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spotter

영국 치즈 ◆ 링컨셔 포처 Lincolnshire Poacher 본문

영국 치즈

영국 치즈 ◆ 링컨셔 포처 Lincolnshire Poacher

단 단 2014. 6. 5. 00:30

 

 

 

 링컨셔 Lincolnshire

 

 


링컨셔 포처.
영국인들 발음으로는 링컨셔 포우처.
우리말로 번역하면 '링컨셔의 밀렵꾼'.
사냥꾼이 아니라 밀렵꾼입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자가 지주의 땅에 몰래 들어가 고기를 마련해 온다는 숨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옛 시절엔 이 밀렵꾼에 대한 처벌이 무시무시했지요. 그래서 목숨 걸고 들어가 밀렵을 한 뒤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무용담도 많이 전해져오고요. 이게 사실 도적질과 마찬가지인데, 권위에 맞서고 힘 있는 자를 한껏 조롱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니 재미있죠. 로빈 후드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영국인들은 '링컨셔 포처'라는 단어를 들으면 즉각 다음의 세 가지를 떠올립니다.

 

 

 

 

 

 

 

 

우선, <링컨셔 포처>라는 이름의 링컨셔 지역 민요. 선율이 어찌나 경쾌하고 리듬이 힘찬지, 한 번 듣고 나면 목욕하고 설거지할 때마다 머리 속에서 맴맴 돕니다. 영국인들 말로는 'earworm'이라고 하죠. 청중들이 후렴구를 따라하니 더 흥이 나네요. 약간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들죠.

 

 

 

 

 

 

 

 

그 다음으로는, 첩보를 위해 영국 정보기관에서 내보내던 암호화된 단파 방송. 우리말로는 '난수방송Numbers Station'이라고 하죠. 섬뜩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이 있어 이 난수방송의 매력에 빠진 사람이 전세계에 많이 있습니다. 이것만 전문으로 이야기하는 블로거들이 다 있을 정도죠. 해독을 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거의 불가능하다죠? 냉전 시대의 산물입니다. 영국의 <링컨셔 포처>는 그래도 명랑한 목소리와 다섯 번째 숫자마다 붙는 악센트 때문에 경쾌한 느낌이 좀 있는데, 다른 나라 난수방송들 중에는 섬뜩한 것들이 많아요. 아래는 그 섬뜩한 것들 중 하나인 폴란드의 <스웨디쉬 랩소디>입니다. 영상은 후대에 와서 비디오 아트 작업하는 이들이 붙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음악 들으려 아날로그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다 어느 날 이런 채널을 맞닥뜨렸다고 생각해보세요. 기이하고 궁금해서 사람 미치는 거죠. 그래서 팬이 많습니다.

 

 

 

 

 

 

 

 

흐어어;;
"Four" 발음할 때 귀신이 흐느끼는 것 같아 무서워;;
"Achtung!"은 독일 여자 귀신 신음 소리 같아;;

 

 

 

 

 

 

 

 


<링컨셔 포처> 하면 생각 나는 것 - 마지막으로, 링컨셔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소젖 경성 치즈. 오늘 소개할 치즈입니다. 링컨셔에 있는 형제 둘이서 전통 제법에 따라 만듭니다.

F.W. Read & Sons Ltd

 

 

 

 

 

 

 



포장에 쓰인 문구가 이 치즈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네요.
Huge Savoury Complexity. Sweet & Fruity.
매우 복잡한 짠맛. 단맛과 과일 맛.


살균하지 않은 생유로 만들고 동물성 효소로 굳힙니다. 안타깝게도 채식주의자는 이 치즈를 먹을 수가 없겠네요. 시장을 넓히기 위해 식물성 효소를 써서 굳혀봤더니 쓴맛이 나더랍니다. 어느 나라든 생유를 쓰고 동물성 효소로 굳히는 것이 전통방식이죠.

 

 

 

 

 

 

 



링컨셔 포처의 생산 과정

치즈 생산 과정을 살펴보니 체다 제법과 유사하면서도 약간 다릅니다. 작은 농가에서 고작 두 사람이 만듭니다. 하루에 600kg이나 되는 응유curd를 둘이서 하루 몇 차례씩 수작업으로 다뤄야 하니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고 하죠. 치즈 장인들은 그래서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지요.


