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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미국은 왜 유럽만큼 복지제도가 좋지 못한가

단 단 2014. 3. 16. 00:00

 

 

 

 The NHS launch leaflet, July 1948.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영국의 국가의료서비스NHS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한국 신문에서 경제난으로 인한 자살 소식 기사를 보면 댓글 중에 이런 글이 항상 끼어 있죠. "젊어 게으름 떨면 나이 들어 저 꼴 나는 거다."

 

아직 인생에서 시련을 겪어 보지 않아 감각이 없는 젊은이, 또는 비교적 평탄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잘 합니다. 저는 아직 큰 시련을 겪어 보지 않은 젊은 사람 축에 들지만 이 말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인생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요. 가족 중 누구 하나 큰 병 나거나, 아픈 아기 낳거나, 사고 당하거나, 갑자기 직장 잃거나, 사업 망하면, 아무리 성실하게 산 서민이라도 버티다 버티다 결국 끝장 나는 것 아닙니까. 저희 집안에도 아픈 아기가 있었는데요, 제가 대학원 다니면서 한달 내내 학생 가르쳐 번 돈이 겨우 하루이틀치 중환자실 비용밖에 안 되더라고요.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말은 미국인들이 잘 하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미국의 복지가 유럽만 못한 게 단순히 미국인들이 여기 유럽인들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부족한 차갑고 못된 사람들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죠.) 그랬는데, 경영학 전공하고 있는 어느 미국 유학생의 글을 읽어보니 유럽인과 미국인의 복지에 대한 시각 차에는 좀 더 복잡한 원인이 있었더라고요. 이 글은 매우 흥미로우니 길더라도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댓글까지 다 읽어 보세요.
☞ 미국은 왜 유럽만큼 복지제도가 좋지 못한가

 


글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영국은 유럽 내에서도 복지가 저 밑바닥 수준인 국가입니다. 유럽과 미국의 중간 지점에서 미국 쪽에 더 가깝죠. (학계에서 괜히 '영미권, 영미권' 하는 게 아니라는. ) 영국 보수당 정치인들은 틈만 나면 그 밑바닥 수준의 복지마저도 더 줄여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데일리 메일> 같은 황색 언론은 어디서 복지 시스템 등쳐 먹고 탱자탱자 사는 한심천만한 하층민 사례만 잘도 골라다 신문에 싣습니다. 성실한 세금 납부자들 화를 돋워 복지를 축소해 보겠다는 거죠. 어떤 복지 국가든 그런 얌체들은 존재를 하겠지요.


영국의 복지가 이렇게 유럽의 다른 국가만 못한데도 제가 영국 살면서 '복지'를 운운할 수 있는 건 바로 '국가의료서비스NHS' 때문입니다. 아플 때 당장 돈 없어도 치료 받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좌우간 삶이 다 감격스러울 지경입니다. 건강 염려증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있던 병도 훌훌 날아갈 것 같아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 여기서도 의료사고는 물론 일어납니다. 운영에 있어 불합리한 부분도 분명 있겠고요. 한국에서도 의료사고나 문제점을 다루는 기사들 많이 보잖아요. 영국에서는 국가라는 한 곳에 그런 문제점들이 다 집중되니 더 문제가 많아 보일 뿐이죠. 그런데 한국의 보수 신문들은 영국 NHS의 이런 면들만 열심히 모아다 신문에 싣지요. 신문을 조중동만 보시는 우리 권여사님은 오히려 좀 덜 한데, 오로지 조선일보만 보시는 시부모님은 저희가 의료 후진국에 살고 있다고 여기시고 저희들 걱정을 다 하시더라고요. 다음의 기사가 영국의 무상의료 취지와 현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분석을 보여줍니다. ☞ 무상의료는 공짜가 아니다

 

아픈 사람을 당장 눈 앞에 두고 돈 있냐 없냐를 물어 돌려보낸다는 것, 참 가혹하다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이런 건 기독교 정신에도 맞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도 맞지 않다고 봅니다. 다쓰 부처는 영국 살면서 응급실도 여러 번 이용해 봤고 주치의 면담도 자주 해 봤는데요, 학생 신분이라 세금 한푼 못 냈지만 단 한 번도 홀대 받는다는 느낌 들지 않았습니다. 상담 시간도 15분 이상 길게 잡아 꼼꼼히 봐 줍니다. 병원 예약을 하면 아무리 늦어도 3일 안에는 의사를 볼 수 있었고 심지어 당일에 보는 때도 있었습니다. 응급상황에서는 예약 없이 바로 들이닥쳐도 시간 잘만 내줬습니다. 한국에 비해 서비스 속도가 느리다고 하는데, 모르겠어요, 저는 느리다는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고 한국의 '명의' 만나 보는 것만큼 오래 걸리고 힘들진 않았는걸요. 가장 좋았던 점은, 어떤 증상을 호소하면 그 증상에 대해 말로만 설명해 줘서 돌려보내지 않고 이해를 돕는 자료들을 바리바리 챙겨 환자 손에 쥐어 주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학구적인 단단은 또 이런 문서 읽는 거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의사가 직접 챙겨 준 문서나 지침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증상의 원인에 대한 억측과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집니다. 병원 돌아가는 내부 사정이야 제 알 바 아니고, 그저 서비스 이용자인 환자 신분으로 수년간 체험해 본 영국 NHS에 굳이 점수를 매겨 보자면, 10점 만점에 8-9점 정도?

 

미국인들은 가난한 사람을 게으르기lazy 때문에 가난한 거라 생각하고 유럽인들은 불행한unfortunate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에 복지제도의 시행에 차이가 왔다는 분석이 흥미로웠습니다. 흑인이나 히스패닉처럼, 나와는 피부색이 다른 인종에게 느끼는 백인들의 이질감heterogeneity 등도 미국이 복지국가가 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에도 고개가 끄덕여졌고요. 한국은 아동 무상 급식이고 노인 무료 교통이고 뭐고, 장애인 전폭 지원과 암·난치병·치매 환자에 대한 무상 의료, 이 두 가지만 제공되는 국가이기만 해도 저는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징그러운 우리 중장년 아저씨들 보신음식 찾아 삼만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음식 먹을 때마다 온 국민이 효능 드립 하지 않아도 되니 한결 여유롭고 우아한 식문화가 발달하지 않겠습니까.


어, 복지 얘기하다 음식 얘기로 끝났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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