했습니다.
갈비찜 3인분이 한 접시에 담겨 나왔습니다. 식탁에 놓이자마자 또 재빨리 눈으로 훑어 갈비 개수를 세고, 그 다음엔 푸욱 익은 맛있는 무와 당근 개수를 세고, 마지막으로 떡 개수를 센 뒤 3으로 나누었습니다. 개수가 인원수대로 명쾌하게 나누어 떨어지질 않아 제 접시에 좀 적게 옮겨 담았습니다. 그런데 일행 두 사람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다들 적게 담아 음식이 애매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예정된 '더 들게나' 옥신각신이 펼쳐집니다.
"갈비 남았는데 더 드세요."
"아니야, 나는 양껏 덜어 먹었으니 자네가 더 먹어."
"아닙니다, 저야말로 많이 먹었는걸요."
많이 불편했습니다.
갈비와 함께 제공된 무싹 샐러드는 각자 적당히 3분의 1씩 덜어 담았습니다. 앞에서는 알팔파싹 샐러드를 냈었는데, 새싹 샐러드를 두 번이나 먹게 되었습니다.
한정식 마지막에 꼭 들어가는 밥 코스.
앞서 그렇게 많은 음식을 내고도 반찬을 무려 열 네 가지나 깔고,
갓 지은 솥밥도 제공하며,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도 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숭늉 쇼를 펼칩니다. 뜨거운 물을 부으니 '촤아아아', 요란한 소리를 낸 뒤 부르르 끓습니다. 장관이죠.
그런데 단단은 배가 불러 항상 이 마지막 밥 코스를 못 먹습니다. 밥, 반찬, 된장찌개, 누룽지, 숭늉은 손도 못 대고 고스란히 다 남겼습니다. 이걸 다 먹는다면 한국인들 식사량도 서양인들 못지 않은 겁니다.
한정식은 생선 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정식에서 생선구이 드실 때 불편하다고 느낀 적 혹시 없으십니까? 한식 상차림에서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늘 상 한가운데에 뼈째 구운 생선을 올리지요. 저는 이런 식으로 생선을 내는 게 늘 불편하고 못마땅한데 참 오랜 세월 동안 바뀌질 않고 그대로입니다. 충분히 예상은 했지만 이 고등어구이 하나를 가운데 두고 이 날도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요,
최연장자이신 우리 권여사님은 어른인 당신이 생선에 젓가락을 대서 살을 바르고 있으면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젊은이들이 기다릴 게 뻔하므로 우리가 불편해할까봐 아예 고등어구이는 드시기를 포기하셨습니다.
고등어구이에서 좀 멀리 떨어져 앉은 단단은 왼손잡이인데다 젓가락질이 서툴러 멀리 있는 생선의 캬라멜화한 표면을 힘 주어 깨부수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칠 엄두가 나지 않아 고등어구이 먹기를 포기했습니다.
고등어구이에 가장 가깝게 앉은 다쓰베이더는 "고등어 안 드세요?"를 일행한테 몇 번이나 물으며 머뭇머뭇하다가 겨우 발라 먹었습니다. 생선구이 하나를 혼자 먹고 있는 게 민망했는지 먹다 말고 자꾸 두툼하게 살점을 떼어 제 밥위에 얹어 줍니다.
한정식에서 생선구이 하나 놓고 이런 경험 하신 분들 많을 겁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죠. 서로 눈치 봐야 하고, 안 먹고 있는 사람 있으면 같이 먹자고 권해야 하고, 더 먹으라고 권해야 하고, 눈치 안 본다 해도 팔 뻗어 먼데 있는 생선의 가시를 발라 먹는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 잘 안 먹게 되고, 내 앞에 놓인 게 아니라서 알뜰하게 발라 먹는 것도 불가능해 살을 너덜너덜 남기기 일쑤. 아까운 생선.
앞접시는 왜 안 바꿔 줘
말 나온 김에 한정식의 불편한 점 하나를 더 들자면, 한 번 제공한 앞접시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바꿔 주질 않으니 앞서 먹었던 음식의 잔여물이 남아 보기에도 좋지 않고 다음 음식을 먹을 때 맛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요리 나올 때마다 냅킨으로 앞접시 표면을 닦아 낼라 치면 또 식탁 위에 음식물 묻은 보기 흉한 냅킨이 쌓이지 않도록 별도의 신경을 써야 하고요.
각자 먹던 숟가락으로 알아서들 덜어 드셔
게다가 요리를 놓고 가면서 더는 숟가락serving spoon도 안 줍니다.
먹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한식 차림
저는 밥상 가운데에 반찬 늘어놓는 한식 차림이 마뜩잖습니다.
'어, 내가 이 반찬을 나도 모르게 혼자서 너무 많이 먹은 건 아닌가?'
또는,
'뭐야, 나는 이 반찬은 아직 손도 안 댔는데 누가 다 먹었어?'
또는,
'저 치는 왜 저렇게 반찬을 뒤적거려? 더럽게스리.'
찌푸리게 될 때도 있고,
'어어, 쟤 감기 걸린 걸로 아는데, 반찬 같이 먹는 거 괜찮을까.'
걱정해야 할 때도 있지요.
서로 눈치 보느라 다 못 먹고 찔끔 남겨지는 반찬도 늘 있게 마련이고,
"저런, 다쓰 서방한테서 반찬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네."
그릇들 자리 바꾸기 리추얼도 먹는 동안 한 번쯤은 꼭 일어납니다.
위생 문제는 둘째치고, 내가 이 반찬 그릇에서 얼마만큼을 집어 들어야 상에 앉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매번 신경 쓰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입니다. 요리도 상 가운데 그냥 덜렁 놓고 갈 게 아니라 고급 중식당에서처럼 서버가 일일이 손님 앞접시에 덜어 주고 가든가, 아니면 1인 1그릇으로 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요컨대, 한식도 '개인화'를 좀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생선구이는 굽기 전이나 구운 뒤 나눠 먹기 좋게 토막을 내서 올리거나, 치어 말고 원래 그 크기가 작은 생선을 인원수대로 제공하거나, 유럽의 식당들처럼 서버가 먹기 좋게 살을 바른 뒤 나눠 주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
▲ 산해진미 후 후식 없이 티백 녹차 제공 ㅋ
▲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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