1. 오후에 짠 생유를 밤새 냉장시켜 차게 식힌 다음 이튿 날 아침에 짠 따끈한 우유와 합쳐 그 날의 치즈 생산에 들어갑니다.


2. 스타터starter를 넣어 유당lactose을 젖산lactic acid으로 변화시킵니다. 영국의 전통 경성 치즈들은 대개 이 방식을 써서 만들죠. 숙성을 오래 시킬수록 유당이 젖산으로 많이 바뀌어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들도 별문제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우유만 마셨다 하면 배가 우르릉꽈르릉 하는 분들은 치즈를 브리나 카망베르 같은 수분 많은 어린 치즈 말고 오래 숙성시킨 경성 치즈를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농축되어 칼슘도 더 많고요.

 

3. 우유를 굳히기 위해 수송아지 네 번째 위장에서 추출한 효소를 넣어줍니다.


4. 그런 다음 원유를 섭씨 41℃까지 따끈하게 데워줍니다.


5. 원유가 굳어 응유가 되면 응유에서 유장whey을 빼내 질감 맞추는 작업을 합니다. 멀건 액체인 유장과 응유가 분리되도록 응유를 콩알 만한 크기로 잘게 잘라줍니다. 한 시간 동안 더 휘저어 콩알 크기의 응유를 밀알 크기로 더 잘게 만듭니다.


6. 통에서 유장을 완전히 빼낸 뒤 통 바닥에 남아 뭉쳐진 거대한 응유 덩어리를 큰 벽돌 크기로 잘라 차곡차곡 쌓아줍니다. 이 작업을 세 번 반복합니다. 체다 제법과 같죠. 이 작업을 '체다링'이라고 합니다.


7. 그런 다음 분쇄기에 넣어 손가락 크기로 또다시 잘게 다시 부숩니다.


8. 잘게 부순 응유에 손으로 소금을 뿌려줍니다. 이 작업도 중노동이라고 하네요.


9. 원형 치즈 틀에 넣어 36시간 또 압착을 합니다. 유장이 더 빠져 더욱 단단해집니다.


10. 틀에서 빼낸 뒤 나무 선반 위에 두어 1~2년간 숙성을 시킵니다. 숙성 기간 동안 가끔씩 뒤집어줘 수분이 한쪽으로만 몰리는 것을 방지하고 고른 질감이 나도록 합니다.

 

 

 

 

 

 

 



맛은 신기하게도 체다와 그뤼에르와 파마산을 합친 맛이 납니다. 강렬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어요. 체다의 짭짤하고 쨍한 맛, 그뤼에르의 달고 쌉쌀한 맛, 파마산의 진한 우마미와 파인애플 맛이 납니다. 치즈 보드에 올려 그냥 먹어도 좋고 요리에 다양하게 활용해도 좋아요. 체다처럼 써도 좋고, 그뤼에르처럼 써도 되고, 파마산처럼 음식에 갈아 넣어도 좋죠. 잘 녹아서 토스트 위에 얹거나 파스타 소스로도 좋고, 양파나 베이컨, 감자가 든 요리에 넣어도 맛있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파마산 값 오르면 굳이 파마산을 살 필요 없이 이 링컨셔 포처를 쓰면 되겠는걸요. 파마산은 요리에 쓰기에는 좋지만 우마미가 너무 강하고 식감이 까슬거려 그냥 먹기에는 좋지가 않죠. 링컨셔 포처는 경성 치즈라 단단하기는 하지만 파마산 만큼 단단하거나 까슬거리지 않아 그냥 먹기에 좋습니다. 제가 산 제품은 18개월 숙성시킨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매운 게 먹고 싶어 영국 고추잼을 꺼냈습니다. 토스트 위에 넉넉히 바른 뒤 링컨셔 포처를 얹어 그릴에 녹여줍니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다시 한 번 링컨셔 포처 보슬보슬 간 것을 듬뿍 얹어 냠냠 먹습니다. 익힌 치즈와 안 익힌 치즈를 동시에 먹는 거죠. 어우, 짜릿합니다. 누가 영국음식을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합니까.

 

 

 

 

 

 

 

 

 

 

댓글