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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프 본 윌리암스의 <탈리스 환상곡> -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본문
영국 작곡가 중에 레이프 본 윌리암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Ralph'를 '랄프 로렌' 할 때처럼 '랄프'로 발음하지 않고 '레이프'라 발음할 때가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영국의 전통 발음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이 발음이 다소 예스럽고 상류층스러운 느낌이 난다고 해서 철자대로 '랄프'라 불리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원하는 대로 불러 주는 게 가장 좋겠죠. 영국 배우 Ralph Fiennes는 '레이프 파인즈'라 불러 줘야 합니다. 이 양반이 좀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거든요. 아, 대사 읊거나 말하는 걸 보면 발음이 벌써 '포쉬posh' 하잖아요.
오늘은 본 윌리암스의 작품 하나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총 연주시간 17분 정도 걸리는 곡입니다. 짧은 티타임용 음악으로 아주 좋으니 얼른 영국산 예쁜 본차이나 찻잔에 홍차 한 잔 우려서 갖고 오세요.
보글보글, 쪼로록, 사라락, 달그락 달그락 (→ 차 우리는 소리)
준비 되셨나요?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인 1910년.
영국의 글로스터 대성당Gloucester Cathedral에서 레이프 본 윌리암스의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Fantasia on a Theme by Thomas Tallis>이 초연됩니다.
1999년.
같은 장소에서 당시의 연주를 재연합니다. 이 영상이 바로 그 때의 연주를 담은 영상입니다. 음량이 너무 작게 올려졌으니 오디오 볼륨을 좀 키우셔야 할 겁니다.
오케스트라에서 현악기 그룹만 똑 떼어다 연주를 시키고 있죠? 현악기를 다시 세 그룹으로 나누어 공간감, 어려운 말로 음장감을 더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과 스테레오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이라 작곡가들이 악기나 합창단을 이렇게 물리적으로 나누어 배치해 음향 효과를 내곤 했습니다. 보통은 인원수 많은 그룹으로 큰 소리를 내고 적은 인원으로 된 두 번째 그룹으로 작은 소리를 내게 해 대비 효과를 주곤 했죠. 본 윌리암스는 작곡가이면서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귀썰미' 있는 분들은 작곡가가 현악기들을 통해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을 겁니다.
듣다 보면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면서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같은 판타지 영화의 장면들도 떠오를 겁니다. 이 곡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1954년 출판)을 쓰기 훨씬 전에 작곡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이런 판타지 소설들이 괜히 쏟아져 나오는 게 아녜요. 영국의 기후와 자연과 옛 건물들과 음악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런 작품들을 영글게 하는 겁니다. 이 곡은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영국 클래식 음악 10위 안에 항상 꼽히곤 합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판타지 영화 음악의 선구라 해도 좋을 만큼 웅장하면서도 신비롭고 아련한 분위기를 내는데, 여기에는 영국 옛 음악 특유의 요소(프리지아 선법과 꽉찬 밀집화음 등) 외에 음악 외적인 요소, 즉, 잔향이 오래 지속되는 건물 구조도 한몫을 합니다. 작곡가가 이 장소를 특별히 염두에 두고 곡을 썼기 때문에 일반 콘서트 홀에서는 이 연주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음장감은 기대하시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곡이 초연되었던 글로스터 대성당은 <해리 포터> 쵤영지로도 유명합니다. 미국인들도 관광을 많이 오죠. 영국에는 이태리의 아름답고 화려한 대성당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낡고 으스스한 중세 분위기의 오래된 고딕 성당들이 많아 판타지 영화 찍기에 아주 좋아요. 위 영상에는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찍은 <해리 포터>의 몇몇 장면들이 담겨 있습니다.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악보를 띄운 영상으로도 걸어 드립니다. 본 윌리암스가 활동하던 당시는 유럽 대륙의 작곡가들이 새로운 소리를 찾아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 기존 음악들의 언어를 과감히 벗어던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럴 때 본 윌리암스는 오히려 더 옛날로 돌아가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기로 결심하고 스트라빈스키Stravinsky나 버르토크Bartok처럼 자국의 민요와 옛 찬송가들에 천착을 합니다. 이 곡에도 영국의 옛 거장 토마스 탈리스(c. 1505-1585)의 선율이 주제로 이용되고 있죠. (☞ 토마스 탈리스의 오리지날 악곡) 저는 토마스 탈리스의 이 오리지날 성가anthem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곡이지만 꼿꼿하고 단호하면서도 대비적으로 유연하게 흐르는 부분도 있어 다채롭고 완성도가 높거든요. 이 짧은 곡에서도 대가의 솜씨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 1560년에 출판된 탈리스의
<파커 대주교 시편집에 붙인 아홉 개의 선율>
(9 Tunes for Archbishop Parker's Psalter) 중 세 번째 곡.
주선율melody이 최상성부meane가 아니라
테노르tenor 성부에 있음에 유의.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 해도 본 윌리암스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작곡가들은 2류 작곡가 취급을 받았었습니다. 나이가 드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보라, 내 작품은 이전엔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외치는 예술가는 죄다 약장수, 사이비로 보여요. 단언컨대, 예술에서 - 적어도 음악에서는 - 이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어법이란 건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새것이라 여겼던 것들의 원형을 옛것에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발견을 하고 나면 혼자 피식 웃게 되죠. 모든 음악 작품은 다 제 어미가 있게 마련입니다. 탁월한 성찰에서 나온 경구 하나를 읊어 보겠습니다.
Originality is the art of concealing your sources.
독창성이란 출처를 들키지 않는 기술이다.
이 곡을 들을 때면 음악 자체가 주는 감회말고도, 끊임없이 들리는 저 현악기 특유의 '쉬이이익'하는 마찰 소리가 마치 바람 부는 영국의 황무지를 연상케해 아득해집니다. 특히 가을과 겨울철의 을씨년스러운 황무지를요. 경험해 보지 않았던, 혹은, 실존하지 않았던 어떤 막연한 것을 그리워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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